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새의 날갯짓이 가리키는 곳으로 우리는 행진한다
브라질리언 퍼커션 앙상블 ‘호레이’
박희정

광장은 해방의 장소가 되려는 거친 싸움터다. 그곳에는 늘 음악이 함께한다. 이 행진이 멈추지 않을 강물이 아니라 사방이 가로막힌 작은 섬일까 두려워질 찰나, 음악은 쪼그라든 마음 사이로 따스한 숨을 불어넣는다. 바투카다를 연주하는 ‘호레이’(hooray)도 그 숨을 불어넣는 이들이다. 환호, 만세를 뜻하는 호레이는 큰북과 각종 타악기로 웅장하고 흥겨운 소리를 빚어낸다. 그 소리는 혈관으로 뜨겁게 흘러들어 심장을 쿵쿵 두드린다.
호레이가 빚어내는 리듬에는 누구라도 몸을 흔들게 되지만, 바투카다라는 말은 낯설다. 바투카다는 여러 종류의 타악기를 함께 연주하는 브라질 음악 문화다. 19세기 최대의 노예무역 국가였던 브라질의 흑인 빈민가에서 시작되었고, 흑인 인권운동과도 밀접한 ‘저항의 음악’이다.호레이에게도 음악은 ‘더 나은 세상으로 가는 길’이다. 스무 명 남짓한 구성원이 활동하는데, 그중 바투카다를 전업으로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교직원, 사회복무요원, 싱어송라이터, 물류 회사 직원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터라 연습은 일요일마다 열린다. 주중에 공연이 있으면 대부분 연차를 내고 참여한다.
바투카다를 시작한 시점과 계기는 다 다르지만, 호레이라는 이름으로 뭉친 건 2022년 4월. 당시 활동 터전이었던 서울혁신파크가 오세훈 서울시장의 개발사업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이대로 바투카다를 포기할 수 없었던 이들이 뭉쳐 새로운 팀을 구성했다. 무지개로 물든 퀴어문화축제, 자본주의 성장체제에 맞선 기후정의 행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일, 세월호참사 10주기 전국시민행진 등 저항과 연대의 행진이 있는 곳에서라면 어디에서나 호레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세월호참사 10주기를 맞이해 진행된 전국시민행진 “안녕하십니까?”의 끝을 호레이가 함께 했습니다. 서울시의회 앞 세월호 기억공간까지 흥겨운 바투카다에 맞춰 걷는 추모의 길이 누군가는 새롭다고 말하기도 했는데요. 그날 호레이는 어떤 마음이었는지 궁금하네요. 각자에게 새겨진 세월호참사에 대한 기억을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올쏘: 중학교 때 학교 폭력을 심하게 당한 적이 있어요. 하루는 여러 명에게 일방적으로 맞고 학교 운동장에 혼자 누워있는데, 지나가던 어른들이 담장 사이로 보고는 혀를 끌끌 차시더라고요. 저런 애들이 학교 물 다 흐린다고. 화가 나고 슬펐지만, 어느 날부터 체념해버렸어요.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참 많더라고요. 세월호참사가 일어났을 때도 처음엔 또 어쩔 수 없는 사고가 났나보다 생각했어요. 대학에서 5·18을 다룬 뮤지컬을 연습하고 있을 때였는데, 전원구조가 오보였다는 걸 알고 그때부터 심각해졌죠. 뉴스를 보고도 내가 사기꾼이 될 수 있는 세상이면 이건 뭔가 문제가 있다. 마땅해야 할 게 마땅하지 않다. 어쩔 수 없는 일로 외면하던 현실에 다시 눈을 돌린 계기였어요.
나인: 막 스무 살이 됐을 때 세월호참사가 일어났어요. 참사 100일 집회에 나갔는데, 시청으로 행진하던 중에 방패를 든 경찰과 시민 들이 대치하다 몸싸움이 시작됐어요. 비는 엄청나게 내리고 해산 경고 방송은 시끄럽게 울리고 완전 아수라장이었죠. 정신 차리고 보니까 제가 시위대 맨 뒤로 빠져 있더라고요. 더는 있기가 어려울 것 같아 분향소로 갔어요. 영정들 앞에서 비를 맞으며 한참을 우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저를 안아주시더니 괜찮다고 집에 가라고 말씀해주셨어요. 물을 뚝뚝 흘리면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간 그 날부터 잘못된 일에 분노하고 연대하는 일이 제 삶의 중심에 들어왔어요. 어떤 분들은 저희 음악이 추모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실지도 몰라요. 그런데 저는 추모는 삶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지금 제 삶을 지켜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호레이에서 연주하는 일이기 때문에, 스무 살의 기억을 마음에 새기고 세월호참사를 추모하는 행진에 나갔습니다.
