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과 프랑스, ‘재난의 진실 규명은 공동체의 의무’
재난 피해자 권리의 선진사례를 돌아보다
채은(4.16연대 활동가)

2024년 9월, 재난 피해자 권리에 관한 선진사례를 발굴하고, 사회적 기억 조성 체계를 모색하기 위해 재난피해자권리센터가 진행한 해외 연수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참사 피해자를 만나고 관계 기관을 방문하면서 한국 사회에서일어난 참사들의 어떤 단면을 발견하기도 했고, 희망의 한 조각을 발견하기도 했다. 기억 문화, 진상조사 체계, 정보 공개 제도, 지속적인 조사 시도 등 「사월십육일의약속」을 통해 나누고 싶은 지점들을 정리해 보았다.
아무리 긴 세월이 흐르더라도
영국은 피해자와 시민의 힘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참사의 진실을 밝힌 경험이 있다. 한국에도 재난 조사의 선진사례로 소개된 힐즈버러 참사와 더비셔호 참사가 그것이다.
힐즈버러 참사는 1989년 4월 15일 영국 셰필드에 있는 힐즈버러 스타디움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경찰과 스타디움 운영진이 인파 관리를 하지 못하고, 출입구 개방을 잘못 결정하면서 압사 사고가 발생했다. 800여 명이 다치고, 97명이 희생되었다. 당시 경찰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술에 취한 축구 팬, 일명 ‘훌리건’들이 사고를 유발했다고 허위로 보고했다. 언론도 이를 그대로 받아쓰면서 피해자들을 비난하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이후 여러 번의 걸쳐 조사가 이어졌고, 경찰의 거짓말과증거 조작 또한 밝혀졌다.
2016년 영국 법원은 최종적으로 힐스버러 참사가 경찰과 공공기관의 과실로 인한 불법적 사망이라고 판결했다. 더비셔호 참사는 1980년 9월 9일, 영국의 대형 벌크 화물선1) 더비셔호가 해상에서 태풍을 만나 침몰한 사고이다. 선원 42명과 선원의 가족 2명 등 총 44명이 목숨을 잃었다. 영국 정부는 공식 조사 없이 선박이 태풍으로 인해 자연적으로 침몰했다고 주장하며 유가족 조사 요구를 거부했다. 하지만 유가족들은 진상규명 활동을 이어왔고, 1994년 국제운송노조연합의 지원으로 사고 해역에서 심해 탐사가 진행되었다. 심해 탐사에서 발견된 선박의 잔해로 인해 1997년, 유가족들의 추가 조사 요구가 받아들여졌다. 49일간 심해 4,000미터에 위치한 잔해 조사가 이뤄졌고, 이 조사에서 선박의 결함(화물창 덮개의 취약성)이 침몰의 주요 원인으로 밝혀졌
다. 영국의 재난 피해자들은 계속해서 진상조사 기회를 만들고 시도해 왔다. 그 과정에서 추가 조사에 대한 시민들의 거부반응을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힐스버러참사나 더비셔호 참사의 경우 수십 년에 걸쳐 여러 번의 조사가 이뤄졌는데, 바탕에는 지역사회와 시민사회의 협조가 있었고, 어느 당이 집권했는지와 무관하게 정부가 나서서 조사를 진행했다. 프랑스의 재난 피해자 지원단체인 펜박(FENVAC)의 활동가들은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단 하나의 의심이 남지 않게끔 진행하며, 누군가 숨긴다고 진실이 숨겨지지 않는다고 여러 차례에 걸쳐 말했다. 반면 한국은 아직 조사 자체가 난항이다.
