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투쟁, 악질경찰의 기억 방식
- 영화를 보고 난 후에
4.16연대 배서영 사무처장
공공의 적, 베테랑, 내부자들과 같은 영화적 결말과는 전혀 다른 방식을 채택한 영화 악질경찰을 보며 우리의 기억투쟁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결국 사악한 권력자들을 법정에 세우게 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기존 영화의 문법과는 전혀 다른 방식을 채택한 영화 악질경찰. 시사회 자리에서 감독은 아이의 탄생에 비유한다면 몇 번이나 엎어질뻔하다가 ‘난산’으로 간신히 탄생시킨 영화라고 했습니다. 태어난 것 자체가 기적이고 소중하니 영화 제작에 참여한 모든 관계자들에게 감사할 뿐이라는 그의 소감은 이 영화가 얼마나 센 영화인지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제작사 관계자는 제게 회사 문을 닫을 뻔도 했다고 했습니다. 예산의 문제가 아니라 내용의 예민함 때문에 그런 것이었습니다. 2015년이 배경인 이 영화의 대사에서 청와대를 어찌하자는 게 나올 정도이니 말입니다.
세월호참사라는 사건이 몇 가지 소품으로 등장하는 정도로도 알려진 영화 악질경찰은 세월호라는 이야기를 장르영화로 풀어낸 영화라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세월호가 주제이지 않는데 세월호가 주제인 영화인 셈입니다. ‘세월호를 말하지 않는 데 세월호 이야기이고, 세월호 이야기이지만 세월호의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 이것이 이 영화의 모티브인 것입니다. 2014년 4월 16일 모든 국민들이 그러했듯 우리 모두는 해난 사고를 목격했지만, 실은 침몰하는 대한민국의 구조되지 않는 자신을 목격했고 304명을 무참히 살해한 국가 권력자, 책임자들에게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하겠다고 다짐했던 그날처럼 말입니다.
결말을 눈치채셨다면 스포일러 주의를 먼저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지만,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와 울림은 너무나 무겁게 다가섭니다. 마지막 후반부에 응징되는 장면은 그저 통쾌함의 배설이 아니라 그래서 우리는, 당신은 사회적 책임감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도리어 반문하고 있습니다. 이는 상업영화에서는 결코 채택할 수 없는 방식으로 권력자들이 아닌 주인공이 법정에 서게 되고 이 결말을 향해 희생학생의 친구가 영화의 주인공에게 보내는 마지막 답례는 크래딧이 다 올라가도 자리를 뜰 수 없게 만드는 결말입니다.
기억투쟁. 기억은 곧 투쟁이다는 이 과격한 표현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아직도 나치학살의 책임자들이 추적되고 법정에 세워지고 있습니다. 거꾸로 5.18학살과 세월호참사의 책임자들은 5.18과 4.16의 기억을 왜곡하고 지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들의 명예때문에 그럴까요? 면죄부를 받고 싶어서? 세상물정은 그게 아니라 다시 5.18처럼, 다시 4.16처럼 해도 된다는 살인면허를 공공연히 발급받으려 한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과연 과한 것일까요?
학살자들과 국제전범자들을 영원히 추적하고 응징하겠다는 세계 인류사회의 공통된 언어가 왜 생겨났을지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한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이 여전히 학살자들이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세계적 비난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가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악질경찰은 세상 사람들이 억울한 희생을 왜 끊임없이 추모하고 기억하려는지 그 모든 방식에 대해 경의를 표하며 헌정하려는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강추 영화입니다. 우리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권이 바뀌었지만 그래도 자신들의 미래를 두고 쉽지 않은 선택을 한 배우와 스태프 모두에 저 역시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입니다. 이제는 잊자고, 너무 과하다고, 유별난 기억은 특권이 아닌지 불편하다는 이야기들도 있는 때에 세월호참사의 영화를 만들어낸 예술인들의 정성과 마음에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얼마 전, 저의 동료가 택시를 타고 광화문을 지날 때 ‘세월호 천막들 이제 지겹다고 왜 없애지 않는지 모르겠다’는 운전기사 분의 말을 듣고는 ‘맞아요. 기사님 말대로 자기 자식이 죽어도, 이웃이 죽어도 그렇게 빨리 잊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계속 아프지 않아도 되니까요. 아픈 마음을 안고 살아야 하니까요. 그러나 저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라며 비아냥거림이 아닌 진심으로 말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 어떤 반론도 없이 조용한 택시 안에서 둘은 많은 생각에 빠져든 듯 목적지를 향해 갔다고 합니다.
