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4.16연대
우리는 탄탄히 뿌리 내린 기억과 약속의 공동체

수원4.16연대는 세월호참사 이후 자발적으로 생겨난 시민모임이 중심이 된 연대체다. 참사 직후 수원 지역 시민사회단체와 종교단체중심으로 구성된 ‘세월호참사 수원시민 공동행동’(수원 공동행동)이 그 전신이다. 참사 2주기가 지나면서 자기 의제에 집중해야 하는 기존단체들의 연대 동력이 떨어졌고, 세월호참사에 집중해 활동하는 풀뿌리 모임을 중심으로 조직을 재편한 것이다. 2018년 12월 공식 출범한 수원4.16연대는 현재 성대역 피케팅 팀, 세월호를 기억하는 매탄동촛불, 수원여성회 노란리본공작소, 영통 노란리본공작소 등이 주축이 되어 꾸준히 활동을 펼치고 있다.
성대역 피케팅 팀

성대역 피케팅 팀은 2015년 1월 활동을 시작했다. 수도권 지하철 1호선 성균관대역에서 매달 마지막 주 일요일에 피케팅을 진행한다. 지금도 열 명 내외로 꾸준히 사람들이 모이며, 둘째 주 일요일에는 노란 리본을 만든다. 피케팅을 시작한 이들은 성균관대역 인근에 자리한 수원성교회 사회환경선교부다. 활동 초반에는 교회 안에서 활동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컸다고 한다. 활동을 제안한 남기업 씨는 2015년 가을, 담임목사에게 불려가 야단을 맞는 자리에서 “교회 그만 다닐 각오로” 2시간 동안 설전을 벌였다. 보수신문만 접해온 담임목사와 견해차가 좁혀지지 않자, 남 씨는 문득 이런 질문을 던졌다.
“목사님, 유가족을 만나보신 적이 있습니까?”
예상대로 ‘만나본 적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만나보시겠냐는 물음에 그러겠다는 답이 오자 남기업 씨는 그 자리에서 약속을 잡았다. 그렇게 2주 후에 수원성교회 안광수 목사와 세월호 유가족 창현 엄마 아빠, 시찬 엄마 아빠가 만났다.
“목사님이 처음에는 설득당하지 않으리라는 태도로 잔뜩 긴장하고 계셨어요. 당사자들이 직접 겪은 일을 들으시면서 처음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더니 나중에는 얼굴빛이 달라지면서 ‘회개’하시더라고요. 내가 잘못 알고 있었다며, 정말 미안하다고. 그
후에 목사님이 안산에 가셔서 예배를 인도하고 가족들에게 식사도 대접하셨어요. 유가족을 교회에 초청해서 간담회도 열었죠. 항의하는 교인들이 있으면 목사님이 만나서 설득도 하시고.” (남기업, 성대역 피케팅 팀) 세월호 가족들에게는 짙은 위로가, 연대하는 시민들에게는 깊은 감동이 스민 기억이다. 수원성교회 사회환경선교부는 그 힘으로 지금껏 자리를 지키고 있다. 불은 크게일 때도 있고 잦아들 때도 있지만, 중요한 건 불씨를 지키는 일이라는 마음으로.
영통노란리본공작소
영통 노란리본공작소(노리공)는 수원시 영통구에 사는 엄마들의 모임으로 시작했다. 아이가 어려서 밖에 나가기 힘들지만 리본이라도 만들고 싶다는 누군가의 말에 지역 주민인 구민서 씨가 나섰다. 인터넷 지역 커뮤니티에 제안 글을 올린 후 커피숍에서열린 첫 모임에 20명이 참석했다. 그렇게 모인 이들은 안산이나 광화문에는 못 가더라도 동네에서 꾸준히 만났다. 코로나19로 대면 모임이 어려울 때는 각자 집에서 리본을 만들고 구민서 씨가 집마다 방문해 모으러 다녔다.
긴 시간 함께하면서 갈등도 있었다. 누군가는 모임의 가치보다 자기 욕심을 앞세우기도 했고, 또 누군가는 생각이 달라 떠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매주 화요일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노리공으로 향한다.