믿을 수 없는 수사기구, 설립부터 어려운 조사기구
한국의 경우 검찰과 경찰의 수사가 우선되지만, 검경 수사에 대한 피해자들의 신뢰도는 높지 않다. 정권의 책임으로 연결될까 봐 정권이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모습들을 여러 차례 봐왔기 때문이다. 세월호참사의 경우 참사 초기 정권의 압력으로 해경 지휘부는 기소되지도 않았다. 국회에서 진행하는 국정조사의 경우, 여야 갈등으로 결과 보고서까지 채택되는 경우가 절반을 넘지 못하고 있다. 세월호참사 국정조사는 증인 채택 단계에서 여당(당시 새누리당)의 비협조로 틀어져 청문회조차 진행되지 못했다. 독립적인 조사의 경우 주로 특별법 제정을 통해 조사기구를 만드는 형태로 이뤄지는데, 재난 참사에서는 세월호참사와 가습기살균제 참사, 이태원참사(진행중) 세참사에 대해서만 진행되었다.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는 시작부터 정부와 여당의 방해가 있었으며 결국 강제 종료되었다. 이태원참사의 경우 윤석열 대통령이 법안 공포를 거부하여 특별법이 통과되는 데에 1년 6개월이 소요되었다. 참고로 채 해병 특검법은 세 차례, 김건희 여사 특검법은 두 차례 거부권을 행사해 아직 조사하지 못하고 있다. 재난참사 외 사건에 대한 조사까지 넓히면, 특별법을 통해 조사한 사례는 5.18 민주화운동, 제주 4.3 사건 조사가 있었다.
재난참사 발생 이후 특별법을 만들어 조사기구를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렵고 지난하다. 게다가 조사기구를 통한 한 번의 조사면 모든 것이 된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지금 한국의 현주소이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나 진실화해위원회처럼 재난참사 관련 독립적이고 상설적 조사기구가 꼭 필요하다.
정보접근권, 진실 찾기의 출발점
진상규명을 둘러싼 영국의 사회적 조건이 한국과 가장 다른 점은 정보 공개에 관한것이다. 영국은 기밀 사항 등 정부 자료를 일정 기간 이후 공개하는 ‘정보자유법’이있는 나라다. 힐스버러 참사는 국가(경찰)가 나서서 사건을 은폐하거나 조작한 사례였는데, 이는 국가조직의 문제 역시 공개되어야 하고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는 외침으로 이어졌다. 힐스버러 독립 조사기구는 상원을 통해 모든 정보에 접근할 수있었으며, 힐스버러 참사의 진실을 밝히는 과정에서 정부 기록물의 비공개 기한이 30년에서 20년으로 줄었다.
영국 외에도 많은 나라들에서 정보자유법을 가지고 있다. 반면 한국은 기본적으로‘정보를 공개해야 한다’는 인식이 아예 없어 기밀 사항이 아니어도 공개되지 않는다. 공개등급·보호기간을 자체적으로 정하며, 그 기준 또한 기밀 사항이다. 이에 대해 감시하거나 재검토할 수 있는 장치조차 없다. 심지어 가장 투명하지 않은 첩보기관(국가정보원)이 비밀, 보안 관련 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기밀 재분류 심사에도 제목조차 공개하지 않는 게 대부분이며 다시 ‘비공개’ 처리되거나 바로 폐기되고 있다. 영국이 재난참사 관련 피해자와 권리옹호자의 알 권리에 대해 특별히 신경 썼다기보다는 시민들의 정보접근권에 대한 보편적 인식이 재난 참사의 진상규명에도 도움이 된 사례로 보였다.
공소시효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영국의 재난 조사 과정에서 눈여겨볼 지점 또 하나는 공소시효와 징계 시효에 구애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의 재난참사 책임자들에게는 주로 업무상과실치사상 죄가 적용된다. 공소시효는 7년이다. 진상을 규명하기 어려운 여러 조건 속에서 결코 긴 시간이 아니다. 세월호참사 직후 승객을 구하지 않은 혐의로 기소된 건 해경현장 출동 세력뿐이었다. 해경 지휘부는 검찰이 기소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공소시효를 정지하기 위해 또다시 싸워야 했다. 이후 조사위원회 조사 기간에만 잠시 공소시효를 멈췄으나 이는 세월호참사에 국한된 특수케이스이며, 그때는 이미 관련자들 간에 진술이 어느 정도 맞춰져 있었다.
