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가족들을 소개합니다][소식지] 4.16합창단 “세상이 조금은 더 울 수 있도록, 울어서 조금은 더 착해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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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가족들을 소개합니다] 4.16합창단

“세상이 조금은 더 울 수 있도록, 울어서 조금은 더 착해지도록”

강다현


2025년 늦은 봄, 나는 안산에 처음 도착했다. 30년 가까이 4호선 동네에 살면서, 지하철 타고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닿을 반대편 끝자락에 오기까지 11년이 걸렸다. 동생 뻘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가다가 가라앉는 뉴스를 보고 있던 22살에 어떤 마음이 길을 잃었다. ‘진짜 어른’들이 뭔가 방법을 찾을 거란 막연한 기대가 안일했다는 것을 깨닫는 20대가 지나갔고, 내가 어른이 될 차례가 왔다. 여전히 나는 지나간 죽음에도 나아갈 삶에도 덧댈 말을 몰랐다. 여전히 세월호 얘기가 나올 때면 입이 젖은 솜처럼 무거워졌다.
더 일찍 찾아왔어야 했을까. 하지만 어디로 누구를 찾아가 무슨 말을 할지 나는 몰랐다. 괜찮으세요? 힘내세요? 죄송합니다? 광화문에서 나눠주던 노란 리본을 모든 가방에 달았지만, 정체 모를 서러움도 부채감도 입안의 모래처럼 소화되지 않았다.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상실은 분명히 내 일이 아닐 텐데 선명한 고통은 내 것이었다. 내가 유난인지 계속 헷갈렸다. 가만히 기다리면 해결되길, 그래서 내 마음이 좀 편해지길 바라는 마음도 잡초처럼 끈질기게 자랐다. 닮은 죽음들이 여러 번 뉴스에 오르내렸다.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구호를 까먹더라도 이 사회에서 처음 본 죽음과 침묵은 잊히지도 않았다. ‘사회적 참사’라는데, 나는 내 자리가 헷갈려 어디로도 발을 떼지 못했다.
합창단에 대한 글을 써보라는 제안에 덥석 해본 적도 없는 일을 받아들인 것도 밀린 숙제를 해결하고 싶어서였다. 투쟁은 무서워도 예술은 조금 익숙하니까 사람들의 목소리 듣기를 좋아한다는 말을 핑계로 죽음 이후의 사람들을 확인하고 싶었다.

🌊노래는 부딪히는 모든 것을 흔들고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에는 매주 월요일 저녁마다 목소리들이 모여든다고 했다. 공연이 없는 달이 없고, 앨범도 낸 합창단이 11년째 노래하고 있다고 하니 내가 할 말이 없더라도 들을 것은 확실히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긴 했는데 뭐라고 인사를 해야 하지. 넌 누군데 왜 이렇게까지 슬퍼하냐고 하면 뭐라고 말하지. 그럴듯한 말을 찾지 못해서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가슴께가 무거웠다. 키 작은 컨테이너 건물들 사이에 펼쳐진 공터가 축구를 할 만큼 넓은데도 나는 한쪽 구석에 엉거주춤 서 있었다. 갑자기 누가 나타나 눈이 마주칠까 봐 벽마다 붙어 있는 나비, 리본, 전구 등 온통 반짝거리는 노란 것들을 세었다.
6시가 되자 공터로 색색의 차가 모여들었다. 서로 반갑게 인사하며 쏟아진 사람들이 내게도 인사를 건네고 우선 밥을 먹자며 길게 이어진 탁자 앞에 의자를 내어주었다. 온갖 종류의 컵라면, 김밥, 만두 그리고 누군가 직접 담가 온 파김치가 내 앞으로 밀어졌다. 연습 전 저녁 식사가 풍족하지 않았던 적은 없다고 했다. 많을 때는 50명도 넘었던 단원들이 한두 명씩 고구마와 옥수수를 쪄 오고, 전국 방방곡곡 연대 공연을 다니며 만난 사람들이 성주에서 참외를 보내고, 안동에서 사과를 보내서 10년이 지나도록 “그냥 그렇게 왔다.” 자연스레 동네 사람들이 모이는 느티나무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던 외로운 도시 친구들이 떠올랐다. 곱씹던 죽음이 머쓱할 만큼 생생하게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괜한 눈치를 보면서도 막상 담고 나면 한 줌이 되어버린다는 파김치까지 한 접시 다 비웠다. 창현 아빠 담당이라는 드립 커피도 한 잔 받아들 때까지도 아무도 내게 누구냐고, 왜 왔냐고 묻지 않았다.
7시. 연습실에 모인 서른~마흔 명 남짓의 사람들이 제자리를 찾아 앉았다. 졸업 앨범처럼 앳된 얼굴의 사진들이 연습실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연습이 시작되자 그중 몇 명의 이름을 부르고 잠시 함께 머물렀다. 나는 맨 뒷자리에 앉아 처음으로 모든 아이들의 눈을 바라봤다. 이렇게 빼곡한 얼굴들의 이름이 매주 불리고 있는데 이름의 주인들은 아무도 말이 없다는 게 새삼 이상했다. 너희들은 여기 오면 누구에게 무슨 말을 건네고 싶니?
목소리들이 노래를 시작했다. 유가족은 열 명 남짓, 나머지는 시민으로 이루어진 모임인 만큼 노래하는 이 중 누가 그들을 낳고, 떠나보냈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외로운 사람들이 지금은 보여, 그늘진 사람들이 모두 다 보여.
아주 작은 일에도 눈물 흘리는 세상을 만들게.’
‘별처럼 촘촘했던 추억을 모아 별이 뜨고 지는 길목에 모여서 밤마다 노래할게.’
 ‘세상이 조금은 더 울 수 있도록, 울어서 조금은 더 착해지도록, 종이연 하늘 높이 날리며’

