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소식지] 추운 겨울의 외투처럼, 가족들 곁에 머무는 사람 - 김선우

[인터뷰] 

추운 겨울의 외투처럼, 가족들 곁에 머무는 사람

4.16연대 사무처장 김선우를 만나다 


인터뷰어

김순길(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사무처장)

박희정(「사월십육일의약속」편집위원장)

정옥다예·이경희(4.16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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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자리는 영광보다 부채감으로 시작되고, 확신보다 책임감으로 유지된다. 2015년 세월호참사국민대책회의를 전신으로 하여 출범한 4.16연대가 2019년 내부 갈등이라는 풍랑을 만났을 때, 그 정상화의 키를 잡은 이는 대구에서 온 활동가 김선우였다. “딱 1년만 머물겠다”던 다짐은 가족들의 곁을 지키며 어느덧 7년의 세월이 되었다. 「사월십육일의약속」 2026년 봄여름 호에서는 진상규명을 하나의 박제된 결과가 아닌 끝없이 이어지는 ‘과정’이라 정의하는 사람, 4.16운동의 단단한 버팀목 김선우 사무처장을 만났다.


"대구에서 올라온 김선우입니다"라는 말의 무게

희정: 소식지 인터뷰 코너가 생긴 이래 첫 활동가 인터뷰입니다. 사실은 4.16운동의 ‘초 셀럽’이시죠. 김선우 사무처장님, 자기소개부터 부탁드려요.

선우: 윤희 어머니(김순길)가 자신을 ‘단원FM 진행자’라고 소개하실 때 생소하면서도 기분이 좋았어요. '사무처장'이라는 직함 말고 나를 설명할 말이 뭘까 생각해봤어요. 처음에 사무처장을 맡았을 땐 항상 “대구에서 올라온 김선우입니다”라고 저를 소개했어요. 역시나 “대구에서 올라와 이제 서울내기가 된 김선우”라는 말이 제일 먼저 떠오르네요.

희정: 그 수식어를 어느 순간부터 안 쓰시게 된 계기가 있나요?

선우: 서울 생활이 정말 생소했거든요. 지역 운동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신념으로 서울행 제안을 늘 거절해 왔어요. ‘보수의 심장’이라는 대구에서 진보운동을 한다는 자부심도 컸고요. 그런데 서울에 올라와 한 4년쯤 지나니 그 말을 안 쓰게 되더라고요. 4.16연대라는 현장이 제 삶의 가장 깊숙한 자리로 들어왔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순길: 대구를 떠나본 적 없는 분인데, 4.16연대 사무처장 제안을 받았을 때, 이게 내 운명인가 싶으셨나요?

선우: 운명… 그랬던 것 같아요. 2019년 당시 4.16연대가 여러 문제로 혼란스러웠어요. 가협도 4.16연대가 정상화될 때까지는 협력을 중단하겠다고 공표한 상황이었죠. 엄중한 상황이라서인지 사무처장을 맡겠다고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어요. ‘누군가 해야 한다면 내가 하자’는 마음으로 올라왔어요. 대구에서 해오던 활동을 정리하는 게 가장 큰 고민이었지만, 눈에 밟히는 세월호 가족들의 얼굴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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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만 있다 가겠다"던 다짐이 7년이 되기까지 

희정: 처음 오셨을 때 “딱 1년만 할 거야”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잖아요. (웃음)

선우: 대구가 제 활동의 터전이었으니까요. 가족은 대구에 있어서 주말에나 만나러 내려가야 했어요. 서울 생활도 낯설고, 집을 구하는 문제부터 시작해 어려움이 많았어요. 4.16연대가 정상화되면 바로 내려가겠다는 마음이 저에겐 일종의 도피처였어요. ‘이번 집 계약 기간만 끝나면 끝이다’라고 생각하면 견딜만했거든요. 그런데 어느 순간에 보면, 또 집을 구하고 있는 거예요. (웃음) 그렇게 한해 한해 보내다 보니 벌써 7년째네요.