‘있을 자리’를 만드는 음악
만보: 세월호참사가 일어났을 때 14살이었어요. 학교 차원에서 추모활동에 참여했는데, 세월호와 제대로 만난 건 하자 작업장학교에 들어가서 바투카다를 시작하면서였어요. 바투카다 팀이 세월호 관련 행사나 시위에 많이 나갔는데, 한번은 목포 시내에서 세월호가 있는 데까지 유가족분들과 악기를 연주하면서 같이 걸어갔어요. 끝나고 아버님 한 분이 아들 같다고 안아주셨거든요. 그때는 웃으면서 감사하다고 말했는데, 밤에 집에 돌아와 자려는데 눈물이 나는 거예요. 일본어에 ‘이바쇼’(居場所)라는 단어가 있어요. 내가 온전히 나로서 있을 수 있는 곳이라는 뜻이에요. 유가족분들이 저희 공연을 보시면 웃으면서 즐겁게 춤도 추시거든요. 이바쇼에 계신 것 같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목포에서 유가족 아버님이 안아주셨을 때, 저도 처음으로 이바쇼에 있는 것 같았어요. 내 연주가 누군가에게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걸 느꼈어요.
이서: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12살이었어요. 대안학교에 다녀서 어른들이 저를 집회나 추모하는 자리에 데려가 주셨죠. ‘백창우와 굴렁쇠 아이들’이라는 팀에 속해 있어서 공연자로 추모 무대에 서게 됐는데, 어떤 감정을 느끼기보다는 주어진 역할을 수행했던 것 같아요. 더는 누가 나를 광장에 데려가 주지 않는 나이가 됐고, 호레이를 만났어요. 세월호참사 추모 공연에 서겠다는 결정을 스스로 하고, 그곳에 가서 추모의 마음을 지니고 온 사람들의 얼굴을 보자 그때서야 울 준비가 됐다고 느꼈어요. 1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얻어맞은 것 같은 슬픔을 느낄 때가 몇 번쯤 있었어요. 제가 단원고 학생들의 나이가 됐을 때, 그리고 이태원 참사같이 반복되는 참사를 마주할 때. 물리적 시간으로는 세월호참사로부터 멀리 와버렸지만, 오히려 저는 세월호참사와 점점 더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느리게 소화하는 참사의 기억’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계속해서 세월호참사에 다가가려고 해요.
'이태원을 기억하는 호박랜턴'이 이태원참사 2주기를 맞이해 주최한 추모행사인 ‘멈추지 않는 노래를 해’에도 참여하셨잖아요. 핼러윈 축제가 열릴 10월 마지막 주 토요일 밤, 녹사평역 광장에서 이태원참사를 기억하는 ‘축제’가 열렸어요. 그날의 공연은 어떠했나요?
이서: 저는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하고 있어서 호레이의 공연 전에 혼자 무대에 올라 노래를 했어요. 끝나고 부랴부랴 호레이로 돌아와 공연했죠. 그 순간에는 현장에 몸과 정신을 맡기고 흥겹게 즐겼는데, 돌아와서 계속 고민이 들더라고요. 저희 연주에 어떤 메시지가 있지는 않잖아요. 이태원에 축제를 즐기러 온 사람들에게 우리의 연주가 ‘호박랜턴’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온전히 전달했을까. 멤버들이랑 몸에 글씨가 적힌 무언가라도 휘감았어야 했을까.
