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참사를 만나다]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의 이야기
동규가 간 곳은 누구나 다니는 거리, 해마다 있는 축제였을 뿐이에요
기록/ 유해정(인권기록센터 사이 기록활동가)
10.29 이태원 참사는 수많은 사람이 평범하게 걸어 다니는 서울 번화가에서 일어난 대규모 압사 참사라는 점에서 특히 큰 충격을 주었다. 참사 당일 오후 6시 34분부터 참사 직전까지 모두 11건의 112신고가 접수됐으나 경찰은 적절한 대응을 하지 않았다. 참사가 일어난 이후의 대응 역시 참사였다. 윤석열 정부는 일방적으로 7일간의 국가 애도기간을 선포하면서 영정과 위패가 없는 분향소를 차리고 ‘사고’, ‘사망자’라는 표현으로 참사의 국가책임을 축소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이에 유가족들은 지난해 12월 10일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를 결성하고 12월 14일 영정과 위패를 모신 시민분향소를 이태원 녹사평역에 설치했다. 경찰청 특별수사본부와 국정조사 특별위원회가 꼬리자르기와 반쪽짜리로 끝나면서, 유가족들은 투쟁 끝에 참사 100일 시민분향소를 서울시청 앞으로 옮겼다. 윤석열 대통령의 사과,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파면, 독립적인 진상조사기구를 통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면 시민들의 서명을 받고 있다.
사월십육일의약속은 10·29 이태원 참사로 세상을 떠난 17살 고등학생 김동규 군의 어머니 안영선 님의 이야기를 전한다.
동규가 제 눈에는 보여요. 집에서 물을 마시는 모습이, 침대에 누워서 휴대폰을 보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어느 날은 “엄마 나 이제 학원 가”라고 하면서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와요. 그러다 학교 끝나고 교복 입은 아이들이 지나가는데 동규만 안 오는 거예요.
이제 동규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구나. 내가 죽는 그 순간까지 사진 속에 있는 동규 모습 밖에 나는 기억을 못 하겠구나. 동규의 성장한 모습을 꿈에서라도 그려볼 수조차 없구나…
유가족들이 서로를 모았어요
동규 보내고 얼마 안 돼서 봉안당에 갔는데 메모가 붙어 있었어요. 내가 이태원 참사 유가족인데 혹시 연락해주실 수 있으면 연락해달라. 처음에는 기자라고 생각했어요. 동규가 거기 있는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거든요. 당황하고 화가 났어요. 연락을 안 하려다가 따져야겠다 싶어 전화했더니 정말 유가족이더라고요. 그 봉안당에 동규까지 세 분이 계신대요. 가봤더니 정말이었어요.
그분이 무작정 봉안당을 지키셨대요. 혹시나 유가족이 올까봐. 10월 29일하고 30일로 사망일이 적혀 있는 아이들이 희생자일지도 모르니까. 정부가 저희들이 모이는 걸 원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유가족들끼리 서로를 모으면서 유가족대책위가 시작된 거예요.
그분이 그러셨어요. 혼자서만 힘들고 괴로워하지 마시고 같이 모여서 아픔도 나누고 일도 함께 해결해보자고. 많이 망설였어요. 내 아픔도 감당이 안 되는데 다른 유가족들의 아픔을 내가 보고 견뎌야 한다니. 그 무게감이 너무 컸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 혼자서는 못 하지만 유가족이 모이면 뭐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굳이 긴 설명 안 해도 내 아픔을 알아줄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보면 조금의 위안을 받지 않을까. 친한 친구들의 말도 위로가 되지는 않더라고요. 어느 순간부터는 친구들 전화도 피하게 되고 만나자는 약속도 계속 거절했어요.
저희 엄마가 그러시더라고요. 네가 동규를 위해서 뭐라도 할 수 있을 때 해라. 그래야 후회도 없다. 그래야 덜 아프다. 그래서 유가족들을 만나게 됐는데, 내가 울면 말없이 그냥 어깨만 좀 토닥여주고 한 번 안아줄 뿐인데 그 손길 한 번이 위로가 되더라고요.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으니까. 서로서로 밥을 챙기니까 안 넘어가던 밥도 한 숟갈이라도 먹어지고. 그래서 지금은 분향소에 오면 마음이 편해요. 같이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참 많이 위로돼요.