그다음 가사는 ‘너를 사랑해.’였다. 메아리처럼 이어지는 여러 번의 ‘너를 사랑해.’를 들으며 나는 늦어도 너무 늦은 눈물이 날까 봐 사진들 옆에 붙은 나비 장식의 날개가 흔들리는 것을 노려보며 숨을 참았다. 유행가에 가장 흔한 테마일 사랑이 여기서 울려 퍼질 땐 마치 처음 듣는 말 같았다. 이 사랑은 벽에 맺히지 않고 소리가 닿는 모든 사람의 몸을 울렸다.
목소리는 딱 그 순간 그 사람의 숨이 그의 온몸을 울려 만드는 진동이다. 몸이 하는 일이니 나이테처럼 살아온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다. 진동은 진원지를 딛고 퍼져나가 부딪치는 모든 것을 흔든다. 그러니 노래는 사람이 만나서 함께할 수 있는 일 중 서로를 가장 깊이 흔드는 일일 것이다. 함께 살고 있다는 감각이 그 어느 때보다 가까이 내 몸을 두드렸다. 곁에서 숨을 보태며 노래를 듣는 일이 구석구석 내 몸을 보듬고 비로소 내 자리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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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와 울음은 같은 숨에서 나온다

안산에서 자란 97년생 박미소 씨는 작년 겨울 막내로 입단했다. 2014년 4월에 뉴스에서 세월호를 봤을 때는 그야말로 어리둥절했다. 건너건너 친구, 같은 초등학교를 나온 이들이 간 옆 학교 또래 아이들 250명이 한날한시에 사라졌는데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울어도 되는지조차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이 동네에서조차 이 주제는 ‘정치적’이라며 대화에서 자꾸 미끄러졌다. 조용히 노란 팔찌를 찼다. 설명할 수 없지만, 마지막 양심 같은 거였다. 대학에서 만난 한 선배의 초대로 4·16합창단의 기획 공연을 찾아간 날, 객석에서 미소 씨는 노래를 들으며 오래 울었다. 그저 그들의 목소리여서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고 머리를 긁적이는 그녀는 10년 만에 합창단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
알토 팀에 배정받은 입단 첫날, 합창단의 첫 창작곡 ‘너’를 함께 부르려 들이마신 숨은 또 울음이 되어 펑펑 쏟아졌다. 곁에 앉은 아무도 놀라지 않고, 자신이 맡은 화음을 계속 불렀다. 노래와 울음은 같은 숨에서 나온다. 매주 돌아오는 월요일 저녁마다 노란 전등이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컨테이너 안에서 어떤 날은 미소 씨가, 어떤 날은 옆옆에 앉은 누군가가 엉엉 울었다. 우는 이가 유가족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옆에 앉은 사람은 박자라도 맞추듯 가만히 우는 이의 등을 토닥이고, 노래도 계속된다.