그저 의무감이나 사명감에서만 오지 않는다. 노리공은 이제 일상이다.
수많은 일을 함께 겪으면서 서로를 속속들이 아는 사이가 됐다. 함께 지내려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지 알게 됐다는 뜻이다. 이곳에 오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어 좋다. 다른 곳에서는 ‘정치적’이라며 금기시할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마음 상할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 키우는 아이들이 서로 비슷한 또래라 육아 고민도 나눈다. 부지런히 오가는 손 사이로 “오늘 뭐 해 먹지?” “애 고등학교 가는데 뭐 준비해야 돼요?” 같은 말들이 바쁘게 날아다닌다.
아이들 또한 노리공과 함께 성장했다. 방학 때면 공작소가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저희 큰 아이는 아주 내향적이라 제가 밖에서 리본 나누고 있으면 창피해서 숨어 있고 그랬어요. (웃음) 사회적 참사가 일어날 때마다 제가 매번 이야기하는 것도 아닌데, 아이가 스스로 관심 있게 보더라고요. 고등학생이 되더니 학교에서 이태원참사 관련해 상영회를 할 때 주축 멤버가 됐어요.” (구민서, 영통 노란리본공작소) 아장아장 걷던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수학여행을 떠나고 군대에 갈 나이가 되면서 안전한 사회를 만들고 싶은 엄마들의 마음은 더 깊어진다. 그 마음을 타고 영통 노란리본공작소는 뿌리를 더 깊이 내린다.
수원여성회 노란리본공작소

수원여성회 노란리본공작소는 매월 1회 수원역에서 피케팅과 리본 나눔을 한다. 현재 공방장을 맡은 최경자 씨는 2018년에 이 활동을 시작했다. 세월호참사가 일어나기 전에는 신실한 가톨릭 신자로 살아오면서 성당 바깥의 세상은 잘 몰랐다. 참사 초기부터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혼자서 리본을 나누기도 했지만, 혼자 하는 활동에 한계를 느꼈다. 그러던 중 수원4.16연대 대표 정종훈 목사의 페이스북을 보고 용기를 내 ‘노란버스’에 올랐다. 노란버스는 세월호 수원시민공동행동이 매달 한 번씩 진행한 회원 참여행사로, 수원역에서 함께 버스를 타고 안산에 도착해 기억과 약속의 길을 걷고 유가족 간담회에 참가하는 활동으로 구성되었다. 최경자 씨는 그날 이후 삶이 크게 바뀌었다.
“그때까지 저는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만 만나면서 내가 천국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곳에만 좋은 분들이 있는 줄 알았는데, 이 세상에는 또 다른 부류의 좋은 사람들이 많다는 걸 깨달았어요. 가톨릭의 교리 자체는 그렇지 않지만, 신앙인들이 말하는 ‘이웃’은 ‘믿는 사람들’을 뜻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데 세월호 활동하면서 만난 좋은 분들은 ‘나’나 ‘우리’를 넘어서 보다 넓은 의미의 ‘이웃’을 위한 일을 하시더라고요. 저 또한 확장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최경자, 수원여성회 노란리본공작소)
코로나19가 확산한 시기, 수원여성회 노리공 역시 활동이 무척이나 힘들었다. 온라인에서 모여 세월호 희생 학생들의 약전 읽기를 하는 등 대면 활동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다 2021년부터 수원역에서 매달 한 번씩 피케팅을 시작했다. 현재 네다섯 명의 회원들이 노리공에 꾸준히 나온다. 피케팅에만 연대하는 이들도 따로 있다. 풀뿌리 모임들이 수원4.16연대로 뭉쳐 있기에,매년 4월 16일을 전후로 행사를 기획할 때라든가 특별한 상황이 발생할 때 지역의 다른 단체들이 연합할 자리가 만들어진다. 그렇게 운동의 핵을 지켜간다는 자부심이 크다.