자식이 철드는 게 아프네요
동규 동생은 처음에 제가 언론에 자꾸 비치는 걸 싫어했어요. 그래서 저는 항상 뒤에 숨었어요. 아이가 어리고 사춘기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묻더라고요. “엄마, 엄마가 그렇게 하는 게 형 일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돼?” “엄마가 지금 이걸 해야 나중에 너를 봤을 때도, 형을 만났을 때도 떳떳할 거 같아”라고 얘기했더니 “그럼 엄마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러더라고요.
얼마 전에 물어봤어요. “엄마가 TV나 신문에 나오면 형 얼굴을 아는 친구들이 많아서 신경 쓰이니까 말린 거야?” 그랬더니 자기는 그런 건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는대요. 단지 엄마가 식당을 하니까 손님들이 엄마를 힘들게 할까 봐 그랬다고. 근데 엄마가 괜찮다니까 자기도 괜찮다고. 아, 저 아이는 자기가 아니라 내 걱정을 하고 있었구나…. 형이 있을 땐 마냥 어리광쟁이 막내였는데, 형을 보내고 나서는 형처럼 행동해요. 그게 참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자식이 철이 드는 게 좋아야 되는데….
모든 게 다 추정, 추정, 추정…
우리 동규가 그날 왜 못 돌아왔을까요? 지금도 이해가 안 돼요. 아직 아이 사망 신고도 못 했어요. 아이의 마지막 말도 듣지 못하고 마지막 모습도 보질 못했어요. 부모로서 자식이 이 세상에서 보낸 마지막 시간을 알고 싶은데 모든 게 다 추정, 추정, 추정뿐이에요.
소방일지를 받았는데, 동규에게 온기가 남아 있었고 미세하게 맥이 있어서 제세동기를 사용했대요. 그런데도 사망 시각이 10시 15분. 추정이에요. 나랑 그날 밤 9시 50분까지 카톡도 했는데. 사고가 10시 넘어 발생했다고 하고, 제세동기까지 사용했으면 10시 15분 사망이라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데. 정확한 시간과 위치는 아니더라도, 정부가 갖고 있고 모을 수 있는 정보라도 모아서 최대한 사실에 가깝도록 확인해주길 바랐던 건데. 그 정도의 노력도 없으니 정부가 하는 말을 믿을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 아이 마지막 행적이라도 찾고 싶어서 날이면 날마다 인터넷을 뒤지다 동규 사진을 발견했어요. 그 많은 아이들과 함께 노란색 타올을 덥고 이태원 바닥 쓰레기더미 옆에 대자로 뻗어서 누워있는 사진. 그걸 봤을 때는 뭐라고 말로 표현이 안 되더라고요. 길바닥에 그렇게 누워있도록 누군가는 우리 동규를 옮겼을 거잖아요. 혹시라도 거기 있던 사람이 들고 있던 카메라나 경찰 바디캠에 찍혔을 수도 있으니까, 알아봐달라는 거예요.
당일 현장에 있었던 소방공무원을 만났는데 그분이 밤 11시 50분에서 12시 사이에 현장에 도착했대요. 사고가 나고 한 시간이 지났을 때인데도, 성인 남자 허리 높이만큼 사람들이 쓰러져있었대요. 새벽 4시까지 현장에 정말 사람 머리밖에 안 보일 정도로 사람이 많았대요. 길이 막혀서 구급차에 태워놓고도 45분 동안 출발을 못 했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그건 제대로 통제가 안 됐다는 얘기인 거잖아요? 이 사고가 저 먼바다에서, 어디 높이 날던 비행기에서 난 사고가 아니잖아요? 끝과 끝이 아주 짧은 골목, 누구나 다니는 도시 한 가운데 길거리에서 난 사고잖아요? 그런데 왜 그렇게밖에 대처를 못 했는지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여름이 되면 물놀이 가고 가을이 되면 단풍놀이 가고 다들 그렇게 다니잖아요? 그거랑 똑같이 그 나이 때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문화를 즐기러 이태원에 간 것뿐이에요. 그날 하루만 사람들이 모인 게 아니라 해마다 있는 축제였고 그동안 문제가 없었잖아요? 놀러 간 게 문제라면 아무것도 하지 말고 집에만 있어야 하나요? 그렇지도 않잖아요? 거기가 그렇게 사람 죽는 곳인 줄 알았으면 어느 부모가 아이에게 “잘 갔다와” 그러겠어요. 거기는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이 다니는 길이었고, 누구나 다니는 골목이었어요. 그런 곳에서 아이들이 죽은 거예요.