🌟아늑하고 아득한 계절 앞에서

합창단이 우는 사람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며 노래한 날들도 꽤 쌓였다. 소프라노 팀의 명미 씨는 합창단 활동의 매력이 온갖 세상을 돌아다니는 데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털 든 부츠 신은 발이 꽁꽁 얼어버린 날, 땡볕에 우비를 덮어쓰고 빗소리와 함께 노래하던 현장도 있었다. 높은 탑, 굴뚝, 어디든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추위와 더위와 싸우고,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맞으며 ‘거기 있는 사람들’의 세상은 지성이를 보내기 전 명미 씨에겐 모르는 세상이었다. 착하게, 열심히 살면 행복해진다고 믿었던 세상은 ‘깡통 같은’ 곳이었고, 좁은 줄도 몰랐던 나의 세상 밖엔 울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4·16합창단을 창단한 한 활동가가 ‘노래가 싸움 중 가장 오래간다.’고 말해줬다. 노래를 들고 찾아가, 몰랐던 삶의 증언을 듣고, 다녀와서 다행이다 하며 잠드는 날들이 이제 명미 씨의 일상이 됐다.
성악 전공으로 유학을 다녀온 조카보다도 많은 공연을 하고 사느라, 거실에는 항상 가사 암기를 위해 이면지가 쌓여 있다. 끼니 챙기듯 집에서도 소리 내며 개인 연습을 하는데도 노래라는 게 쉽지만은 않다. 10년을 넘게 자리를 지키고 나니 이제 노래의 맛을 좀 알 것 같아 뿌듯하다가도, 공연 중에 기어이 내 입에서 팀원과 다른 소리가 튀어나올 때면 가슴이 철렁한다. 공연 후 스스로 100점을 준 적은 기억에 없다. 그래도 명미 씨는 노래를 좋아서 한다고 했다.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가을 우체국 앞에서’다.
“단풍이 한참 들 때, 내가 동사무소에 갔다가 나오는데 저만치 앞에 우리 딸이 가고 있네. 근데 어찌나 발걸음이 빠른지 따라잡을 수가 없는 거예요. 하교길에 그 많은 학생 사이에서 지성아 하고 부를 수도 없고. 단원고 앞에 단풍나무 길이 정말 예쁘거든요. 그 노래를 부르면 그 길에 지성이를 쫓아가던 날이 떠올라요.”
이번엔 내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가릴 수 없었다. 명미 씨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내가 아플까 봐 지성이 얘기를 꺼내지 않는데 나는 좋아해. 지성이 얘기를 해서 한 번 떠오르게 해주는 거 나는 고마워요. 지금도 걔 모습이 그냥 선해. 그냥 그때 그 모습으로. 걔는 정말 예뻤어요. 대학 가면 얘를 내가 어떻게 단속하나 걱정했는데, 다른 딸 다 시집 보내고 나서 보니까 내가 걔를 먼저 하늘로 시집보냈네.”
지성이 얘기를 할 때 명미 씨의 미소는, 어떤 시간을 피하지 않고 올곧이 살아낸 사람의 얼굴에만 찾아오는 계절처럼 아늑하고 나에겐 아득했다. 그 앞에서 나는 철없이 삐져나오는 눈물을 닦다가 길 잃은 아이처럼 물었다.
회복할 수 없는 일 이후의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해요?
“좋아하는 거 해요. 할 수 있는 일을 해.”

🌻힘들어도, 꽃

“나는 꽃을 좋아해서 꽃꽃이도 배웠어요. 한 번은 생명안전공원 터에서 예배를 하는데 단상에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공원이라 지천에 꽃인데. 몇 송이 꺾어서 올려놓으면 예쁠 것 같아서 코스모스를 대충 잘라서 묶어 가지고 올려두니 사람들이 좋아하더라고. 배워 놓으니까 또 그렇게 써먹대.
나는 꽃을 사러 양재까지 가요. 가는데 한 번은 지하철에서 길을 잃은 거야. 가다 보니 이상한 데로 가고 있는 거예요. 생판 모르는 데서 내려서 갈아탔는데 또 거꾸로 가고 있네. 그렇게 왔다 갔다 몇 번을 했는데 계속 1호선 안에 갇혀 있고, 여기서 도대체 어떻게 나가지 싶더라고. 얼마나 헤맸는지 지하철만 탔는데 만 보 넘게 걸었다는 거 아니에요. 겨우 양재에 도착했는데 힘이 다 빠져 있었어요. 그렇게 내가 꽃을 사 왔다는 거야. 우리 남편은 힘들게 왜 맨날 거기까지 가느냐고 하는데 나는 좋아서 하는 거예요. 꽃도 보고 싶고, 무슨 꽃이 나왔는지 궁금하고, 가면 향기도 맡을 수 있으니까. 힘들어도 꽃 사러 가요.”
돌아오는 길엔 명미 씨의 차를 얻어 탔다. 면허가 있어도 운전이 무서웠다는 11년 전부터 운전석에서도 꿋꿋하게 버텨온 명미 씨의 차가 부드럽게 나를 역까지 배웅했다. “또 올게요.” 인사하고 4호선에 올라타서는 온몸에 힘이 빠졌다. 그래도 내가 어딜 향해 가는지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어른이 되고 싶다. 아주 작은 일에도 눈물 흘리는 세상에서 웃으며 밥을 나눠 먹고 몸을 울려 노래를 만드는 어른이 되고 싶다. 길을 잃고도 기어이 꽃을 사는 어른이 되고 싶다. 안도의 한숨이 툭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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