사월십육일의약속[특집1] 광장의 청년들이 말하는 12.3 내란과 ‘다시 만난 세계’

서로 연결되고 함께 싸우는 장소, 그곳이 광장

 광장의 청년들이 말하는 12.3 내란과 ‘다시 만난 세계’

박희정

지난해 12월 7일,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안이 부결되고 실망과 분노로 숨죽인 시민들은 새로운 투쟁의 장을 열어젖혔다. 고요
제 몸을 태워 어둠을 밝히는 촛불 대신, 형형색색의 응원봉이 등장해 케이팝의 리듬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었다. 응원봉은 그것을 쥔 이들이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고 지켜본 경험이 있음을 뜻했다. 그 경험이 준 힘과 지혜로 그들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감지하고 최전선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차갑게 얼어붙은 남태령에서 경찰 폭력에 고립된 농민들의 곁에 서고, 경호처를 사병처럼 부리며 관저에 숨은 내란수괴를 체포하기 위해 한강진에서 폭설의 밤을 버티었다. 젊은 여성들이 주축이 된 이 청년들 중누군가는 스스로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를 겪으며 “가만히 있지 않기로 한 세대”라 말했다. 대통령의 느닷없는 계엄령 선포 이후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광장에 선 청년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모든 청년의 마음을 전할 수는 없지만, 어떤 목소리들을 모아보았다.

서로 부르다

윤석열 즉각 퇴진과 사회 대개혁을 외친 광장에서 박민주는 익숙한 이름 중 하나가 되었다. 걸그룹 에스파의 노래 ‘위플래쉬’를 들을 때면 남다른 발성과 박자감이 빛나는 그의목소리가 함께 떠오를 이들이 많을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케이팝에 파묻혀 있었다. 중학생이 되면서 댄스 동아리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는데, 중학교를 마칠 무렵 한국무용으로 방향을 틀었다. 장래를 고민하다 내린 결정이다. 그러나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삶이 열렸다. 

“울산에서 살았는데, 무용 선생님이 집회나 사회적 의제로 활동하는 자리에 연대 공연을 많이 다니셨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저도 춤을 통해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업을 하고 싶다는 꿈을 품게 됐죠. 비슷한 지향의 사람들을 만나서 함께 뭔가를 도모하고 사회에 기여하길 바랐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 마주한 세월호참사는 사회 문제로 시선을 더욱 돌리게 된 계기였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반국가 세력으로 몰리는 모습을 보면서 ‘빨갱이’와 같은 낙인이 오래전부터 기득권의 권력 유지 수단으로쓰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는 활동가라는 직업이 있는지도 몰랐죠. 그래도 무언가 실천하는 삶을 살고 싶었어요. 내가 바라는 사회는 어떤 사회일지 생각해 보니, 정치나 사회의 잘못 으로 인해 눈물 흘리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더라고요.” 

대학에서 사회운동을 접하고 2022년에 한국진보연대에서 일하게 되었다. 지금은 자주 통일평화연대(구.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11일 1,549개 시민사회노동단체가 모여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이하 비상행동)을 꾸리면서 박민주는 기획팀이자 행진팀장으로 활동했다. 집회가 100일 넘게 이어진 데다가 내란수괴 석방 후에는 연일 대규모 집회가 이어져 비상행동은 그야말로 ‘비상’이었다. 

“윤석열 정권이 민주노총을 비롯해 사회운동을 탄압하는 기조로 정책을 펼치면 서 시민단체들이 재정이나 인력 등 모든 상황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죠. 비상행 동 역시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 때와 비교하면 상황실 규모가 줄어들었다고 해요.” 