우리는 피해자지 가해자가 아니에요
이 많은 사람이 참사를 당했는데, 우리 아이들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우리 아이들은 얼굴도 내비칠 수가 없고 이름조차도 내보일 수가 없는 걸까. 이해가 안 됐어요. 그래서 녹사평역에 우리가 분향소를 차렸지만 임시라고 생각했어요. 정부가 제대로 된 분향소를 해줄 줄 알았죠. 하지만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서울시에서 제안한 곳들은 어느 한 곳도 저희 아이들 사진을 갖다 놓을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어요. (서울시가 제시한 3곳은 모두 접근성이 떨어지거나 임대료가 비싼 상업용 건물이었다) 그런데 정부와 언론은 유가족이 거절했다는 말만 하니까 사람들은 저희한테 그러는 거예요. 도대체 원하는 게 뭐냐? 얼마나 으리으리한 데를 원하냐?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냐…
녹사평역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 아니라 분향소가 있는지 모르시는 분도 많았어요. 우리는 상처를 입고 너무 아픈데 ‘신자유연대’라는 사람들이 와서 안 들어도 될 말들까지 해대니까 너무 힘들었어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참사 100일을 기점으로 서울 시청으로 분향소를 옮겼어요. 처음에는 광화문으로 가려고 했었는데 서울시와 정부가 전날부터 차벽을 치고 경찰을 배치해서 막다 보니 결국 서울시청 앞으로 가게 됐어요.
기자들을 만나면 저희는 알려야 되겠다는 생각에 아픈 얘기를 꺼내서 말하는 건데 아, 참 교묘하게 기사들을 내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제대로 전달이 안 되니까 저희에게 함부로 말씀하시는 분들도 많아요. 시민들에게 정확한 사실을 전하고 싶었어요. 시청 앞 분향소에서 많은 분들을 만나고 있어요.
저희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물러날 뜻이 없어요. 서울시와 정부가 영정도 위패도 없이 엉터리로 했던 분향소를 이제 제대로 차린 거잖아요. 그런데 서울시에서는 계고장을 보내 강제 철거를 하겠다고 협박을 해요. 분향소에도, 유가족 대기실로 만든 천막에도 전기가 없어요. 추위를 막으려면 비싼 기름을 써야 해요. 그마저도 아껴야 해서 웬만하면 잘 켜지 않아요. 분향소도 급하게 만들다 보니 엉성해요. 어제오늘은 바람이 너무 많이 불다 보니까 계속 휘청휘청하고 아이들 영정 사진이 떨어지기도 했어요.
대통령은 사과조차 하지 않아요. 저희 유가족한테는 눈을 감고 귀와 입도 닫으셨죠. 왜 우리가 이런 대우를 받아야 되는지 모르겠어요. 저희는 피해자지 가해자가 아니에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너무 힘들어요. 화가 나요. 이 가슴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품고 살고 있어요.
매일 철거를 하네 마네 하는 소리에 마음 졸이지 않고 편하게 아이들을 보러 오고 싶어요. 추모해 주러 오시는 분들한테 진짜 위로도 받고 싶어요. 시민들께서 이 아이들을 기억해주시면 좋겠어요. 우리가 마지막 희생자인 사회가 되도록 시민들께 도움도 받고 싶어요. 그런데 강제 철거를 하겠다고 하니 매일이 불안해요. 그런 사태가 벌어진다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되죠?