희정: 4. 16연대 사무처장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자리인가요?

선우: 정치인이나 타 단체를 만날 때 이 자리가 가진 힘을 실감해요. 가족들이 사회를 변화시켜 온 그 거대한 노력을 제가 사무처장이라는 명함으로 대신 받고 있다는 무게감이 크죠. 예전보다 활동 규모가 줄었지만, 그래도 여러 명의 활동가들을 관장하고 때로는 정무적인 협상을 진행하는 핵심적인 자리이죠. 그래서 이 직책이 아주 무겁게 느껴집니다. 한편으로 우리 활동가들에게는 격식 없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크죠.

경희: 처장님은 저희 청년 활동가들과 정말 수평적으로 지내려 노력하시죠. 한때 닉네임을 부르자고 해서 처장님을 '청귤'이라 부르던 시기도 있었잖아요. (웃음) 호칭이 섞여서 혼란스러웠지만, 그래도 먼저 벽을 깨주시는 모습이 좋았어요.

선우: 기존의 권위적인 조직 모습은 4.16운동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2020년 전후로 기존 조직활동을 했던 분들과는 다른 활동가들이 많이 들어왔어요. 사회 이슈나 운동이 다변화되는 흐름이 4.16운동에도 스며드는 거죠. “왜 4.16운동은 수직적이고 폐쇄적이야?”라는 활동가들의 질문에 저부터 스스로를 깨보는 노력을 해야겠다 싶었습니다.

다예: 처장님이 우리가 모르는 외부의 화살을 막아주고 계신다는 느낌을 받아요. 하지만 그게 지속가능할지 걱정도 돼요. 밖에서도 안에서도 오해받는 외로운 자리가 되지 않도록, 저희 동료들도 그 화살을 같이 막을 수 있는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가장 슬픈 숫자 '3'과 막창의 추억

순길: 김선우 처장님의 2014년 4월 16일, 그날의 기억을 꺼내본다면요?

선우: 그날 대구에서도 국정원 관련 기자회견이 있었어요. 이동 중에 속보를 들었죠. ‘전원 구조’라는 말에 점심 먹으며 안도했는데, 상황이 바뀌었잖아요. 활동가니까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그주 금요일에 20~30명이 모여 촛불을 든 게 시작이었어요. 이후 대구대책위 상황실장을 맡으면서 유가족들을 처음 뵀죠. 처음엔 정말 말 한마디 붙이기가 조심스러웠어요. 부모님들도 묵묵히 서명지만 챙겨가셨고요.

희정: 그 서먹함이 깨진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면서요?

선우: 2014년 7월이었죠. 진상규명 버스가 전국을 돌 때 3반 가족들이 밤늦게 대구에 오셨어요. 숙소를 성당에 잡고 “대구에 오셨으니 막창을 드셔야 합니다”하며 술잔을 기울였죠. 당시 입고 계시던 검은 티셔츠에 적힌 ‘3’이라는 숫자를 보며 “가장 슬픈 숫자 3이다”라는 말을 나누던 기억이 나요. 새벽 1시까지 술을 마시고, 다음 날 새벽 5시에 일어나 논공공단으로 출근하는 노동자들을 만나러 갔어요. 특별법 제정운동 당시 대구에서만 5만 명의 서명을 받았죠. 부모님들이 대구에 대해 마냥 두려운 마음만 가지시다가 ‘대구에도 우리와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구나’하고 마음을 여신 것 같아요.

경희: 활동하면서 정말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선우: 시민대회를 준비할 때 ‘과연 얼마나 모일까’ 매번 걱정하잖아요. 지난해 11주기 시민기억식도 편도 차로를 다 잡는 걸로 준비했는데. 그럴 때 사람이 적게 모이면 가족들한테도 민망하고 경찰들한테도 쪽팔리잖아요. (웃음) 그런데 시민들이 그 차로를 가득 메워주셨죠. 아, 세월호 가족들과 시민들의 힘을 믿는 게, 4.16운동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좋았어요. 행복보다는 안도감에 가까운 마음 같아요.