기억은 곧 진상규명 책임자처벌 투쟁, 적폐를 청산하기 위한 투쟁의 또 다른 단어이자 의미임을 생각해봅니다.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약속을 생각해 봅니다. 기억투쟁은 여전히 진행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빨리 잊을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기억투쟁, 악질경찰의 기억 방식
- 영화를 보고 난 후에
4.16연대 배서영 사무처장
공공의 적, 베테랑, 내부자들과 같은 영화적 결말과는 전혀 다른 방식을 채택한 영화 악질경찰을 보며 우리의 기억투쟁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결국 사악한 권력자들을 법정에 세우게 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기존 영화의 문법과는 전혀 다른 방식을 채택한 영화 악질경찰. 시사회 자리에서 감독은 아이의 탄생에 비유한다면 몇 번이나 엎어질뻔하다가 ‘난산’으로 간신히 탄생시킨 영화라고 했습니다. 태어난 것 자체가 기적이고 소중하니 영화 제작에 참여한 모든 관계자들에게 감사할 뿐이라는 그의 소감은 이 영화가 얼마나 센 영화인지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제작사 관계자는 제게 회사 문을 닫을 뻔도 했다고 했습니다. 예산의 문제가 아니라 내용의 예민함 때문에 그런 것이었습니다. 2015년이 배경인 이 영화의 대사에서 청와대를 어찌하자는 게 나올 정도이니 말입니다.
세월호참사라는 사건이 몇 가지 소품으로 등장하는 정도로도 알려진 영화 악질경찰은 세월호라는 이야기를 장르영화로 풀어낸 영화라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세월호가 주제이지 않는데 세월호가 주제인 영화인 셈입니다. ‘세월호를 말하지 않는 데 세월호 이야기이고, 세월호 이야기이지만 세월호의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 이것이 이 영화의 모티브인 것입니다. 2014년 4월 16일 모든 국민들이 그러했듯 우리 모두는 해난 사고를 목격했지만, 실은 침몰하는 대한민국의 구조되지 않는 자신을 목격했고 304명을 무참히 살해한 국가 권력자, 책임자들에게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하겠다고 다짐했던 그날처럼 말입니다.
결말을 눈치채셨다면 스포일러 주의를 먼저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지만,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와 울림은 너무나 무겁게 다가섭니다. 마지막 후반부에 응징되는 장면은 그저 통쾌함의 배설이 아니라 그래서 우리는, 당신은 사회적 책임감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도리어 반문하고 있습니다. 이는 상업영화에서는 결코 채택할 수 없는 방식으로 권력자들이 아닌 주인공이 법정에 서게 되고 이 결말을 향해 희생학생의 친구가 영화의 주인공에게 보내는 마지막 답례는 크래딧이 다 올라가도 자리를 뜰 수 없게 만드는 결말입니다.
기억투쟁. 기억은 곧 투쟁이다는 이 과격한 표현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아직도 나치학살의 책임자들이 추적되고 법정에 세워지고 있습니다. 거꾸로 5.18학살과 세월호참사의 책임자들은 5.18과 4.16의 기억을 왜곡하고 지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들의 명예때문에 그럴까요? 면죄부를 받고 싶어서? 세상물정은 그게 아니라 다시 5.18처럼, 다시 4.16처럼 해도 된다는 살인면허를 공공연히 발급받으려 한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과연 과한 것일까요?
학살자들과 국제전범자들을 영원히 추적하고 응징하겠다는 세계 인류사회의 공통된 언어가 왜 생겨났을지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한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이 여전히 학살자들이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세계적 비난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가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악질경찰은 세상 사람들이 억울한 희생을 왜 끊임없이 추모하고 기억하려는지 그 모든 방식에 대해 경의를 표하며 헌정하려는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강추 영화입니다. 우리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권이 바뀌었지만 그래도 자신들의 미래를 두고 쉽지 않은 선택을 한 배우와 스태프 모두에 저 역시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입니다. 이제는 잊자고, 너무 과하다고, 유별난 기억은 특권이 아닌지 불편하다는 이야기들도 있는 때에 세월호참사의 영화를 만들어낸 예술인들의 정성과 마음에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얼마 전, 저의 동료가 택시를 타고 광화문을 지날 때 ‘세월호 천막들 이제 지겹다고 왜 없애지 않는지 모르겠다’는 운전기사 분의 말을 듣고는 ‘맞아요. 기사님 말대로 자기 자식이 죽어도, 이웃이 죽어도 그렇게 빨리 잊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계속 아프지 않아도 되니까요. 아픈 마음을 안고 살아야 하니까요. 그러나 저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라며 비아냥거림이 아닌 진심으로 말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 어떤 반론도 없이 조용한 택시 안에서 둘은 많은 생각에 빠져든 듯 목적지를 향해 갔다고 합니다.
기억은 곧 진상규명 책임자처벌 투쟁, 적폐를 청산하기 위한 투쟁의 또 다른 단어이자 의미임을 생각해봅니다.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약속을 생각해 봅니다. 기억투쟁은 여전히 진행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빨리 잊을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