매일 10월 29일로 되돌아가요
분향소에 와서 이렇게 움직일 때는 지치는 줄도 몰라요. 내 아이 일인데, 내가 아이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이거밖에 없으니까 힘든 줄도 몰라요. 근데 집에 가면 그 공허함을 견디기가 참 힘들어요. 아, 내가 오늘도 뭔가를 하긴 했나? 뭐가 바뀌긴 바뀌었나… 밤만 되면 나는 또 10월 29일로 돌아가는 거예요.
얼마 전부터는 문득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우리 동규를 떠나보낸 게 어제 일 같은데 벌써 4개월이 다 되었네. 이러다 1년도 금방 갈 텐데, 그 순간에도 이룬 게 아무것도 없고 그때까지도 내가 살아있으면 어떻게 하지?
아이를 보냈는데 내가 살아있다는 게 이해도 안 되고, 살겠다고 밥을 먹는 나 자신에게 치가 떨려요. 우리 아이는 살고 싶었던, 하지만 살 수 없는 오늘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지만, 또 아침에 눈을 뜨면 아무 의미 없는 하루가 시작되는 거예요. 그게 매일 반복돼요. 시간이 빨리 지나면 내가 우리 아이를 만나러 가는 시간이 그만큼 빨라지는 거겠지 그 생각만 들고. 그렇다고 나쁜 마음을 먹을 수도 없어요. 살아있는 동규 동생, 그 아이까지 놓치면 안 되니까…
내가 우리 동규를 17년을 키웠으니까, 우리 동규 키우던 날들을 생각하며 지내다 보면 17년은 살아질까요? 날이 좋으면 우리 아이 때문에 날이 좋은 거고, 뭔가 좋은 일이 있으면 우리 아이 때문에 좋은 일이 있는 거고, 웃을 일이 있으면 우리 아이 때문에 내가 이렇게 웃는구나 싶은 날이 나한테 올까요? 언제쯤이면 그렇게 될까요? 모르겠어요, 정말 모르겠어요.
[다른 참사를 만나다]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의 이야기
동규가 간 곳은 누구나 다니는 거리, 해마다 있는 축제였을 뿐이에요
기록/ 유해정(인권기록센터 사이 기록활동가)
10.29 이태원 참사는 수많은 사람이 평범하게 걸어 다니는 서울 번화가에서 일어난 대규모 압사 참사라는 점에서 특히 큰 충격을 주었다. 참사 당일 오후 6시 34분부터 참사 직전까지 모두 11건의 112신고가 접수됐으나 경찰은 적절한 대응을 하지 않았다. 참사가 일어난 이후의 대응 역시 참사였다. 윤석열 정부는 일방적으로 7일간의 국가 애도기간을 선포하면서 영정과 위패가 없는 분향소를 차리고 ‘사고’, ‘사망자’라는 표현으로 참사의 국가책임을 축소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이에 유가족들은 지난해 12월 10일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를 결성하고 12월 14일 영정과 위패를 모신 시민분향소를 이태원 녹사평역에 설치했다. 경찰청 특별수사본부와 국정조사 특별위원회가 꼬리자르기와 반쪽짜리로 끝나면서, 유가족들은 투쟁 끝에 참사 100일 시민분향소를 서울시청 앞으로 옮겼다. 윤석열 대통령의 사과,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파면, 독립적인 진상조사기구를 통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면 시민들의 서명을 받고 있다.
사월십육일의약속은 10·29 이태원 참사로 세상을 떠난 17살 고등학생 김동규 군의 어머니 안영선 님의 이야기를 전한다.
동규가 제 눈에는 보여요. 집에서 물을 마시는 모습이, 침대에 누워서 휴대폰을 보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어느 날은 “엄마 나 이제 학원 가”라고 하면서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와요. 그러다 학교 끝나고 교복 입은 아이들이 지나가는데 동규만 안 오는 거예요.