그러나 광장에서는 다른 차원의 질적 변화가 감지되었다. 2016년 10월 29일부터 시작된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인원이 참여한 시위로 일컬어지지만, 여성혐오적 발언이 거침없이 나오고 ‘깃발’로 상징되는 운동권과 민주노총등에 대한 반감도 곳곳에서 목격됐다. 2024년 말 다시 열린 광장은 조금 달랐다. 집회를 주최한 비상행동은 모두가 안전하고 평등한 집회를 만들기 위한 약속문을 공유했다. “우리는 성별·성적지향·성별정체성·장애·연령·국적·등에 관계없이 모두가 동등한 참여자”임을 함께 외친 것이다. 이곳에 모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존엄한 존재로 누구나 안전할 권리가 있으며, 이때 안전이란 평등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천명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과 지향의 차이는 집회를 주도한 연대체의 이름에서부터 확연히 드러난다.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과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 후자에는 ‘국민’이 빠지면서 ‘사회대개혁’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특정 정권의 퇴진이 곧 다른 세상을 여는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차별과 억압으로 굴러가는 사회 전반의 구조를 뜯어고치지 않고서 다른 세상이 오기를 기대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러니 광장에서는 이 사회 곳곳의 뜯어고칠 곳을 알려주는 다채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박민주가 느낀 ‘광장’은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부르는 곳”이다.
“계엄령이 선포된 밤, 총 들고 다니는 계엄군이 등장하고 정치적 활동이나 집회 시위도 일절 금지한다는 포고령까지 내려졌는데 사람들이 국회로 달려왔잖아요. 제 친구가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그 사람들이 무섭지 않았던 게 아니라, 무서워 서 나왔던 거라고. 이건 정말 무서운 일임을 알았고, 우리를 엄습한 두려움을 떨 칠 곳은 광장임을 믿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모여야만 안전하고 강력해진다는 걸. 행진 차량에 올라서 사회를 볼 때마다 서로 응원할 수 있는 말을 함께했어요. 진행자가 사람들의 감정을 공감해주고 그걸 마이크로 크게 내뱉어주는 게 꼭 필 요하더라고요. 힘들면 힘들다, 추우면 춥다, 화가 나면 화가 난다.”

박민주는 광장에 선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배웠다.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을 잘 인식하기 위해 서로가 지닌 감정을 나누고 이해해야 한다는 걸. 1997년생인 그는 이 광장을 주도한 청년들을 ‘MZ세대’로 지칭하는 표현에 동의하기 어렵다. 기성세대가 청년세대를 타자화하는 인식이 담겨있다고 본다.
“그보다는 세월호 세대나 이태원 세대로 명명되는 게 나아요. 저는 제 또래가 희 생되었던 세월호참사에 대한 부채의식이 있거든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미 안함이 그 이후 삶의 방향에 영향을 미쳤어요. 또래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저와 비슷한 마음 결을 종종 마주하게 돼요. 왜 누군가는 그런 삶의 지향을 두고 살 수밖에 없게 됐나를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2014년 세월호참사 직후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와 참교육연구소가 서울·경기·인천의 고2 학생 1051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 결과 ‘내가 위기에 처할 때 국가가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이 46.8%에서 7.7%로 급락했다.1) 국가에 대한 믿음이 부서진 자리에서 “가만히 있지 않기로 한” 어떤 청소년들은 청년이 되어, 누구도 혐오의 대상이 되지 않고 모두가 평등하게 살아가는 사회로 가는 길을 비출 빛을 들었다.

1) 최혜정, 「세월호 세대 “국가가나를 지켜줄 것” 7.7%뿐」, 한겨레, 2014.08.20,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52076.html