공무원의 징계에 대한 시효는 국가공무원법에 따라 사건 발생 이후 3년인데, 이태원참사와 관련하여 공무원 징계 시효는 현재(2025년 2월 기준) 약 8개월밖에 남지않았다. 하지만 감사원은 정부 재난 대응 시스템 전반으로 뭉뚱그린 감사만을 진행중이고, 이태원참사 자체에 대한 직무감찰은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2017년 영국 검찰은 힐스버러 참사 관련 책임자들을 ‘직무태만에 의한 과실치사, 사후 증거 은닉 또는 거짓 증언’ 등의 이유로 기소했다. 참사가 발생한 지(1989년) 무려 28년 후다. 중범죄 이상에 대해서는 공소시효가 없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는 조사기구의 역할과도 연결된다. 수백 명이 사망한 참사에 대해 수사하고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시효의 끝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조사기구가 활동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영국처럼 공소시효가 없다면 수사와 조사를 분리해, 지금보다는 구조적 문제에 잘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시끄럽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재난 참사가 일어났던 시점과 사회적 맥락은 다르지만, 재난 참사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은 나라를 불문하고 유사했다. 영국에서도 피해자들에게 ‘피해자다움’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며, 투쟁하는 시민들과 함께 이른바 ‘트러블메이커’(시끄러운 이들)로 규정하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꿋꿋하게 긴 시간 싸워온 피해자들과 그들의 곁을 지키는 활동가들의 모습도 닮아있었다. 가장 신기하고 부러운 지점은 여러 곳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메모리얼이었다. 기억문화가 일상에 잘 자리 잡았다는 것이 느껴졌다. 세월호참사 추모시설인 4·16생명안전공원은 올해 2월 13일, 참사 10년 10개월 만에야 착공식이 진행되었다.
세월호참사는 긴 투쟁 끝에 안산 시내에 조성할 수 있었지만, 다른 참사의 경우 기억공간조차 없거나 있어도 유명무실한 경우가 많다. 4·16생명안전공원 설립을 계기로 기억문화가 혐오를 딛고 우리 사회에 잘 뿌리내리기를 바란다. 한국에서 재난조사기구 설립과 피해 지원 등을 논의할 때 영국과 프랑스의 사례를 많이 참고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두 나라도 여전히 미진한 부분이 많다. 피해자와 유가족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었고,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남아 있었다. 설령 피해자들이 만족할 만큼의 진상규명이 되어도 지속적인 감시와 활동이 필요하다는 점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이번 연수를 통해 4.16운동이 10년 동안 쌓아온 성과도 크다는 점을 다시 확인했다. 다른 참여자들이 “한국 재난피해자 운동의 국제화를 고민해야” “우리가 만들어 온 성과를 국제적으로 잘 알려 나가야”라고 언급했을 만큼 세월호참사 이후 10년은 피해자들과 시민들의 투쟁 속에서 재난참사를 우리 모두의 문제로 끊임없이 되새긴 시간이었다. 기억·추모를 둘러싼 관점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피해자 권리보장과 제도 개선의 물꼬를 텄다. 4.16운동이 만들어낸 변화가 한국 사회 전체에 자리 잡는 시스템이 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논의하고 실천해 나갈 필요가 있다. 가장 인상 깊었던 필 스크래튼 교수의 이야기를 공유하며 글을 마친다.
“법은 결코 정의가 아니다.
법은 정의를 실현하는 측면 말고도 누군가의 명성과 평판을 지키는 쪽에게 쓰이기도 한다. 테니스 경기의 공처럼 양쪽의 싸움이기도 하다. 이는 책임을 묻고자 하는 우리에게 어려운 문제이다. 진실이 있어야 책임이 있고, 진실이 있어야 정의가 있다고 보는 우리의 진실은 그들의 진실과 다르다.”