이제 동규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구나. 내가 죽는 그 순간까지 사진 속에 있는 동규 모습 밖에 나는 기억을 못 하겠구나. 동규의 성장한 모습을 꿈에서라도 그려볼 수조차 없구나…
유가족들이 서로를 모았어요
동규 보내고 얼마 안 돼서 봉안당에 갔는데 메모가 붙어 있었어요. 내가 이태원 참사 유가족인데 혹시 연락해주실 수 있으면 연락해달라. 처음에는 기자라고 생각했어요. 동규가 거기 있는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거든요. 당황하고 화가 났어요. 연락을 안 하려다가 따져야겠다 싶어 전화했더니 정말 유가족이더라고요. 그 봉안당에 동규까지 세 분이 계신대요. 가봤더니 정말이었어요.
그분이 무작정 봉안당을 지키셨대요. 혹시나 유가족이 올까봐. 10월 29일하고 30일로 사망일이 적혀 있는 아이들이 희생자일지도 모르니까. 정부가 저희들이 모이는 걸 원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유가족들끼리 서로를 모으면서 유가족대책위가 시작된 거예요.
그분이 그러셨어요. 혼자서만 힘들고 괴로워하지 마시고 같이 모여서 아픔도 나누고 일도 함께 해결해보자고. 많이 망설였어요. 내 아픔도 감당이 안 되는데 다른 유가족들의 아픔을 내가 보고 견뎌야 한다니. 그 무게감이 너무 컸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 혼자서는 못 하지만 유가족이 모이면 뭐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굳이 긴 설명 안 해도 내 아픔을 알아줄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보면 조금의 위안을 받지 않을까. 친한 친구들의 말도 위로가 되지는 않더라고요. 어느 순간부터는 친구들 전화도 피하게 되고 만나자는 약속도 계속 거절했어요.
저희 엄마가 그러시더라고요. 네가 동규를 위해서 뭐라도 할 수 있을 때 해라. 그래야 후회도 없다. 그래야 덜 아프다. 그래서 유가족들을 만나게 됐는데, 내가 울면 말없이 그냥 어깨만 좀 토닥여주고 한 번 안아줄 뿐인데 그 손길 한 번이 위로가 되더라고요.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으니까. 서로서로 밥을 챙기니까 안 넘어가던 밥도 한 숟갈이라도 먹어지고. 그래서 지금은 분향소에 오면 마음이 편해요. 같이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참 많이 위로돼요.
자식이 철드는 게 아프네요
동규 동생은 처음에 제가 언론에 자꾸 비치는 걸 싫어했어요. 그래서 저는 항상 뒤에 숨었어요. 아이가 어리고 사춘기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묻더라고요. “엄마, 엄마가 그렇게 하는 게 형 일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돼?” “엄마가 지금 이걸 해야 나중에 너를 봤을 때도, 형을 만났을 때도 떳떳할 거 같아”라고 얘기했더니 “그럼 엄마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러더라고요.
얼마 전에 물어봤어요. “엄마가 TV나 신문에 나오면 형 얼굴을 아는 친구들이 많아서 신경 쓰이니까 말린 거야?” 그랬더니 자기는 그런 건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는대요. 단지 엄마가 식당을 하니까 손님들이 엄마를 힘들게 할까 봐 그랬다고. 근데 엄마가 괜찮다니까 자기도 괜찮다고. 아, 저 아이는 자기가 아니라 내 걱정을 하고 있었구나…. 형이 있을 땐 마냥 어리광쟁이 막내였는데, 형을 보내고 나서는 형처럼 행동해요. 그게 참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자식이 철이 드는 게 좋아야 되는데….
모든 게 다 추정, 추정, 추정…
우리 동규가 그날 왜 못 돌아왔을까요? 지금도 이해가 안 돼요. 아직 아이 사망 신고도 못 했어요. 아이의 마지막 말도 듣지 못하고 마지막 모습도 보질 못했어요. 부모로서 자식이 이 세상에서 보낸 마지막 시간을 알고 싶은데 모든 게 다 추정, 추정, 추정뿐이에요.
