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도서 안내] 고통의 곁에 우리가 있다면 - 채정호 지음

2023-02-03

[도서 안내] 고통의 곁에 우리가 있다면 - 채정호 지음

“아직도 세월호냐” 물으면 “그렇다”고 답하라[책과 삶]

채정호 지음 | 생각속의집 | 328쪽 | 1만8000원

지난달 31일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재난안전 시스템을 배우러 미국 출장을 떠났다. 그는 지난해 ‘10·29 이태원 참사’ 직후 언론 브리핑에서 “경찰이나 소방 인력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다”고 했다. 수많은 청년들이 목숨을 잃은 비극 앞에서 정부 책임자로서 미안함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발언이었다. 뒤늦게 사과를 했지만 유족들에게는 분명 2차 가해였다. 책임지지 않는 정부 관료가 재난안전 시스템을 배우러 미국에 가는 모습은 유가족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을까.

오는 5일은 ‘10·29 이태원 참사’ 100일이 되는 날이다. 2014년 4월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도 내년이면 10주년이다.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 지하철 화재, 천안함 피격, 세월호 침몰 등 지난 37년간 숱한 사회적 재난을 지켜본 채정호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고통의 곁에 우리가 있다면>이라는 책에서 트라우마를 겪는 이들을 한국 사회가 제대로 위로하고 있는지 묻는다.

‘트라우마’는 ‘뚫다’ ‘뚫리다’라는 어원에서 비롯해 마음에 구멍이 뚫릴 만큼 극심한 고통을 말한다. 저자는 “트라우마 치유의 최종 종착지는 사회적 지지와 연결”이라며 “아픔을 대하는 태도가 그 사회 수준을 말해준다”고 했다. 책은 저자가 한국 사회의 재난 경험자들을 연구하며 지켜본 트라우마 유형과 필요한 치료법 등을 옆에서 이야기해주듯이 편안한 문체로 담았다. 2020년 텔레그램 n번방에서 성착취물을 구매했다는 허위 채팅 내용이 사이트에 올라가면서 저자가 범죄자로 낙인찍혀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의사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처지가 됐다”는 일화도 담겼다.

책을 통해 저자가 말하는 트라우마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자세를 짚어본다.

‘애도하는 사회가 성숙한 사회’ = 저자는 세월호 참사와 네덜란드 여객기 피격 사건을 비교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3개월 후였다. 네덜란드를 떠나 말레이시아로 향하던 여객기가 미사일에 격추당하면서 승객과 승무원 298명이 숨졌다. 네덜란드 정부는 신속 대응했다. 희생자 시신을 수습한 첫 비행기가 네덜란드에 도착했을 때, 공항에는 국왕 내외와 정부의 모든 부처 각료가 마중을 나갔다. 그들은 진심어린 애도의 모습을 보였다. 세월호 참사 때나 최근 이태원 참사 때 정부와 정치인들이 보인 태도와는 달랐다. 채 교수는 “4·16 이후 국가나 사회 차원에서 제대로 된 애도만 이루어졌다면 지금과 같은 사회적 트라우마로 확대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사람의 생명 앞에서는 진정성 있는 애도가 먼저”라고 말했다.

‘이제 잊으라는 말은 그만’ = 저자는 고통 앞에서는 시간이 약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이제 ‘잊으라’는 말을 건네지 않으면 좋겠다고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다고 가슴이 뻥 뚫릴 만한 아픔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정한 애도만이 이들을 달랠 수 있다. 채 교수는 70년이 지난 제주 4·3사건을 예로 들었다. 제주연구원이 2019년 내놓은 4·3 피해자 회복탄력성 연구를 보면 대통령의 사과, 특별법 제정, 진상조사보고서 등이 피해자들의 심적 회복에 가장 큰 영향을 줬다. 사건이 일어난 지 70여년이 흘러서다. 저자는 말한다. “트라우마 고통은 혼자만의 아픔으로 분리되지 않고 함께하는 아픔으로 연결될 때 나아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세월호야?’라고 묻는다면 ‘여전히 세월호야’라고 답해야 합니다.”

‘배상과 보상은 중요한 실마리’= 재난이 일어나면 보상과 배상을 둘러싸고 이견이 나오기 쉽다. ‘시체장사 하느냐’는 혐오의 표현이 난무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저자는 배상이 사고로 부서진 삶의 일부를 인정받는 중요한 요소이고 트라우마 해결의 실마리라고 말한다. 재난은 개인이 지닌 자원만으로 넘어서기 어렵기 때문이다. 저자는 트라우마 치료자로서 오랫동안 사고로 삶이 무너진 사람과 그 가족을 지켜보면서 충분한 보상과 배상이 전체 사회적 비용을 아끼는 가장 적합한 방법이라고 강조한다.

‘사회적 맥락에 따라 고통도 달라져’ = 저자는 똑같이 베트남전쟁에 참여했어도 미국과 한국 군인들의 트라우마가 달랐다고 말한다. 베트남 참전 미군은 명분도 없었고 반전 문화가 팽배했던 시기에 베트남에서 쫓기다시피 귀국한 탓에 ‘죄인’이 되었다. 미국 정신의학 교과서에서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가 공식적인 진단 기준으로 실린 시기가 베트남전 이후인 1980년이다. 반면 참전을 독려받았던 한국 군인은 트라우마 정도가 미국과는 달리 약했다. 천안함 사건도 당시 침몰 원인에 의구심을 표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정치적, 사회적 문제가 얽히면서 생존자들을 힘들게 했던 사례로 꼽힌다. 저자는 “내가 속한 사회가 아픔의 공감대를 갖고 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면 트라우마도 견딜 만하다. 주변 사람들, 그 사회가 어떻게 대해주느냐에 따라 트라우마도 치유의 가능성이 열린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