나인: 비슷한 고민을 저 또한 했어요. 그런데 공연이 끝나고, 현장에 계셨던 이태원참사 생존자분들과 유가족분들이 저희한테 위로받았다는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그날 현장에 경찰이 너무 많아서 두려웠거든요. 그런데 호레이에서 공연하면서 처음으로 경찰분들한테 너무 좋았다는 칭찬도 받았어요. 이태원 전체가 저희를 반겨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추모는 삶이니까, 이태원이라는 공간이 가진 분위기와 이곳을 찾은 사람 모두와 함께하는 일 자체가 추모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12·3 내란사태’ 이후 이어진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에서도 호레이를 만날 수 있었어요. 호레이의 활동이 조금 더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는데요. 국회에서 탄핵결의안이 부결된 날(2024년 12월 7일) 여의도에 있었는데, 사람이 많아서 후미에서는 무대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어요. 그때 호레이가 등장해서 공연을 시작하니 주위에 활기가 도는 게 느껴졌어요.
만보: 부결 소식이 들려왔을 때, 실망한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기 시작했어요. 집회대열 앞쪽에서는 시위를 이어가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거든요. 우리가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집에 가는 사람들을 붙잡으려고 악기를 막 두드렸어요. 가지 말고 계속 같이 있어 달라는 이야기를 하는 게 우리 역할이구나. 앞으로도 그 역할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올쏘: 현장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고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 국회 앞쪽에서 꽤 멀리 떨어진 국회 3문과 4문에도 시민들이 있었어요. 거기는 시위를 이끄는 중심이 없어서 다들 목이 터져라 4박자 구호만 외치고 있었거든요. 그쪽으로 이동해 악기를 연주하면서, 저희가 가져간 확성기로 자유발언대를 운영했어요. 사람들 서로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악기를 연습한 시간뿐만 아니라, 호레이가 사회에 말을 걸어온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음악으로 사회에 말을 거는 호레이의 마음이 궁금하네요.
만보: 호레이 로고가 벌새인데요. 남미 원주민들에게 전해지는 이야기에 ‘크리킨디’라는 작은 벌새가 등장해요. 어느 날 숲에 큰불이 났어요. 동물들이 다 도망가고 있는데, 크리킨디만 불을 끄겠다며 작은 물방울 하나를 입에 물고 분주히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다른 동물들이 그걸 보고 비웃었어요. 그러자 크리킨디가 말해요.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거야.’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요. 저희한테는 그 물방울이 음악 같아요. 아마도 음악이 많은 걸 바꿀 수는 없을 거예요. 그래도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죠.
올쏘: 크리킨디가 불은 못 껐어도, 크리킨디 이야기가 퍼져서 불을 예방할 수도 있잖아요. 언젠가 불이 또 났을 때 크리킨디한테 감화된 사람들이 같이 열심히 불을 끄는 날이 올 수도 있고요.
다양한 사회적 의제가 있는 현장에 함께하시는데, 호레이만의 연대의 원칙이 있나요?
올쏘: 제1원칙을 꼽자면 ‘우리는 하나는 아니다’라고 할 수 있어요. 멤버 각자 가장 시급하거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의제가 다 달라요. 그걸 억지로 하나로 모아내려고 하지 않죠. 공연을 요청하는 연락을 받으면, 저희가 갈 자리에 대한 자료를 달라고 말씀드려요. 그걸 단톡방에 올리고 그 의제에 공감하는 팀원들이 자원해서 매번 다른 유닛을 만들어요. 그래서 공연마다 참여하는 인원에 차이가 납니다. 5명인 공연도 있고 15명인 공연도 있어요. 나는 이 의제에는 아직 마음이 안 간다면 안 와도 됩니다. ‘파편화된 개인들의 느슨하지만 질긴 연대.’ 이게 저희 내부 운영 원칙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나인: 저희는 개개인을 존중하고, 팀 안에서 누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를 다 같이 중요하게 생각해줘요. 그 사람과 내가 생각의 디테일이 조금씩 다르더라도 그 말에 귀 기울여 주고 같이 연대하려는 분위기가 있거든요. 그래서 저희가 다양한 현장에 갈 수 있는 거라 생각해요.
이서: 제가 싱어송라이터로 만드는 음악도 그렇고 평소에 말이나 행동도 작고 조용해요. 호레이를 통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고 소리 내는 경험을 쌓아가다 보니까 실제로 제가 드러내고 표현할 수 있는 범위도 조금씩 넓어지는 것 같아요. 또, 여러 현장에 연대하러 가면서 제가 모르고 경험해 보지 못했던 세상을 계속 접하게 된다는 점에서도 호레이는 저의 세상을 넓혀주고 있습니다.