소방일지를 받았는데, 동규에게 온기가 남아 있었고 미세하게 맥이 있어서 제세동기를 사용했대요. 그런데도 사망 시각이 10시 15분. 추정이에요. 나랑 그날 밤 9시 50분까지 카톡도 했는데. 사고가 10시 넘어 발생했다고 하고, 제세동기까지 사용했으면 10시 15분 사망이라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데. 정확한 시간과 위치는 아니더라도, 정부가 갖고 있고 모을 수 있는 정보라도 모아서 최대한 사실에 가깝도록 확인해주길 바랐던 건데. 그 정도의 노력도 없으니 정부가 하는 말을 믿을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 아이 마지막 행적이라도 찾고 싶어서 날이면 날마다 인터넷을 뒤지다 동규 사진을 발견했어요. 그 많은 아이들과 함께 노란색 타올을 덥고 이태원 바닥 쓰레기더미 옆에 대자로 뻗어서 누워있는 사진. 그걸 봤을 때는 뭐라고 말로 표현이 안 되더라고요. 길바닥에 그렇게 누워있도록 누군가는 우리 동규를 옮겼을 거잖아요. 혹시라도 거기 있던 사람이 들고 있던 카메라나 경찰 바디캠에 찍혔을 수도 있으니까, 알아봐달라는 거예요.
당일 현장에 있었던 소방공무원을 만났는데 그분이 밤 11시 50분에서 12시 사이에 현장에 도착했대요. 사고가 나고 한 시간이 지났을 때인데도, 성인 남자 허리 높이만큼 사람들이 쓰러져있었대요. 새벽 4시까지 현장에 정말 사람 머리밖에 안 보일 정도로 사람이 많았대요. 길이 막혀서 구급차에 태워놓고도 45분 동안 출발을 못 했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그건 제대로 통제가 안 됐다는 얘기인 거잖아요? 이 사고가 저 먼바다에서, 어디 높이 날던 비행기에서 난 사고가 아니잖아요? 끝과 끝이 아주 짧은 골목, 누구나 다니는 도시 한 가운데 길거리에서 난 사고잖아요? 그런데 왜 그렇게밖에 대처를 못 했는지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여름이 되면 물놀이 가고 가을이 되면 단풍놀이 가고 다들 그렇게 다니잖아요? 그거랑 똑같이 그 나이 때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문화를 즐기러 이태원에 간 것뿐이에요. 그날 하루만 사람들이 모인 게 아니라 해마다 있는 축제였고 그동안 문제가 없었잖아요? 놀러 간 게 문제라면 아무것도 하지 말고 집에만 있어야 하나요? 그렇지도 않잖아요? 거기가 그렇게 사람 죽는 곳인 줄 알았으면 어느 부모가 아이에게 “잘 갔다와” 그러겠어요. 거기는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이 다니는 길이었고, 누구나 다니는 골목이었어요. 그런 곳에서 아이들이 죽은 거예요.
우리는 피해자지 가해자가 아니에요
이 많은 사람이 참사를 당했는데, 우리 아이들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우리 아이들은 얼굴도 내비칠 수가 없고 이름조차도 내보일 수가 없는 걸까. 이해가 안 됐어요. 그래서 녹사평역에 우리가 분향소를 차렸지만 임시라고 생각했어요. 정부가 제대로 된 분향소를 해줄 줄 알았죠. 하지만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서울시에서 제안한 곳들은 어느 한 곳도 저희 아이들 사진을 갖다 놓을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어요. (서울시가 제시한 3곳은 모두 접근성이 떨어지거나 임대료가 비싼 상업용 건물이었다) 그런데 정부와 언론은 유가족이 거절했다는 말만 하니까 사람들은 저희한테 그러는 거예요. 도대체 원하는 게 뭐냐? 얼마나 으리으리한 데를 원하냐?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냐…
녹사평역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 아니라 분향소가 있는지 모르시는 분도 많았어요. 우리는 상처를 입고 너무 아픈데 ‘신자유연대’라는 사람들이 와서 안 들어도 될 말들까지 해대니까 너무 힘들었어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참사 100일을 기점으로 서울 시청으로 분향소를 옮겼어요. 처음에는 광화문으로 가려고 했었는데 서울시와 정부가 전날부터 차벽을 치고 경찰을 배치해서 막다 보니 결국 서울시청 앞으로 가게 됐어요.