매탄동촛불
매탄동 촛불은 매월 16일 영통구청 옆 중심상가 미관광장에서 열린다. 지역에서 마을신문을 만드는 서지연 씨 가족의 제안으로 시작했다. “초기에는 매일 하자고 했는데, 그러기 어렵잖아요. 어떤 날은 저 혼자 있기도 했어요.
촛불을 매일 드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에 첫 한 달만 그렇게 하고, 그 뒤에는 특별법 제정을 위한 서명운동으로 전환했어요.” (서지연, 매탄동 촛불)
2014년 11월 세월호참사 특별법 제정 후 매탄동 촛불은 1년간 휴지기를 가졌다. 그리고 2016년 1월부터 매월 16일 촛불을 다시 들기 시작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는 온라인으로 촛불을 들었다.
“사실 처음엔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회의적인 생각도 들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다 보니 이 활동을 소중하게 여기고 고마워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세월호 가족들을 비롯해 기억하겠다,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분들과 맺은 끈끈한 관계가 소중합니다.” (서지연, 매탄동 촛불)
박근혜 대통령 탄핵 때라든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에는 주변 아파트에서 민원을 넣는 일이 간혹 있었다. 그 외에는 특별히 문제 상황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되레 주변에서 커피나 샌드위치를 가져다주면서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고 해도 촛불문화제를 이어가는 게 쉽지는 않을 터. 활동을 이어가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세상이 세월호 가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정상적인 사회가 됐다면 멈추겠는데, 여전히 참사가 일어나는 세상이잖아요. 이 일이 언제든 나의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수원 4.16연대가 발족한 뒤 무얼 하더라도 수원 4.16연대로 같이 모여서 하니까 외롭지 않다는 점도 큰 힘이에요. 동네 단위로는 뭐라도 행사를 기획하거나 판을 벌리기가 쉽지 않은데, 수원 4.16연대를 통해 동네별 모임들이 연대할 수 있어 든든하지요.” (서지연, 매탄동 촛불)
그리고수원4.16연대

수원4.16연대는 세월호참사를 알리는 활동뿐만 아니라 수원시의회를 움직여 「수원시4·16세월호 참사 희생자 추모 및 안전사회를 위한 조례」를 제정(2019년 5월 17일)하고 희생자 추모 사업과 안전사회를 위한 시민의식증진사업을 시행할 법적 근거를 만들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2020년 4월 8일, 참사 6주기를 앞두고 수원역에 세월호참사를 기억하는 표지석이 설치되었다. 수원에서 안산으로 떠나는 버스가 출발하는 곳이다. 주변 상인회에서 반대가 거셌지만 수원4.16연대는 ‘맞을 각오로’ 기어코 표지석을 설치해내고 말았다.
집행위원장을 맡은 유주호 씨는 명예나 명성이 생기는 것도 아닌 일에 이토록 변함없는 마음으로 함께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놀랍다. 묵묵히 활동하는 힘이 진짜 세상을 바꿔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작년에 세월호참사 10주기를 준비하면서 10주기 이후를 고민했어요. 모임별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논의했죠. 부모님들이 하자고 하는데까지 끝까지 한다고 결론 내렸어요. 길게 가기 위해서는 서로의 힘을 잘 지켜야 할 것같아요.