 0ee9c5777d663.jpg진상규명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순길: 선우 처장님이 생각하는 진상규명의 끝은 어디인가요? “끝까지 책임자 처벌”을 외치면서도 가끔은 과연 될까 하는 막막함이 제 솔직한 심정이거든요.

선우: 피해자 입장에서 진상규명은 끝이 없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100% 밝혀졌다고 해도 마음 깊은 곳에서 납득이 되는 건 또 다른 문제니까요. 하지만 저는 진상규명을 어떤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이라고 봐요. 우리가 지금 멈추지 않고 걷고 있는 이 길 자체가 진상규명이라고 생각합니다. 4.16연대의 역할은 이미 정리된 사실들을 시민들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게 돕는 정리자의 역할이 아닐까 싶어요.

순길: 가끔은 내가 어디서 멈춰야 할지, 사회가 변한 성과로 만족해야 할지 계속 스스로에게 물어요.

선우: 4.16연대가 있어서 부모님들을 자꾸 거리로 끄집어내는 건 아닌가 미안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가 없으면 피해자들 마음이 편할까 생각하면 그건 또 아니거든요. 박근혜라는 명확한 적이 있었던 시절의 방식은 이제 역할을 다했다고 봐요. 이제는 ‘해야 할 일’ 때문에 존재하는 조직이 아니라, ‘있어야 할 이유’를 계속 묻는 조직이 되어야죠. 추운 겨울의 외투처럼, 가족들을 따뜻하게 둘러쌀 수 있는 존재. 그게 4.16연대가 존재해야 할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아빠 김선우, 그리고 함께 걷고 싶은 사람들 

경희: 개인적인 질문인데, 5월에 입대하는 아드님이 있으시다고요. 서울에 계시느라 자주 못 보셨을 텐데 어떤 아빠인가요?

선우: 아들이 중2 때 서울로 올라왔어요. 가장 예민할 시기에 옆에 못 있어 줘서 미안함이 크죠. 주말에 내려가도 살갑게 대화하기보다는 맛있는 거 같이 해 먹는 정도예요. 아빠가 무슨 일을 하는지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다행이죠. 미안해서 잔소리조차 못 하는 아빠지만, 그래도 아빠가 좋은 활동을 하고 있다는 믿음을 주고 싶어요.

다예: 앞으로 4.16연대는 어떤 사람들과 함께 걷고 싶으신가요?

선우: 후원회원 탈퇴 사유를 보면 “이제 어느 정도 해결된 것 같아서”라는 답변이 꽤 있어요. 마음이 아프죠. 4.16연대가 40~50대 비중이 높은데, 더 유연한 조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회원이 늘어나는 건 단순히 운영비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들 곁에 이웃을 한 명 두 명 더 늘려나가는 과정이거든요. 세월호 가족들의 이웃이 되어주세요. 그게 저의 가장 큰 바람입니다.

 

“대구에서 올라온 김선우입니다”라는 소박한 자기소개가 4.16연대의 중심을 잡는 묵직한 이정표가 되었다. 2019년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으로 시작해 조직의 풍파를 온몸으로 막아냈던 그는, 이제 스스로를 드러내기보다 가족과 활동가들이 기댈 수 있는 유연한 공간을 만드는 데 더욱 애쓴다. 가장 슬픈 숫자였던 ‘3’을 나누며 술잔을 기울이던 기억을 품고, 여전히 광장을 메우는 시민들의 발걸음을 믿으며 묵묵히 걷는 이. 추운 겨울의 외투처럼 가장 낮은 곳에서 온기를 전해온 김선우 사무처장의 목소리를 통해 ‘있어야 할 이유’를 계속 질문할 4.16연대의 앞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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