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기억공간][소식지] 장소와 시간을 잇는 다정한 기억의 의자

[4.16기억공간을 소개합니다]

장소와 시간을 잇는 다정한 기억의 의자

미국과 뉴질랜드의 공원에 세워진 세월호 기억 벤치

박희정


푸른 잔디가 깔린 공원 한쪽, 누군가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놓인 평범한 벤치가 있다. 하지만 그 의자에 가까이 다가가 동판에 새겨진 문장을 읽는 순간, 그곳은 단순한 휴식처를 넘어 국경과 시간을 잇는 특별한 기억의 공간으로 변한다. 미국 애틀랜타와 뉴질랜드 오클랜드에 세워진 ‘세월호 기억 벤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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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애틀랜타: 소녀상 곁에서 생명의 가치를 묻다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세월호를 잊지 않는 애틀랜타 사람들의 모임(애틀랜타 세사모)’은 참사 직후인 2014년 4월 30일, 고국에서 들려온 비보에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시작되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아픔을 함께 나누고 참사의 진실을 규명하겠다는 간절함이 이들을 묶어주었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세사모는 이태원 참사와 같은 비극이 반복되는 현실을 마주하며, 더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으로 활동을 이어왔다.

세사모 회원들은 참사 10주기를 지나며 희생된 304명의 생명을 영원히 기억할 상징적인 장소를 고민했다. 그렇게 선택된 곳이 브룩헤이븐 블랙번 공원 안의 평화의 소녀상 옆자리다. 장승순 교수는 이 벤치를 소녀상 곁에 놓는 이유에 대해 "생명의 소중함을 기억하고, 공동체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과제를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제막식 날, 벤치에는 304명의 생명을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간직하겠다는 다짐이 영문으로 새겨졌다. 장준필 님을 비롯한 세사모 활동가들은 이곳을 찾는 이들이 벤치에 앉아 잠시 쉬며 다시는 이런 참사가 반복되지 않는 안전한 세상을 함께 꿈꾸길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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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오클랜드: 이웃의 일상으로 스며든 노란 리본

멀리 떨어진 뉴질랜드 오클랜드의 실반 파크에도 파란 호수를 마주 보고 선 노란 리본의 의자가 있다. 이곳을 지키는 ‘더좋은세상 뉴질랜드 한인모임’은 2017년 세월호 유가족들을 뉴질랜드로 초청해 간담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당시 세월호에 대한 무수한 루머를 바로잡고 진실을 알리기 위해 장소를 빌리는 것조차 쉽지 않았지만, 강당을 가득 채운 동포들의 뜨거운 관심을 확인하며 활동의 확신을 얻었다.

이 모임의 레베카 님은 뉴질랜드 공원 곳곳에 누군가를 기리는 벤치가 놓여 있는 일상적인 문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세월호 가족들이 추모의 마음이 너무 무겁게만 느껴지지 않고 산책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기억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오클랜드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초창기 정착지에 세워진 이 벤치는 이제 그 자체로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다. 순천 님은 벤치 앞에 서면 호수 위에서 세일링을 즐기는 사람들과 평화로운 숲의 풍경이 펼쳐진다고 말한다. 그 평온한 공간에서 활동가들은 매년 4월이 되면 벤치를 둘러싸고 서서 희생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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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러러보는 탑이 아닌, 등을 내어주는 다정한 기억

벤치라는 기억공간은 우리에게 조금은 낯설고도 특별하게 다가온다. 한국에서 추모의 장소라고 하면 보통 거대한 탑이나 엄숙한 전시관처럼 고개를 들어 우러러봐야 하는 공간을 먼저 떠올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벤치는 그 결이 전혀 다르다. 높이 솟아 권위를 드러내는 대신, 지친 이들에게 등을 내어주고 내 몸의 높이와 기꺼이 맞닿아주는 ‘낮고 다정한 공간’이다.

이곳에서 슬픔은 격리된 장소에 박제되지 않고, 강아지와 산책하고 아이들이 뛰노는 풍경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누군가는 벤치를 찾아와 말없이 꽃을 두고 가고, 산책하던 낯선 이웃은 우연히 벤치에 앉았다가 동판의 글귀를 보며 그날의 기억을 공유하게 된다. 벤치는 정보를 강요하는 대신 부드러운 방식으로 연대의 말을 건넨다. “잠시 앉아 쉬어도 괜찮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이 생명들을 기억해 달라”고 말이다.


기억한다는 것은 때로 거창한 구호보다 곁에 있는 작은 상징물에서 더 큰 힘을 얻기도 한다. 애틀랜타와 오클랜드에 놓인 두 개의 벤치는 비록 소박한 의자일 뿐이지만, 그곳에 앉는 모든 이들에게 304명의 생명이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속삭여준다. 이 벤치들은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단단한 지지대가 되어, 우리가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그날의 다짐을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 묵묵히 지켜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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