작년 10월 3일에 가을 소풍을 갔는데, 60명 이상이 참여했어요. 함께 고기도 구워 먹고 이야기도 나누고 매탄동 촛불에서 만든 노래팀이 공연도 했죠. 그런 행사를 열면 예전에는 영통 노리공 엄마들이 아이가 어려서 거의 못 나왔었거든요. 그 엄마들이 이번에는 거의 다 나왔어요. 아이들이 신나서 집에 안 가려고 하더라고요. (웃음) 앞으로 매년 가자고 결의했죠. 11월에 열린 송년 모임에서는 세월호 가족 난타팀인 ‘두때날’이 공연도 하셨죠. 그렇게 우리는 서로 끊어지지 않는 공동체로 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서로 채워주니 쉽게 흔들리지는 않을 거예요.” (유주호, 수원4.16연대 집행위원장)
수원4.16연대
우리는 탄탄히 뿌리 내린 기억과 약속의 공동체
수원4.16연대는 세월호참사 이후 자발적으로 생겨난 시민모임이 중심이 된 연대체다. 참사 직후 수원 지역 시민사회단체와 종교단체중심으로 구성된 ‘세월호참사 수원시민 공동행동’(수원 공동행동)이 그 전신이다. 참사 2주기가 지나면서 자기 의제에 집중해야 하는 기존단체들의 연대 동력이 떨어졌고, 세월호참사에 집중해 활동하는 풀뿌리 모임을 중심으로 조직을 재편한 것이다. 2018년 12월 공식 출범한 수원4.16연대는 현재 성대역 피케팅 팀, 세월호를 기억하는 매탄동촛불, 수원여성회 노란리본공작소, 영통 노란리본공작소 등이 주축이 되어 꾸준히 활동을 펼치고 있다.
성대역 피케팅 팀
성대역 피케팅 팀은 2015년 1월 활동을 시작했다. 수도권 지하철 1호선 성균관대역에서 매달 마지막 주 일요일에 피케팅을 진행한다. 지금도 열 명 내외로 꾸준히 사람들이 모이며, 둘째 주 일요일에는 노란 리본을 만든다. 피케팅을 시작한 이들은 성균관대역 인근에 자리한 수원성교회 사회환경선교부다. 활동 초반에는 교회 안에서 활동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컸다고 한다. 활동을 제안한 남기업 씨는 2015년 가을, 담임목사에게 불려가 야단을 맞는 자리에서 “교회 그만 다닐 각오로” 2시간 동안 설전을 벌였다. 보수신문만 접해온 담임목사와 견해차가 좁혀지지 않자, 남 씨는 문득 이런 질문을 던졌다.
“목사님, 유가족을 만나보신 적이 있습니까?”
예상대로 ‘만나본 적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만나보시겠냐는 물음에 그러겠다는 답이 오자 남기업 씨는 그 자리에서 약속을 잡았다. 그렇게 2주 후에 수원성교회 안광수 목사와 세월호 유가족 창현 엄마 아빠, 시찬 엄마 아빠가 만났다.
“목사님이 처음에는 설득당하지 않으리라는 태도로 잔뜩 긴장하고 계셨어요. 당사자들이 직접 겪은 일을 들으시면서 처음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더니 나중에는 얼굴빛이 달라지면서 ‘회개’하시더라고요. 내가 잘못 알고 있었다며, 정말 미안하다고. 그
후에 목사님이 안산에 가셔서 예배를 인도하고 가족들에게 식사도 대접하셨어요. 유가족을 교회에 초청해서 간담회도 열었죠. 항의하는 교인들이 있으면 목사님이 만나서 설득도 하시고.” (남기업, 성대역 피케팅 팀) 세월호 가족들에게는 짙은 위로가, 연대하는 시민들에게는 깊은 감동이 스민 기억이다. 수원성교회 사회환경선교부는 그 힘으로 지금껏 자리를 지키고 있다. 불은 크게일 때도 있고 잦아들 때도 있지만, 중요한 건 불씨를 지키는 일이라는 마음으로.
영통노란리본공작소
영통 노란리본공작소(노리공)는 수원시 영통구에 사는 엄마들의 모임으로 시작했다. 아이가 어려서 밖에 나가기 힘들지만 리본이라도 만들고 싶다는 누군가의 말에 지역 주민인 구민서 씨가 나섰다. 인터넷 지역 커뮤니티에 제안 글을 올린 후 커피숍에서열린 첫 모임에 20명이 참석했다. 그렇게 모인 이들은 안산이나 광화문에는 못 가더라도 동네에서 꾸준히 만났다. 코로나19로 대면 모임이 어려울 때는 각자 집에서 리본을 만들고 구민서 씨가 집마다 방문해 모으러 다녔다.
긴 시간 함께하면서 갈등도 있었다. 누군가는 모임의 가치보다 자기 욕심을 앞세우기도 했고, 또 누군가는 생각이 달라 떠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매주 화요일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노리공으로 향한다.