차이를 인식하는 시선

지난해 12월 25일을 기점으로 ‘윤석열 퇴진! 세상을 바꾸는 네트워크’가 결성되어 매주수요일 저녁 ‘평등으로 가는 수요일’이라는 이름의 집회를 열었다. 윤석열 퇴진을 촉구하는 동시에 다양한 사회적 의제에 연대하는 장으로 기획되었다. 매번 연대하는 사회적 의제도 바뀌었고, 집회 장소도 광화문 앞에 한정되지 않았다. 올해 1월 15일 저녁 열린 ‘평등으로 가는 수요일’은 윤석열 퇴진 성소수자 공동행동의 주관으로 녹사평역 이태원광장에서 진행됐다. 이상민은 이 자리에 올라 발언했다. 그는 ‘이태원을 기억하는 호박랜턴’(이하 호박랜턴)의 활동가다.
호박랜턴은 이태원참사를 둘러싼 고민을 나누고 실천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핼러윈 축제를 애도의 장으로 전유하자고 제안하며 주기마다 이태원 일대에서 ‘추모 축제’를 열고,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를 기록과 연구로 남기고 있다. 참사 생존자, 연구자, 활동가, 이태원 주민 등 다양한 배경을 지닌 이들의 느슨한 연대를 통해 이태원 참사를 둘러싼 담론과 시민 참여의 경로를 확장하고자 한다.
“참사 이후에 유가족분들 활동에 연대하는 것 말고 시민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잘 보이지 않았어요. 분향소에 지킴이로 활동하거나 특별법 제정 투쟁에 참여해 지지의 목소리를 내거나, 그런 경로밖에 없는 거죠. 이태원참사는 열린 공간에서 일어났고, 그만큼 그 현장에 있던 사람도 많고 다양해요. 당사자로 연루된 그 많 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자꾸만 뒤로 밀린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상민을 만난 이태원 주민들은 ‘사소한 이야기’라면서 머뭇거리다 어떤 말들을 꺼내놓았다. 거기에는 전혀 사소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들어 있었다.

 “동네를 산책하다 보니 참사 이전에는 잘 보이지 않던 경찰이 참사 이후에는 너 무 많더라. 동생이 그날 이태원에 가려다가 말았는데 집에 돌아오는 길에 버스가 막혀서 참사 현장을 목격했다. 이런 말들이 나오는 거죠. 어떤 분은 주변에 너무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은데 나는 일상을 그럭저럭 살 수 있었으니까 괜찮다고 말 해요. 그런데 참사가 일어난 다음 날 바로 이태원으로 일하러 가셔야 했던 분이 거든요. 이태원 같은 핫플레이스에는 대기업에서 기획해서 만드는 매장이 있는 데, 그 매장을 여닫을 권한이 실제로 매장을 운영하는 사람에게는 없어요. 트라 우마적인 경험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야기는 드러내기 어려워요. 그 일을 겪 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무척 안타까운 일이죠. 우리 사회가 그 피해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어떤 정책적인 지원이 이루어져야 하는지 고민하지 못하고 있잖아요.”

1995년생인 이상민은 대학교에 입학한 해에 세월호참사를 마주했다. 그러나 비슷한 나이대의 청년들이 세월호 세대나 이태원 세대로 호명되는 데에는 멈칫하게 된다. 
“재난참사는 수많은 이들이 목격한 일이잖아요. 그 모두가 크게 충격받아야 할 일이죠. 희생자와 또래라고 해서 더 와닿을 수 있겠지만 그게 꼭 중요하다는 생 각은 들진 않아요. 제가 호박랜턴 활동을 하게 된 데에는 어떤 면에서 세월호참 사보다는 페미니즘 리부트의 영향이 더 컸거든요. 페미니즘의 관점은 차이를 주목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어요. 인권의 주체인 인간으로 불리는 존재에 왜 여 성이 포함되지 않았는가, 여성이라고 불리는 대상 안에 얼마나 다른 차이가 있 는가를 보게 하듯이, 재난참사에 연루된 사람들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게 해주었죠.”

안전이 평등으로부터 온다면, 차이를 인식하는 섬세한 시선은 평등의 감각을 갈고 닦는데 필수가 아닐까. 윤석열 퇴진과 사회 대개혁을 외치는 광장에서 다채로운 이야기가 구성되고 있지만, 그 이야기를 정치권이 어떻게 소화해 나갈 것인가를 생각했을 때, 이상민은 우려가 크다. 서부지법 사태를 촉발한 극우세력과 브레이크가 풀린 폭력의 향후 경로에 대해서도 걱정이 많다. 그러나 2030남성의 보수화를 우려하는 시선에 대해서는 신중한 접근을보인다. 