-필 스크래튼 Phil Scraton (전 힐스버러 독립 조사 패널 조사위원, 법학 교수)-
1) 곡물이나 철광석같이 컨테이너에 담을 수 없는 물건을 운송하는 배
영국과 프랑스, ‘재난의 진실 규명은 공동체의 의무’
재난 피해자 권리의 선진사례를 돌아보다
채은(4.16연대 활동가)

2024년 9월, 재난 피해자 권리에 관한 선진사례를 발굴하고, 사회적 기억 조성 체계를 모색하기 위해 재난피해자권리센터가 진행한 해외 연수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참사 피해자를 만나고 관계 기관을 방문하면서 한국 사회에서일어난 참사들의 어떤 단면을 발견하기도 했고, 희망의 한 조각을 발견하기도 했다. 기억 문화, 진상조사 체계, 정보 공개 제도, 지속적인 조사 시도 등 「사월십육일의약속」을 통해 나누고 싶은 지점들을 정리해 보았다.
아무리 긴 세월이 흐르더라도
영국은 피해자와 시민의 힘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참사의 진실을 밝힌 경험이 있다. 한국에도 재난 조사의 선진사례로 소개된 힐즈버러 참사와 더비셔호 참사가 그것이다.
힐즈버러 참사는 1989년 4월 15일 영국 셰필드에 있는 힐즈버러 스타디움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경찰과 스타디움 운영진이 인파 관리를 하지 못하고, 출입구 개방을 잘못 결정하면서 압사 사고가 발생했다. 800여 명이 다치고, 97명이 희생되었다. 당시 경찰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술에 취한 축구 팬, 일명 ‘훌리건’들이 사고를 유발했다고 허위로 보고했다. 언론도 이를 그대로 받아쓰면서 피해자들을 비난하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이후 여러 번의 걸쳐 조사가 이어졌고, 경찰의 거짓말과증거 조작 또한 밝혀졌다.
2016년 영국 법원은 최종적으로 힐스버러 참사가 경찰과 공공기관의 과실로 인한 불법적 사망이라고 판결했다. 더비셔호 참사는 1980년 9월 9일, 영국의 대형 벌크 화물선1) 더비셔호가 해상에서 태풍을 만나 침몰한 사고이다. 선원 42명과 선원의 가족 2명 등 총 44명이 목숨을 잃었다. 영국 정부는 공식 조사 없이 선박이 태풍으로 인해 자연적으로 침몰했다고 주장하며 유가족 조사 요구를 거부했다. 하지만 유가족들은 진상규명 활동을 이어왔고, 1994년 국제운송노조연합의 지원으로 사고 해역에서 심해 탐사가 진행되었다. 심해 탐사에서 발견된 선박의 잔해로 인해 1997년, 유가족들의 추가 조사 요구가 받아들여졌다. 49일간 심해 4,000미터에 위치한 잔해 조사가 이뤄졌고, 이 조사에서 선박의 결함(화물창 덮개의 취약성)이 침몰의 주요 원인으로 밝혀졌
다. 영국의 재난 피해자들은 계속해서 진상조사 기회를 만들고 시도해 왔다. 그 과정에서 추가 조사에 대한 시민들의 거부반응을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힐스버러참사나 더비셔호 참사의 경우 수십 년에 걸쳐 여러 번의 조사가 이뤄졌는데, 바탕에는 지역사회와 시민사회의 협조가 있었고, 어느 당이 집권했는지와 무관하게 정부가 나서서 조사를 진행했다. 프랑스의 재난 피해자 지원단체인 펜박(FENVAC)의 활동가들은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단 하나의 의심이 남지 않게끔 진행하며, 누군가 숨긴다고 진실이 숨겨지지 않는다고 여러 차례에 걸쳐 말했다. 반면 한국은 아직 조사 자체가 난항이다.