그저 의무감이나 사명감에서만 오지 않는다. 노리공은 이제 일상이다.
수많은 일을 함께 겪으면서 서로를 속속들이 아는 사이가 됐다. 함께 지내려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지 알게 됐다는 뜻이다. 이곳에 오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어 좋다. 다른 곳에서는 ‘정치적’이라며 금기시할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마음 상할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 키우는 아이들이 서로 비슷한 또래라 육아 고민도 나눈다. 부지런히 오가는 손 사이로 “오늘 뭐 해 먹지?” “애 고등학교 가는데 뭐 준비해야 돼요?” 같은 말들이 바쁘게 날아다닌다.
아이들 또한 노리공과 함께 성장했다. 방학 때면 공작소가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저희 큰 아이는 아주 내향적이라 제가 밖에서 리본 나누고 있으면 창피해서 숨어 있고 그랬어요. (웃음) 사회적 참사가 일어날 때마다 제가 매번 이야기하는 것도 아닌데, 아이가 스스로 관심 있게 보더라고요. 고등학생이 되더니 학교에서 이태원참사 관련해 상영회를 할 때 주축 멤버가 됐어요.” (구민서, 영통 노란리본공작소) 아장아장 걷던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수학여행을 떠나고 군대에 갈 나이가 되면서 안전한 사회를 만들고 싶은 엄마들의 마음은 더 깊어진다. 그 마음을 타고 영통 노란리본공작소는 뿌리를 더 깊이 내린다.
수원여성회 노란리본공작소
수원여성회 노란리본공작소는 매월 1회 수원역에서 피케팅과 리본 나눔을 한다. 현재 공방장을 맡은 최경자 씨는 2018년에 이 활동을 시작했다. 세월호참사가 일어나기 전에는 신실한 가톨릭 신자로 살아오면서 성당 바깥의 세상은 잘 몰랐다. 참사 초기부터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혼자서 리본을 나누기도 했지만, 혼자 하는 활동에 한계를 느꼈다. 그러던 중 수원4.16연대 대표 정종훈 목사의 페이스북을 보고 용기를 내 ‘노란버스’에 올랐다. 노란버스는 세월호 수원시민공동행동이 매달 한 번씩 진행한 회원 참여행사로, 수원역에서 함께 버스를 타고 안산에 도착해 기억과 약속의 길을 걷고 유가족 간담회에 참가하는 활동으로 구성되었다. 최경자 씨는 그날 이후 삶이 크게 바뀌었다.
“그때까지 저는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만 만나면서 내가 천국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곳에만 좋은 분들이 있는 줄 알았는데, 이 세상에는 또 다른 부류의 좋은 사람들이 많다는 걸 깨달았어요. 가톨릭의 교리 자체는 그렇지 않지만, 신앙인들이 말하는 ‘이웃’은 ‘믿는 사람들’을 뜻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데 세월호 활동하면서 만난 좋은 분들은 ‘나’나 ‘우리’를 넘어서 보다 넓은 의미의 ‘이웃’을 위한 일을 하시더라고요. 저 또한 확장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최경자, 수원여성회 노란리본공작소)
코로나19가 확산한 시기, 수원여성회 노리공 역시 활동이 무척이나 힘들었다. 온라인에서 모여 세월호 희생 학생들의 약전 읽기를 하는 등 대면 활동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다 2021년부터 수원역에서 매달 한 번씩 피케팅을 시작했다. 현재 네다섯 명의 회원들이 노리공에 꾸준히 나온다. 피케팅에만 연대하는 이들도 따로 있다. 풀뿌리 모임들이 수원4.16연대로 뭉쳐 있기에,매년 4월 16일을 전후로 행사를 기획할 때라든가 특별한 상황이 발생할 때 지역의 다른 단체들이 연합할 자리가 만들어진다. 그렇게 운동의 핵을 지켜간다는 자부심이 크다.