“박근혜 탄핵 국면에 의무경찰로 복무하던 친구가 있었어요. 보수적인 태도로 시위대를 바라보던 그 친구가 어느 날 제게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시위대를 보는데 거기 너가 있겠더라.’ 어떤 집단을 시위대라고 뭉뚱그려서 볼 때와 구체적인 얼굴을 떠올릴 수 있는 내 친구가 저기 서 있음을 염두하고 볼 때가 다르잖아요. 폭력적인 행동이나 생각을 조금이나마 망설일 수도 있겠죠. 저 또한 복무하고 있는 내 친구를 상상했을 때 경찰 집단에 대한 말과 행동을 훨씬 더 섬세하게 고민할 거 같아요. 2030남성이 호명될 때마다 그 기억을 떠올려요. 그 사람들한테 창 하나 내주고 싶다는 마음. 페미니즘을 배운 이후 어떤 자리에서는 제가 괜찮은 남성처럼 호명되지만 사실 제 친구나 저나 비슷한 뿌리를 가졌다고 생각하거든요. 서로 다른 줄기를 뻗어가고 있다면 그 차이는 어디서 비롯된 걸까를 잘 확인하고 싶어요.”

광장에 선 한 가족

미정과 나현, 토끼, 그리고 가라연. 네 사람은 1992년부터 1997년생까지, 한두 살 터울의 또래들이다. 그리고 서로를 가족으로 부른다. 혈연도 혼인 관계도 아니며 서류상으로 묶인 그 무엇도 없다. 그들을 엮고 있는 건 서로 돌보는 마음이다. 토끼와 나현은 오랜 연인이다. 2016년 5월, 서울 강남역에서 여성혐오 살인사건이 일어났을 때, 부산에 살던 두 사람은 추모제를 열고 페미니스트 연대체를 만드는 일에 함께했다. 당시 피해자가 살해당한 곳은 서울 강남의 한 노래방 화장실이었다. 이 노래방은 전국에 가맹점이 있을 만큼 청년들에게 친숙한 장소다. 토끼와 나현은 범행 장소에서 멀리 떨어진 부산에 살았지만, 결코 이 사건을 남의 일로 넘길 수 없었다. 얼마 뒤 부산에서도 한 남성이 지나가던 여성을 각목으로 폭행한 사건이 일어나면서, 두 사람은 여성들의 안전할 권리를 찾기 위해 ‘달빛걷기 시위’를 조직했다. 그리고 2018년 1월 나현이 대학 편입을 준비하면서 함께 서울로 떠났다(지방에는 편입학원이 없었다).

가라연은 나현과 트위터 친구였다. 폭력적인 가족에게 시달리던 그는 어느 날 집을 뛰쳐나왔다. 오갈 데 없어 막막한 밤을 나현이 함께 지새웠다. 첫 시도는 하룻밤의 가출로 끝났다. 그러나 얼마 뒤 가라연은 가족과 완전히 단절했다. 고작 35만 원만 손에 쥐고 거리로 나섰다. 가진 것 없는 이의 홀로 살기는 쉽지 않았다. 어떻게든 난관을 헤쳐 가려 했지만, 세상이 자꾸만 자신을 내동댕이치는 것 같았다. 나현과 토끼가 가라연을 찾아갔을 때, 그는 까만 곰팡이가 가득한 방 안에서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나현과 토끼는 그를 죽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 당장 가라연을 데리고 가려 했으나 가라연은 둘의 도움을 거부했다.
“난 괜찮아. 혼자 다 할 수 있어. 꼭 괜찮아질 거야. 이런 마음으로 고집을 피웠어 요. 집을 나와서 제가 거침없이 잘 살아갈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그럴 능력이 부 족하더라고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죠. 한국은 경쟁적이고 능력 중심의 사회잖아요. 내가 이 사회에 인정받을 수 있는 존재여야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어요.”

나현과 토끼의 집에서 보살핌받으며 가라연은 난생처음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진다”라는 게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 또 다른 가족 구성원인 미정도 마찬가지다. 미정은 고등학교 다니는 내내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좋은 말을 해주지 않았다. 비아냥과 호통과 폭력이 그를 “항상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그에게 집은 “조금만 실패하면 떨어지는, 아니 실패하지 않았어도 항상 떨어지는 곳”이었다. 미정에게 나현과 토끼, 가라연은 “나를 교정하려 하지 않고 잘 내버려두는” “믿고 기회를 주는 사람들”이다. 사전에서나 본 ‘가족’을 현실에서 만난 기분이었다.

