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규명][소식지] 국정원의 비밀창고에 갇힌 피해자의 존엄을 구출하라

[진상규명]

국정원의 비밀창고에 갇힌 피해자의 존엄을 구출하라

국정원 불법사찰 정보공개청구

현슬기(4.16연대 사무처 활동가)


수화기를 들기 전 잠시 숨을 고른다. 익숙해질 법도 한데 피해자들에게 전화를 거는 일은 여전히 긴장된다. 특히 10년도 더 된, 국가가 저지른 은밀한 폭력의 기록을 들추어내는 전화일 때는 더욱 그렇다.

“다름이 아니라, 지난번 함께해주신 국정원 불법사찰 정보공개청구에 이어….”

준비된 스크립트를 읽어 내려간다. 이 스크립트를 작성하기 위해 내가 마주했던 문서들은 하나같이 기이했다.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가 하얗게 지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그곳에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존재 자체를 도려낸 공백. 국가는 이른바 ‘백칠(白漆)’로 피해자의 삶을 완벽하게 덮어버렸다.


'국가 안보'라는 이름의 졸렬한 감시

고백하자면 나도 한때는 정보기관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있었다. 드라마 <아이리스>나 <개와 늑대의 시간> 속 요원들은 언제나 비장하고 멋있지 않은가. 국가 안보를 위해 음지에서 헌신하며 거대 악과 싸우는 고독한 영웅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동경심을 품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이후 마주한 그들의 민낯은 환상을 산산조각 냈다.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 조사 결과 드러난 국정원 메인 서버 속 ‘세월호’ 관련 문건은 무려 68만 건. 그 방대한 데이터 속에 담긴 현실은 첩보 영화가 아니라, 졸렬하기 짝이 없는 삼류 블랙 코미디였다.

소위 고독한 영웅들이 국가의 이름으로 숨어서 한 짓을 보라. 그들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자식 잃은 부모를 쫓았다. 참사가 ‘정부 책임론’으로 비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유가족의 신원, 정치 성향, 범죄 이력은 물론 내밀한 사생활까지 캐내어 첩보로 작성했다. 보수 언론과 합을 맞춰 부정적 여론을 조성하고, ‘배후 세력 차단’이라는 명목으로 시민단체의 동향을 수집했다. 영화 속 요원들은 악당과 싸우지만, 현실의 요원들은 울고 있는 피해 가족들을 고립시키기 위해 분투했다.

비단 국정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드라마 <태양의 후예> 속 군인들은 죽음 앞에서도 신념을 지켰지만, 현실의 군인들은 오로지 권력만을 수호했다. 당시 기무사는 ‘정보융합실’이라는 거창한 부서를 만들어 유가족 갈라치기에 나섰다. 그들은 “돈을 더 줄 테니 떨어져 나가라”는 식의 ‘배·보상 신청 유도’ 보고서를 써서 청와대에 올렸다.


책임자들의 초라한 뒷모습과 부활

불법 사찰 혐의로 기소된 전직 기무사 장성들은 법정에서 한없이 초라했다. 2019년 군사법원에서 사찰을 주도했던 핵심 책임자는 판결이 내려지자 “집행유예는 안 됩니까?”라며 재판부에 매달렸고, 2022년 일반법원에서 세월호 참사 당시 참모장과 정보융합실장이었던 지휘부들은 징역형 선고와 함께 법정 구속되어 나란히 끌려나갔다. 실형이라는 답에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던 그들의 뒷모습에서 국가 수호의 사명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토록 비겁한 이들은 윤석열 정부와 함께 부활했다. 기무사는 방첩사로 간판을 바꿔 달았고, 법정에서 눈물 콧물 쏟던 핵심 책임자들은 특사로 줄줄이 사면·복권되었다. 심지어 당시 유가족 성향 보고서를 썼던 실무자는 방첩사로 복귀해 12.3 비상계엄 당시 국회로 향하는 병력을 통솔하는 위치에 있었다고 한다. 10년 전 세월호 유가족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았던 그 논리 그대로, 그들은 다시금 국민을 적으로 규정하며 총구를 들이밀었다.

국가 폭력의 기록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단죄하지 못한 대가는 이토록 혹독하다. 68만 건에 달하는 사찰 문건이 여전히 그들의 비밀 창고에 잠겨 있는 한, 진실은 가려지고 가해자는 언제든 가면을 바꿔 쓰고 돌아온다.


지워진 이름을 되찾는 행정 소송

2024년 2월, 사찰 피해자 중 49명은 큰 용기를 내어 국정원에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국정원 서버에 68만 건의 관련 문건이 있다는 사실이 이미 세상에 드러난 후였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황당했다. “정보 부존재(없음)”. 명백히 존재하는 기록을 두고 ‘없다’고 잡아떼는 기만이었다. 우리는 즉각 이의신청을 하고 행정심판까지 청구했지만, 행정심판위원회는 “정보가 없다는 답변에 대해서는 이의신청을 할 수 없다”는 궤변으로 청구를 기각했다. 피해자가 “내 기록을 내놓으라” 외치는데, 가해자는 “없다” 거짓말하고, 심판관은 “없다는데 왜 따지냐”며 입을 막은 꼴이다.

그래서 우리는 국정원이 내미는 ‘하얀 종이’에 불복해 현재 정보공개 거부 처분 취소 소송을 진행 중이다. 안보라는 핑계로 덧칠한 페인트를 법의 힘으로 벗겨내서라도 그 아래 숨겨진 진실을 낱낱이 확인하겠다는 의지다. 지난 2월 4일 진행한 추가 정보공개청구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이름조차 지워버린 비식별 문건을 내놓은 국정원에 대항해 실명이 확인되는 진짜 기록을 요구한 것이다. 우리는 이 싸움을 통해 국가 범죄를 은폐된 기록이 아닌 공식적인 역사로 확정 지을 것이다.

이제는 국정원이 먼저 피해자의 이름을 검색해 “우리가 당신을 사찰했습니다”라고 선제적으로 통지하도록 법을 바꿔내야 한다. 또한 이 68만 건의 불법 사찰 기록을 멋대로 폐기하지 못하도록 공공기록물로 이관하여 영구히 역사의 법정에 세워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삼류 코미디 같은 국가 폭력의 고리를 끊어내는 일이다.


수화기 너머에서 찾은 존엄의 증거

“관련 자료에서 선생님으로 추정되는 문건이 있어 연락드렸습니다. 동의해주신다면 저희가 대신 싸우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 위에 감시당했다는 공포, 가해자의 부활을 지켜보는 분노까지 더해진 그 기억을 다시 꺼내는 건 잔인한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잠시의 고민도 없이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나를 울린다.

“고생이 많아요. 당연히 해야죠. 내가 죄지은 것도 아닌데 왜 내 이름을 숨깁니까.”

하얀 공백을 채우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수화기 너머에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시 전화를 건다. 국정원의 비밀 창고 속에 갇힌 이름을 꺼내어 그들에게 온당한 존엄을 돌려주기 위해서다.

당신의 이름은 결코 지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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