매탄동촛불
매탄동 촛불은 매월 16일 영통구청 옆 중심상가 미관광장에서 열린다. 지역에서 마을신문을 만드는 서지연 씨 가족의 제안으로 시작했다. “초기에는 매일 하자고 했는데, 그러기 어렵잖아요. 어떤 날은 저 혼자 있기도 했어요.
촛불을 매일 드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에 첫 한 달만 그렇게 하고, 그 뒤에는 특별법 제정을 위한 서명운동으로 전환했어요.” (서지연, 매탄동 촛불)
2014년 11월 세월호참사 특별법 제정 후 매탄동 촛불은 1년간 휴지기를 가졌다. 그리고 2016년 1월부터 매월 16일 촛불을 다시 들기 시작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는 온라인으로 촛불을 들었다.
“사실 처음엔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회의적인 생각도 들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다 보니 이 활동을 소중하게 여기고 고마워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세월호 가족들을 비롯해 기억하겠다,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분들과 맺은 끈끈한 관계가 소중합니다.” (서지연, 매탄동 촛불)
박근혜 대통령 탄핵 때라든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에는 주변 아파트에서 민원을 넣는 일이 간혹 있었다. 그 외에는 특별히 문제 상황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되레 주변에서 커피나 샌드위치를 가져다주면서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고 해도 촛불문화제를 이어가는 게 쉽지는 않을 터. 활동을 이어가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세상이 세월호 가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정상적인 사회가 됐다면 멈추겠는데, 여전히 참사가 일어나는 세상이잖아요. 이 일이 언제든 나의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수원 4.16연대가 발족한 뒤 무얼 하더라도 수원 4.16연대로 같이 모여서 하니까 외롭지 않다는 점도 큰 힘이에요. 동네 단위로는 뭐라도 행사를 기획하거나 판을 벌리기가 쉽지 않은데, 수원 4.16연대를 통해 동네별 모임들이 연대할 수 있어 든든하지요.” (서지연, 매탄동 촛불)
그리고수원4.16연대
수원4.16연대는 세월호참사를 알리는 활동뿐만 아니라 수원시의회를 움직여 「수원시4·16세월호 참사 희생자 추모 및 안전사회를 위한 조례」를 제정(2019년 5월 17일)하고 희생자 추모 사업과 안전사회를 위한 시민의식증진사업을 시행할 법적 근거를 만들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2020년 4월 8일, 참사 6주기를 앞두고 수원역에 세월호참사를 기억하는 표지석이 설치되었다. 수원에서 안산으로 떠나는 버스가 출발하는 곳이다. 주변 상인회에서 반대가 거셌지만 수원4.16연대는 ‘맞을 각오로’ 기어코 표지석을 설치해내고 말았다.
집행위원장을 맡은 유주호 씨는 명예나 명성이 생기는 것도 아닌 일에 이토록 변함없는 마음으로 함께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놀랍다. 묵묵히 활동하는 힘이 진짜 세상을 바꿔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작년에 세월호참사 10주기를 준비하면서 10주기 이후를 고민했어요. 모임별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논의했죠. 부모님들이 하자고 하는데까지 끝까지 한다고 결론 내렸어요. 길게 가기 위해서는 서로의 힘을 잘 지켜야 할 것같아요.
작년 10월 3일에 가을 소풍을 갔는데, 60명 이상이 참여했어요. 함께 고기도 구워 먹고 이야기도 나누고 매탄동 촛불에서 만든 노래팀이 공연도 했죠. 그런 행사를 열면 예전에는 영통 노리공 엄마들이 아이가 어려서 거의 못 나왔었거든요. 그 엄마들이 이번에는 거의 다 나왔어요. 아이들이 신나서 집에 안 가려고 하더라고요. (웃음) 앞으로 매년 가자고 결의했죠. 11월에 열린 송년 모임에서는 세월호 가족 난타팀인 ‘두때날’이 공연도 하셨죠. 그렇게 우리는 서로 끊어지지 않는 공동체로 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서로 채워주니 쉽게 흔들리지는 않을 거예요.” (유주호, 수원4.16연대 집행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