나현과 토끼는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면서도 가족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관점에 익숙했다. 두 사람은 가라연과 미정을 만나면서 가족에 대해서도 다른 시각을 열었다. 원가족과 단절하진 않았지만, 훨씬 더 짙은 돌봄을 주고받는 존재가 ‘가족’으로 불려야 마땅한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지니게 되었다.

너와 나의 연결

12월 3일 계엄의 밤, 미정은 일찍 잠이 들었다. 함께 사는 친구가 깨워 일어났을 때 헬기 뜨는 소리가 들렸다. 집이 수도방위사령부가 있는 사당 쪽이라 불안이 엄습했다. 그 시각나현과 토끼는 유튜브 라이브로 국회 앞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걸어서 국회에 갈 수 있는 거리에 산다. 망설이다 용기를 내 국회로 향했다. 계엄 해제안이 의결될 즈음이었다. 가라연은 국회에서 멀리 떨어진 서울 외곽에 집이 있다. 계엄령 선포 소식을 들었을때 도심으로 나가는 차는 이미 끊겨있었다. 나현과 토끼가 국회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두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곁에서 지켜주지 못할까 봐 몹시 무서웠다. 그날부터 활동가인 가라연과 토끼, 나현뿐만 아니라 “운동과는 거리를 두고 살려고” 했던 미정도 광장에서살다시피 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미정은 대학에 입학하고 사회과학 학술 동호회에 들어갔다. 동아리 회원 두 사람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잡혀가는 걸 보았다. 마르크시즘이 담긴 책을 소지했다는 황당한 이유였다.
“무서웠어요. 그래서 박근혜 퇴진 운동 때는 집회에 잘 안 나갔어요. 취준생이니 깐 나에게 불이익이 올까 너무 무서웠는데, 그렇지 않다는 거를 확인하게 돼서 집회에 나갈 수 있었어요. 앞 세대분들이 많이 바꿔주신 덕분이겠죠.”

투자와 관련한 직종에서 일하는 미정은 계엄령 선포 이후 일이 줄었다. 물리적으로 죽는것도 무섭지만, 직장을 잃는 것도 두려웠다. 트럼프 지지자가 많은 회사에서 마음을 나누기 힘들다는 점도 괴로웠다. 나와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고 싶었다. 그의 발걸음은 여의도와 광화문 집회로만 이어지지 않았다. 트랙터를 몰고 서울로 오던 전봉준 투쟁단이 남태령에서 경찰에 막혀 고립된 밤에도 망설임 없이 현장으로 달려갔다.

“남태령에서 경찰이 농민들을 폭력적으로 막아서고 트랙터 유리창도 깨버렸잖아요. 그거 보니까 가정폭력 생존자로서 그냥 있을 수 없었어요. 저 사람이 맞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가면 저 사람들이 안 맞을 수 있다, 그것뿐이었어요. 차벽이 열릴 거라는 생각은 안 했어요.”

남태령으로 달려간 미정의 발걸음은 폭설이 내린 한강진의 밤으로 이어졌고, 다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지하철 투쟁 현장으로 향했다. 이러한 연결은 미정과 그의 가족에게는 어떤 선의의 발현이 아닌, 세계의 재구성이다. 나현은 박근혜 퇴진 운동이 벌어졌을 때도 부지런히 집회에 나갔다. 그러나 그때의 광장은 온전히 내 것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여성혐오 발언이 너무 많았고, 그걸 막을 수도 없었어요. 부산에서는 여성 단체 들이 모여서 모니터링해서 바꿔보자고 ‘여성혐오 하지 맙시다’는 피켓 정도 들고 나가는 수준이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평등수칙을 대형 화면으로 띄워주고 실제로 그런 발언을 저지하기도 하고 2030여성들이 주체로 대두되고 하는 거 보 니까 ‘아, 여기 내 집회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집회가 시작된 첫 주에 무대 에서 발언하게 됐는데 그때는 제가 퀴어인 걸 밝히지 못했어요. 그때까지는 이런 정체성에 관해 얘기하는 사람들도 없었고 라이브로 송출되는 자리니 더 무서웠 어요. 며칠 뒤 어떤 분이 커밍아웃하시고 그 후 그런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걸 보면서 놀랐죠.”