믿을 수 없는 수사기구, 설립부터 어려운 조사기구
한국의 경우 검찰과 경찰의 수사가 우선되지만, 검경 수사에 대한 피해자들의 신뢰도는 높지 않다. 정권의 책임으로 연결될까 봐 정권이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모습들을 여러 차례 봐왔기 때문이다. 세월호참사의 경우 참사 초기 정권의 압력으로 해경 지휘부는 기소되지도 않았다. 국회에서 진행하는 국정조사의 경우, 여야 갈등으로 결과 보고서까지 채택되는 경우가 절반을 넘지 못하고 있다. 세월호참사 국정조사는 증인 채택 단계에서 여당(당시 새누리당)의 비협조로 틀어져 청문회조차 진행되지 못했다. 독립적인 조사의 경우 주로 특별법 제정을 통해 조사기구를 만드는 형태로 이뤄지는데, 재난 참사에서는 세월호참사와 가습기살균제 참사, 이태원참사(진행중) 세참사에 대해서만 진행되었다.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는 시작부터 정부와 여당의 방해가 있었으며 결국 강제 종료되었다. 이태원참사의 경우 윤석열 대통령이 법안 공포를 거부하여 특별법이 통과되는 데에 1년 6개월이 소요되었다. 참고로 채 해병 특검법은 세 차례, 김건희 여사 특검법은 두 차례 거부권을 행사해 아직 조사하지 못하고 있다. 재난참사 외 사건에 대한 조사까지 넓히면, 특별법을 통해 조사한 사례는 5.18 민주화운동, 제주 4.3 사건 조사가 있었다.
재난참사 발생 이후 특별법을 만들어 조사기구를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렵고 지난하다. 게다가 조사기구를 통한 한 번의 조사면 모든 것이 된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지금 한국의 현주소이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나 진실화해위원회처럼 재난참사 관련 독립적이고 상설적 조사기구가 꼭 필요하다.
정보접근권, 진실 찾기의 출발점
진상규명을 둘러싼 영국의 사회적 조건이 한국과 가장 다른 점은 정보 공개에 관한것이다. 영국은 기밀 사항 등 정부 자료를 일정 기간 이후 공개하는 ‘정보자유법’이있는 나라다. 힐스버러 참사는 국가(경찰)가 나서서 사건을 은폐하거나 조작한 사례였는데, 이는 국가조직의 문제 역시 공개되어야 하고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는 외침으로 이어졌다. 힐스버러 독립 조사기구는 상원을 통해 모든 정보에 접근할 수있었으며, 힐스버러 참사의 진실을 밝히는 과정에서 정부 기록물의 비공개 기한이 30년에서 20년으로 줄었다.
영국 외에도 많은 나라들에서 정보자유법을 가지고 있다. 반면 한국은 기본적으로‘정보를 공개해야 한다’는 인식이 아예 없어 기밀 사항이 아니어도 공개되지 않는다. 공개등급·보호기간을 자체적으로 정하며, 그 기준 또한 기밀 사항이다. 이에 대해 감시하거나 재검토할 수 있는 장치조차 없다. 심지어 가장 투명하지 않은 첩보기관(국가정보원)이 비밀, 보안 관련 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기밀 재분류 심사에도 제목조차 공개하지 않는 게 대부분이며 다시 ‘비공개’ 처리되거나 바로 폐기되고 있다. 영국이 재난참사 관련 피해자와 권리옹호자의 알 권리에 대해 특별히 신경 썼다기보다는 시민들의 정보접근권에 대한 보편적 인식이 재난 참사의 진상규명에도 도움이 된 사례로 보였다.
공소시효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영국의 재난 조사 과정에서 눈여겨볼 지점 또 하나는 공소시효와 징계 시효에 구애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의 재난참사 책임자들에게는 주로 업무상과실치사상 죄가 적용된다. 공소시효는 7년이다. 진상을 규명하기 어려운 여러 조건 속에서 결코 긴 시간이 아니다. 세월호참사 직후 승객을 구하지 않은 혐의로 기소된 건 해경현장 출동 세력뿐이었다. 해경 지휘부는 검찰이 기소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공소시효를 정지하기 위해 또다시 싸워야 했다. 이후 조사위원회 조사 기간에만 잠시 공소시효를 멈췄으나 이는 세월호참사에 국한된 특수케이스이며, 그때는 이미 관련자들 간에 진술이 어느 정도 맞춰져 있었다.