작은 새의 날갯짓이 가리키는 곳으로 우리는 행진한다
브라질리언 퍼커션 앙상블 ‘호레이’
박희정
광장은 해방의 장소가 되려는 거친 싸움터다. 그곳에는 늘 음악이 함께한다. 이 행진이 멈추지 않을 강물이 아니라 사방이 가로막힌 작은 섬일까 두려워질 찰나, 음악은 쪼그라든 마음 사이로 따스한 숨을 불어넣는다. 바투카다를 연주하는 ‘호레이’(hooray)도 그 숨을 불어넣는 이들이다. 환호, 만세를 뜻하는 호레이는 큰북과 각종 타악기로 웅장하고 흥겨운 소리를 빚어낸다. 그 소리는 혈관으로 뜨겁게 흘러들어 심장을 쿵쿵 두드린다.
호레이가 빚어내는 리듬에는 누구라도 몸을 흔들게 되지만, 바투카다라는 말은 낯설다. 바투카다는 여러 종류의 타악기를 함께 연주하는 브라질 음악 문화다. 19세기 최대의 노예무역 국가였던 브라질의 흑인 빈민가에서 시작되었고, 흑인 인권운동과도 밀접한 ‘저항의 음악’이다.호레이에게도 음악은 ‘더 나은 세상으로 가는 길’이다. 스무 명 남짓한 구성원이 활동하는데, 그중 바투카다를 전업으로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교직원, 사회복무요원, 싱어송라이터, 물류 회사 직원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터라 연습은 일요일마다 열린다. 주중에 공연이 있으면 대부분 연차를 내고 참여한다.
바투카다를 시작한 시점과 계기는 다 다르지만, 호레이라는 이름으로 뭉친 건 2022년 4월. 당시 활동 터전이었던 서울혁신파크가 오세훈 서울시장의 개발사업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이대로 바투카다를 포기할 수 없었던 이들이 뭉쳐 새로운 팀을 구성했다. 무지개로 물든 퀴어문화축제, 자본주의 성장체제에 맞선 기후정의 행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일, 세월호참사 10주기 전국시민행진 등 저항과 연대의 행진이 있는 곳에서라면 어디에서나 호레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세월호참사 10주기를 맞이해 진행된 전국시민행진 “안녕하십니까?”의 끝을 호레이가 함께 했습니다. 서울시의회 앞 세월호 기억공간까지 흥겨운 바투카다에 맞춰 걷는 추모의 길이 누군가는 새롭다고 말하기도 했는데요. 그날 호레이는 어떤 마음이었는지 궁금하네요. 각자에게 새겨진 세월호참사에 대한 기억을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올쏘: 중학교 때 학교 폭력을 심하게 당한 적이 있어요. 하루는 여러 명에게 일방적으로 맞고 학교 운동장에 혼자 누워있는데, 지나가던 어른들이 담장 사이로 보고는 혀를 끌끌 차시더라고요. 저런 애들이 학교 물 다 흐린다고. 화가 나고 슬펐지만, 어느 날부터 체념해버렸어요.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참 많더라고요. 세월호참사가 일어났을 때도 처음엔 또 어쩔 수 없는 사고가 났나보다 생각했어요. 대학에서 5·18을 다룬 뮤지컬을 연습하고 있을 때였는데, 전원구조가 오보였다는 걸 알고 그때부터 심각해졌죠. 뉴스를 보고도 내가 사기꾼이 될 수 있는 세상이면 이건 뭔가 문제가 있다. 마땅해야 할 게 마땅하지 않다. 어쩔 수 없는 일로 외면하던 현실에 다시 눈을 돌린 계기였어요.
나인: 막 스무 살이 됐을 때 세월호참사가 일어났어요. 참사 100일 집회에 나갔는데, 시청으로 행진하던 중에 방패를 든 경찰과 시민 들이 대치하다 몸싸움이 시작됐어요. 비는 엄청나게 내리고 해산 경고 방송은 시끄럽게 울리고 완전 아수라장이었죠. 정신 차리고 보니까 제가 시위대 맨 뒤로 빠져 있더라고요. 더는 있기가 어려울 것 같아 분향소로 갔어요. 영정들 앞에서 비를 맞으며 한참을 우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저를 안아주시더니 괜찮다고 집에 가라고 말씀해주셨어요. 물을 뚝뚝 흘리면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간 그 날부터 잘못된 일에 분노하고 연대하는 일이 제 삶의 중심에 들어왔어요. 어떤 분들은 저희 음악이 추모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실지도 몰라요. 그런데 저는 추모는 삶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지금 제 삶을 지켜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호레이에서 연주하는 일이기 때문에, 스무 살의 기억을 마음에 새기고 세월호참사를 추모하는 행진에 나갔습니다.