미정 역시 비슷한 장면을 목격했다.
“어떤 분이 앞에 나와서 ‘저는 논바이너리’입니다. 하는데 제 앞에 앉아 있던 40대정도 되어 보이 민주노총 조합원 두 분이 ‘논바이너리가 뭐야?’ 하더니 휴대폰으로 찾아보시는 거예요. 저 그런 거 처음 봤거든요. ‘이건 모르는 거니까 나랑 상관없는발언이네’ 하고 넘기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찾아보는 모습을 보면서 이 사람들에게 난 정말 동지구나 싶었어요. 그 연결감이 너무 좋았어요.”

광장의 안과 바깥

길한샘은 배달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인 라이더유니온 충북지회장이다. 라이더유니온은 올해 1월 14일부터 18일까지 <배달라이더 전국대행진>을 진행했다. 경남 창원부터 서울 광화문까지, 배달라이더에게 가장 소중한 ‘오토바이’를 타고 행진하면서, 각 지역의 라이더안전 실태를 조사하고 시민과 노동자들이 건네는 탄핵 메시지를 모아 광화문에 ‘배달’했다. 행진 시작 전 연대의 연료를 채워달라는 호소에 시민 1,500명의 후원이 쇄도했다. “민주주의를 배달”하는 라이더들의 행진이 서울에 도착한 1월 18일, 광화문 앞에서 열린 비상행동의 집회 발언대에 길한샘 지회장이 올랐다. 발언을 마친 후 <민중의 소리>와 인터뷰하던 도중 길한샘은 울컥해 말을 잠시 잇지 못했다. 광장에 나선 시민들의 환호와 연대는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었다. 배달라이더의 노동 현실을 전하는 기사의 댓글난에는 늘 라이더를 욕하는 댓글만 한가득이었다.
“당시 라이더유니온 활동가들은 세상이 바뀌지 않아 지쳐있는 상태였어요. 그나 마 라이더 대행진을 하면서 조금 힘을 냈어요. 시민들이 아니라, 우리 조합원들, 활동가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지쳤고, 다시 일어나 야 한다는 걸.”

1992년생인 길한샘은 대학교 3학년 때 세월호참사를 마주했다. 살면서 이런 충격이 없었다고 한다. 한국사회가 생명과 안전보다 이윤이 중요한 사회라는 걸 철저히 느꼈고, 정치권력이 진실규명을 방해하는 걸 보며 참담했다. 사회운동을 해야 한다고 느낀 계기이기도하다. 그가 본격적으로 라이더유니온 활동을 시작한 건 2023년. 그해 12월 26일 충북지회를 구성했다.
“플랫폼노동은 어디 한 곳에 사람들이 모여서 일하는 게 아니라 개별적으로 흩어 져 일해요. 그러니 노동자들은 서로 정보를 얻을 통로가 없어요. 노동조합을 조 직하는 일 자체가 매우 어렵죠.”

청주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16차례나 캠페인을 벌였다. 노동자들을 만나 대화하면서 플랫폼노동의 열악한 상황을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대다수의 삶이 녹록지 않다는 걸 느꼈다. 조합비 낼 여유조차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배달 노동은 진입장벽이 매우 낮아요.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데, 이걸 대기업이 이용합니다. 노동유연화를 극대화해서 노동자를 통제하기 쉽게 만드는 거죠. 플 랫폼 기업은 노동자들이 일한 만큼 벌 수 있다고 광고하지만, 실은 일한 만큼 망 가져 가요. 법과 제도가 노동자들을 보호하도록 만들어져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국 사회가 갈수록 권력 있는 사람에게 유리한 구조로 바뀌고 있다고 말한다. 노동자의 삶이 어려운 게 노동자 자신이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게끔 만들어서 노동자가 자기 자신을 비난하게 만드는 구조다. 모든 것을 파편화하고 구조의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는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미래로 가는 길