공무원의 징계에 대한 시효는 국가공무원법에 따라 사건 발생 이후 3년인데, 이태원참사와 관련하여 공무원 징계 시효는 현재(2025년 2월 기준) 약 8개월밖에 남지않았다. 하지만 감사원은 정부 재난 대응 시스템 전반으로 뭉뚱그린 감사만을 진행중이고, 이태원참사 자체에 대한 직무감찰은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2017년 영국 검찰은 힐스버러 참사 관련 책임자들을 ‘직무태만에 의한 과실치사, 사후 증거 은닉 또는 거짓 증언’ 등의 이유로 기소했다. 참사가 발생한 지(1989년) 무려 28년 후다. 중범죄 이상에 대해서는 공소시효가 없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는 조사기구의 역할과도 연결된다. 수백 명이 사망한 참사에 대해 수사하고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시효의 끝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조사기구가 활동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영국처럼 공소시효가 없다면 수사와 조사를 분리해, 지금보다는 구조적 문제에 잘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시끄럽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재난 참사가 일어났던 시점과 사회적 맥락은 다르지만, 재난 참사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은 나라를 불문하고 유사했다. 영국에서도 피해자들에게 ‘피해자다움’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며, 투쟁하는 시민들과 함께 이른바 ‘트러블메이커’(시끄러운 이들)로 규정하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꿋꿋하게 긴 시간 싸워온 피해자들과 그들의 곁을 지키는 활동가들의 모습도 닮아있었다. 가장 신기하고 부러운 지점은 여러 곳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메모리얼이었다. 기억문화가 일상에 잘 자리 잡았다는 것이 느껴졌다. 세월호참사 추모시설인 4·16생명안전공원은 올해 2월 13일, 참사 10년 10개월 만에야 착공식이 진행되었다.
세월호참사는 긴 투쟁 끝에 안산 시내에 조성할 수 있었지만, 다른 참사의 경우 기억공간조차 없거나 있어도 유명무실한 경우가 많다. 4·16생명안전공원 설립을 계기로 기억문화가 혐오를 딛고 우리 사회에 잘 뿌리내리기를 바란다. 한국에서 재난조사기구 설립과 피해 지원 등을 논의할 때 영국과 프랑스의 사례를 많이 참고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두 나라도 여전히 미진한 부분이 많다. 피해자와 유가족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었고,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남아 있었다. 설령 피해자들이 만족할 만큼의 진상규명이 되어도 지속적인 감시와 활동이 필요하다는 점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이번 연수를 통해 4.16운동이 10년 동안 쌓아온 성과도 크다는 점을 다시 확인했다. 다른 참여자들이 “한국 재난피해자 운동의 국제화를 고민해야” “우리가 만들어 온 성과를 국제적으로 잘 알려 나가야”라고 언급했을 만큼 세월호참사 이후 10년은 피해자들과 시민들의 투쟁 속에서 재난참사를 우리 모두의 문제로 끊임없이 되새긴 시간이었다. 기억·추모를 둘러싼 관점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피해자 권리보장과 제도 개선의 물꼬를 텄다. 4.16운동이 만들어낸 변화가 한국 사회 전체에 자리 잡는 시스템이 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논의하고 실천해 나갈 필요가 있다. 가장 인상 깊었던 필 스크래튼 교수의 이야기를 공유하며 글을 마친다.
“법은 결코 정의가 아니다.
법은 정의를 실현하는 측면 말고도 누군가의 명성과 평판을 지키는 쪽에게 쓰이기도 한다. 테니스 경기의 공처럼 양쪽의 싸움이기도 하다. 이는 책임을 묻고자 하는 우리에게 어려운 문제이다. 진실이 있어야 책임이 있고, 진실이 있어야 정의가 있다고 보는 우리의 진실은 그들의 진실과 다르다.”
-필 스크래튼 Phil Scraton (전 힐스버러 독립 조사 패널 조사위원, 법학 교수)-
1) 곡물이나 철광석같이 컨테이너에 담을 수 없는 물건을 운송하는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