‘있을 자리’를 만드는 음악
만보: 세월호참사가 일어났을 때 14살이었어요. 학교 차원에서 추모활동에 참여했는데, 세월호와 제대로 만난 건 하자 작업장학교에 들어가서 바투카다를 시작하면서였어요. 바투카다 팀이 세월호 관련 행사나 시위에 많이 나갔는데, 한번은 목포 시내에서 세월호가 있는 데까지 유가족분들과 악기를 연주하면서 같이 걸어갔어요. 끝나고 아버님 한 분이 아들 같다고 안아주셨거든요. 그때는 웃으면서 감사하다고 말했는데, 밤에 집에 돌아와 자려는데 눈물이 나는 거예요. 일본어에 ‘이바쇼’(居場所)라는 단어가 있어요. 내가 온전히 나로서 있을 수 있는 곳이라는 뜻이에요. 유가족분들이 저희 공연을 보시면 웃으면서 즐겁게 춤도 추시거든요. 이바쇼에 계신 것 같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목포에서 유가족 아버님이 안아주셨을 때, 저도 처음으로 이바쇼에 있는 것 같았어요. 내 연주가 누군가에게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걸 느꼈어요.
이서: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12살이었어요. 대안학교에 다녀서 어른들이 저를 집회나 추모하는 자리에 데려가 주셨죠. ‘백창우와 굴렁쇠 아이들’이라는 팀에 속해 있어서 공연자로 추모 무대에 서게 됐는데, 어떤 감정을 느끼기보다는 주어진 역할을 수행했던 것 같아요. 더는 누가 나를 광장에 데려가 주지 않는 나이가 됐고, 호레이를 만났어요. 세월호참사 추모 공연에 서겠다는 결정을 스스로 하고, 그곳에 가서 추모의 마음을 지니고 온 사람들의 얼굴을 보자 그때서야 울 준비가 됐다고 느꼈어요. 1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얻어맞은 것 같은 슬픔을 느낄 때가 몇 번쯤 있었어요. 제가 단원고 학생들의 나이가 됐을 때, 그리고 이태원 참사같이 반복되는 참사를 마주할 때. 물리적 시간으로는 세월호참사로부터 멀리 와버렸지만, 오히려 저는 세월호참사와 점점 더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느리게 소화하는 참사의 기억’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계속해서 세월호참사에 다가가려고 해요.
'이태원을 기억하는 호박랜턴'이 이태원참사 2주기를 맞이해 주최한 추모행사인 ‘멈추지 않는 노래를 해’에도 참여하셨잖아요. 핼러윈 축제가 열릴 10월 마지막 주 토요일 밤, 녹사평역 광장에서 이태원참사를 기억하는 ‘축제’가 열렸어요. 그날의 공연은 어떠했나요?
이서: 저는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하고 있어서 호레이의 공연 전에 혼자 무대에 올라 노래를 했어요. 끝나고 부랴부랴 호레이로 돌아와 공연했죠. 그 순간에는 현장에 몸과 정신을 맡기고 흥겹게 즐겼는데, 돌아와서 계속 고민이 들더라고요. 저희 연주에 어떤 메시지가 있지는 않잖아요. 이태원에 축제를 즐기러 온 사람들에게 우리의 연주가 ‘호박랜턴’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온전히 전달했을까. 멤버들이랑 몸에 글씨가 적힌 무언가라도 휘감았어야 했을까.