“노동자에게 대우받을 수 있게 너 스스로 노력하라고 하는데, 우리 사회는 대우 가 부족한 게 아니라 존중이 부족합니다. 비정규직 투쟁은 노사관계만으로 해결 할 수 없어요. 플랫폼 산업은 노조 조합원이 아무리 많아도 대응하기 어려워요. 이 산업은 진입장벽이 낮아 대체인력이 많습니다. 배민과 쿠팡은 이 구조에서 큰 이득을 보지만, 쫓기듯 달려야 하는 라이더와 보행자인 시민은 안전에 위협을 받 아요. 배달 노동자, 시민, 상점이 연대해서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들과 함께 싸워야 합니다.”

라이더들은 기본급을 받는 노동자가 아니라서 집회나 시위에 오기 어렵다. 길한샘은“하루하루 소득이 불안정한 배달라이더에게 집회에 참여한다는 건 파업을 하는 것만큼 힘든 일”라고 말한다. 광화문에 설치된 비상행동의 농성장에 스스로를 60대 남성이라고 밝힌시민이 돈봉투를 던지고 간 일이 있다. 봉투 겉면에 쓴 글에 따르면, 그는 한 달에 두 번밖에 쉬지 못하고 오후 8시쯤에야 일이 끝나 집회에 오고 싶어도 올 수 없는 상황이라 했다. 미안한 마음에 통장을 털어서 후원금을 보낸 것이다. 어떤 목소리는 광장의 집회만으로 드러나기 힘들다.
가라연은 4.16연대 활동가다. 그가 이 활동을 시작하게 된 이유를 거슬러 올라가면, 1997년생으로 또래의 희생을 보며 느낀 큰 충격이 자리한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제가 있던 학교는 소위 명문고라 그런지 애도나 추모의 온도가 달랐어요. 입시 앞에서 사람의 생명이나 공동체의 윤리마저도 뒤로 밀리는 걸 보는 게 저를 힘들 게 했죠. 그 이후 페미니즘을 배우고 퀴어로 정체화하면서 특정한 집단이나 정체 성에 대한 사회적 혐오 탓에 죽는 사람이 이 세상에 너무나 많다는 걸 알게 됐어 요. 그 죽음들이 제게는 사회적 참사와 무관하게 다가오지 않았어요.”

12.3 내란의 밤은 시민들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안겼다. 윤석열의 계엄령 선포가 ‘한밤의 해프닝’이 아니라 철저하게 기획된 것임이 점차 드러나면서 공포와 분노는 더욱 짙어졌다. 권위주의 정권이 오래 득세한 한국에서 ‘안전’은 오랫동안 국가를 위한 말이었다. 국가의 안전은 곧 정권의 안위였다. 그 앞에서는 국민과 비국민의 생명 모두 언제든 희생되어도 될 소모품처럼 여겨졌다. 세월호참사 이후 ‘안전권’에 대한 논의와 제도화를 위한 투쟁은 안전의 주체를 국가나 기업이 아닌 시민으로 다시 쓰는 과정이었다. 파시즘이 대두하는 한국 사회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안전을 위협받는 존재들의 삶을 연결해서 보는 시선이 아닐까. 가라연은 광장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볼 때라고 힘주어 말한다.

“사람들이 ‘광장’이라고 하면 광화문 광장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광장을 그렇게 사고하면 소외되는 사람들에게도 시선을 두기 힘들어요. 가령 지역에서 광화문 집회에 참여하려면 비용은 물론이고 시간도 많이 들여야 하는데 그걸 생각해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지역에서 서울로 집중하는 방식을 넘어서 지역과 서울이 연결되는 다른 방식을 고민하면 좋겠어요. 물리적 공간이 아닌 누구나의 말이 흐르고 만나는 장소로서의 ‘광장’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지 상상해보는기획이 필요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