기자들을 만나면 저희는 알려야 되겠다는 생각에 아픈 얘기를 꺼내서 말하는 건데 아, 참 교묘하게 기사들을 내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제대로 전달이 안 되니까 저희에게 함부로 말씀하시는 분들도 많아요. 시민들에게 정확한 사실을 전하고 싶었어요. 시청 앞 분향소에서 많은 분들을 만나고 있어요.
저희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물러날 뜻이 없어요. 서울시와 정부가 영정도 위패도 없이 엉터리로 했던 분향소를 이제 제대로 차린 거잖아요. 그런데 서울시에서는 계고장을 보내 강제 철거를 하겠다고 협박을 해요. 분향소에도, 유가족 대기실로 만든 천막에도 전기가 없어요. 추위를 막으려면 비싼 기름을 써야 해요. 그마저도 아껴야 해서 웬만하면 잘 켜지 않아요. 분향소도 급하게 만들다 보니 엉성해요. 어제오늘은 바람이 너무 많이 불다 보니까 계속 휘청휘청하고 아이들 영정 사진이 떨어지기도 했어요.
대통령은 사과조차 하지 않아요. 저희 유가족한테는 눈을 감고 귀와 입도 닫으셨죠. 왜 우리가 이런 대우를 받아야 되는지 모르겠어요. 저희는 피해자지 가해자가 아니에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너무 힘들어요. 화가 나요. 이 가슴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품고 살고 있어요.
매일 철거를 하네 마네 하는 소리에 마음 졸이지 않고 편하게 아이들을 보러 오고 싶어요. 추모해 주러 오시는 분들한테 진짜 위로도 받고 싶어요. 시민들께서 이 아이들을 기억해주시면 좋겠어요. 우리가 마지막 희생자인 사회가 되도록 시민들께 도움도 받고 싶어요. 그런데 강제 철거를 하겠다고 하니 매일이 불안해요. 그런 사태가 벌어진다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되죠?
매일 10월 29일로 되돌아가요
분향소에 와서 이렇게 움직일 때는 지치는 줄도 몰라요. 내 아이 일인데, 내가 아이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이거밖에 없으니까 힘든 줄도 몰라요. 근데 집에 가면 그 공허함을 견디기가 참 힘들어요. 아, 내가 오늘도 뭔가를 하긴 했나? 뭐가 바뀌긴 바뀌었나… 밤만 되면 나는 또 10월 29일로 돌아가는 거예요.
얼마 전부터는 문득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우리 동규를 떠나보낸 게 어제 일 같은데 벌써 4개월이 다 되었네. 이러다 1년도 금방 갈 텐데, 그 순간에도 이룬 게 아무것도 없고 그때까지도 내가 살아있으면 어떻게 하지?
아이를 보냈는데 내가 살아있다는 게 이해도 안 되고, 살겠다고 밥을 먹는 나 자신에게 치가 떨려요. 우리 아이는 살고 싶었던, 하지만 살 수 없는 오늘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지만, 또 아침에 눈을 뜨면 아무 의미 없는 하루가 시작되는 거예요. 그게 매일 반복돼요. 시간이 빨리 지나면 내가 우리 아이를 만나러 가는 시간이 그만큼 빨라지는 거겠지 그 생각만 들고. 그렇다고 나쁜 마음을 먹을 수도 없어요. 살아있는 동규 동생, 그 아이까지 놓치면 안 되니까…
내가 우리 동규를 17년을 키웠으니까, 우리 동규 키우던 날들을 생각하며 지내다 보면 17년은 살아질까요? 날이 좋으면 우리 아이 때문에 날이 좋은 거고, 뭔가 좋은 일이 있으면 우리 아이 때문에 좋은 일이 있는 거고, 웃을 일이 있으면 우리 아이 때문에 내가 이렇게 웃는구나 싶은 날이 나한테 올까요? 언제쯤이면 그렇게 될까요? 모르겠어요, 정말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