나인: 비슷한 고민을 저 또한 했어요. 그런데 공연이 끝나고, 현장에 계셨던 이태원참사 생존자분들과 유가족분들이 저희한테 위로받았다는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그날 현장에 경찰이 너무 많아서 두려웠거든요. 그런데 호레이에서 공연하면서 처음으로 경찰분들한테 너무 좋았다는 칭찬도 받았어요. 이태원 전체가 저희를 반겨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추모는 삶이니까, 이태원이라는 공간이 가진 분위기와 이곳을 찾은 사람 모두와 함께하는 일 자체가 추모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12·3 내란사태’ 이후 이어진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에서도 호레이를 만날 수 있었어요. 호레이의 활동이 조금 더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는데요. 국회에서 탄핵결의안이 부결된 날(2024년 12월 7일) 여의도에 있었는데, 사람이 많아서 후미에서는 무대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어요. 그때 호레이가 등장해서 공연을 시작하니 주위에 활기가 도는 게 느껴졌어요.
만보: 부결 소식이 들려왔을 때, 실망한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기 시작했어요. 집회대열 앞쪽에서는 시위를 이어가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거든요. 우리가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집에 가는 사람들을 붙잡으려고 악기를 막 두드렸어요. 가지 말고 계속 같이 있어 달라는 이야기를 하는 게 우리 역할이구나. 앞으로도 그 역할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올쏘: 현장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고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 국회 앞쪽에서 꽤 멀리 떨어진 국회 3문과 4문에도 시민들이 있었어요. 거기는 시위를 이끄는 중심이 없어서 다들 목이 터져라 4박자 구호만 외치고 있었거든요. 그쪽으로 이동해 악기를 연주하면서, 저희가 가져간 확성기로 자유발언대를 운영했어요. 사람들 서로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악기를 연습한 시간뿐만 아니라, 호레이가 사회에 말을 걸어온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음악으로 사회에 말을 거는 호레이의 마음이 궁금하네요.
만보: 호레이 로고가 벌새인데요. 남미 원주민들에게 전해지는 이야기에 ‘크리킨디’라는 작은 벌새가 등장해요. 어느 날 숲에 큰불이 났어요. 동물들이 다 도망가고 있는데, 크리킨디만 불을 끄겠다며 작은 물방울 하나를 입에 물고 분주히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다른 동물들이 그걸 보고 비웃었어요. 그러자 크리킨디가 말해요.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거야.’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요. 저희한테는 그 물방울이 음악 같아요. 아마도 음악이 많은 걸 바꿀 수는 없을 거예요. 그래도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죠.
올쏘: 크리킨디가 불은 못 껐어도, 크리킨디 이야기가 퍼져서 불을 예방할 수도 있잖아요. 언젠가 불이 또 났을 때 크리킨디한테 감화된 사람들이 같이 열심히 불을 끄는 날이 올 수도 있고요.
다양한 사회적 의제가 있는 현장에 함께하시는데, 호레이만의 연대의 원칙이 있나요?
올쏘: 제1원칙을 꼽자면 ‘우리는 하나는 아니다’라고 할 수 있어요. 멤버 각자 가장 시급하거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의제가 다 달라요. 그걸 억지로 하나로 모아내려고 하지 않죠. 공연을 요청하는 연락을 받으면, 저희가 갈 자리에 대한 자료를 달라고 말씀드려요. 그걸 단톡방에 올리고 그 의제에 공감하는 팀원들이 자원해서 매번 다른 유닛을 만들어요. 그래서 공연마다 참여하는 인원에 차이가 납니다. 5명인 공연도 있고 15명인 공연도 있어요. 나는 이 의제에는 아직 마음이 안 간다면 안 와도 됩니다. ‘파편화된 개인들의 느슨하지만 질긴 연대.’ 이게 저희 내부 운영 원칙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나인: 저희는 개개인을 존중하고, 팀 안에서 누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를 다 같이 중요하게 생각해줘요. 그 사람과 내가 생각의 디테일이 조금씩 다르더라도 그 말에 귀 기울여 주고 같이 연대하려는 분위기가 있거든요. 그래서 저희가 다양한 현장에 갈 수 있는 거라 생각해요.
이서: 제가 싱어송라이터로 만드는 음악도 그렇고 평소에 말이나 행동도 작고 조용해요. 호레이를 통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고 소리 내는 경험을 쌓아가다 보니까 실제로 제가 드러내고 표현할 수 있는 범위도 조금씩 넓어지는 것 같아요. 또, 여러 현장에 연대하러 가면서 제가 모르고 경험해 보지 못했던 세상을 계속 접하게 된다는 점에서도 호레이는 저의 세상을 넓혀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