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쪽 길로 들어선 걸 후회한 적 없어요."-김상열 회원 인터뷰
김우
회원 인터뷰 꼭지인 ‘나를 닮은 사람’의 어려움은 회원들이 인터뷰를 고사한다는 점이었다. 사람들에게 인터뷰이는 뛰어난 사람, ‘나와 다른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서였다. 해서 2월 16일의 편지부터는 사무국에서 무작위로 뽑은 회원과 열심히 활동하는 회원을 추천받는 방식을 번갈아 적용하기로 했다.
“잘 안 뽑히는데...” 밥값 내기 가위바위보에서나 당첨되고, 벌칙에나 걸리는 일이 잦지, 무언가에 뽑히는 일이 없다는 김상열 회원을 그렇게 만났다.
김상열 회원은 민주노총의 활동가다. 서울본부 조직국장으로 있을 때 참사를 목도했다. 관련 활동가를 많이 알아서 4.16연대가 만들어지던 처음부터 회원으로 가입했다. ‘잊지 않겠다’ 스스로 한 약속을 담은, 당연한 가입이었다.
김 회원의 첫 사회운동은 빈민운동이었다. 노점상과 철거민들의 벗이 되었다. 대학은 2학년 1학기까지 다닌 게 전부이지만 전산과 출신인데도 컴맹이라니 얼마나 수업에 부실하게 참석했는지 알만하다. 허리가 안 좋아 군 면제까지 받았다니 젊다기보다 어린 나이에 사회운동의 길로 뛰어든 셈이다. 당시 평생 진로 선택의 이유를 물었다.
“마땅히 할 게 없으니까. 중퇴라 취직도 안 되고.”
큰 망설임 없던 선택이었다. 선택에 아쉬움이 남거나 후회가 있는지도 물었다.
“이쪽 길로 들어선 걸 후회한 적 없어요. 후회했다면 다르게 살았겠죠.”
그제부터 이제까지 확고하고 일관되고 부동인 김 회원이었다.
취미로 사진을 찍었던 터라 ‘노동해방문학’ 사진기자 생활도 조금 했다. ‘길을 찾는 사람들’ 창간 멤버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느 시기 사진을 깨끗이 접었다. 투쟁의 현장에서 촬영하느라 싸우지 못하는 게 아쉬웠던 터에 사진기자가 분신하는 이의 몸에 붙은 불을 끄지 않고, 그것을 촬영한 일을 접하고 혼란이 더 커져서였다. 사진이 알려내는 역할과 의무가 있음은 알고 있지만 ‘직접 뛰자’고 생각했다. 가지고 있으면 미련이 남으니까 싹 다 버리는 방식으로 사진을 정리했다.
화염병 던지고 파이프 들고 데모하며 한평생을 살았다. “조합원들이 ‘싸움꾼’이라고 많이 불렀죠. 끝장을 봤으니까.” 요즘도 임단협의 체결을 위한 현장 등에서 액션이 크고 목소리도 큰 싸움꾼인 건 맞다.
삶에 후회는 없지만 부모님이나 배우자의 여러 고생에 미안한 마음이 없을 순 없다. 옆지기에게 ‘10원 한 장 못 갖다준’ 시간도 짧지 않았다. 구속됐을 때 영치금이 ‘짭짤’해서 옆지기가 “니 때문에 가장 많은 돈을 만져봤다.”며 집행유예로 나올 때 아쉬워했다고. 헌신 어린 비장미보다 갇혀있는 남편에게 이렇게 농이 섞인 말도 던질 수 있는 아내라서 길고도 험난한 길에서 그 옆을 지켜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보수적이라는 아내와는 어떻게 결혼에 이르렀을까 궁금했다. “제가 결혼하자고 했어요.” 어떻게 상대가 받아들였는지가 궁금했다. “미쳤냐고 하더라고요. 끈질기게 이야기했죠.” 진정성의 전달이었다. 옆지기는 서로를 소개해준 친구를 평생의 원수로 여기고 안 만나고 있다고 말한다는데, 김 회원은 만나는지 안 만나는지 모른다는데. 중매를 선 이가 옆지기에게 술을 석 잔 얻어 마셨을지, 뺨을 석 대 맞았을지는 나도 모를 일이다.
인터뷰를 진행하며 김상열 회원은 길을 찾는 사람이자 길을 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의 투박한 ‘싸움꾼’이되 속살은 더없이 따듯한 공감의 김 회원. 10.29 이태원 참사를 겪으며 피할 수 있던, 반복되는 참사에 이태원 참사 희생자 부모님은 물론 세월호 부모님도 자괴감, 안타까움이 커지고 되살아나는 기억에 슬픔이 더 깊어질 거라는 상심을 이야기한다. “이 일을 오래 하다 보니까 상황을 볼 수 있잖아요.” 명확한 관점의 김 회원. 민주당 역시도 보수정당이다, 장막에 가려진 이면의 모습을 보아야지 쇼에 속지 말아야 한다, 문재인 정권 때도 헛된 기다림 속 시간만 보냈다는 지적을 한다. 계속된 안전사고에 우리가 무감각해지지 말아야 한다, 보수 정치인에게 해결하라고 요구하며 기대기보다 우리 스스로 싸워야 한다, 그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김 회원이다.
김 회원의 자전거에는 세월호 리본이 달려 있다. “아직도 세월호냐?” 욕하는 사람들과 싸우기도 한다는데 매일 매 순간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며 새기지 못하더라도, 라이딩할 때만이라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세상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기에 ‘아직도 세월호’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쪽 길로 들어선 걸 후회한 적 없어요."-김상열 회원 인터뷰
김우
회원 인터뷰 꼭지인 ‘나를 닮은 사람’의 어려움은 회원들이 인터뷰를 고사한다는 점이었다. 사람들에게 인터뷰이는 뛰어난 사람, ‘나와 다른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서였다. 해서 2월 16일의 편지부터는 사무국에서 무작위로 뽑은 회원과 열심히 활동하는 회원을 추천받는 방식을 번갈아 적용하기로 했다.
“잘 안 뽑히는데...” 밥값 내기 가위바위보에서나 당첨되고, 벌칙에나 걸리는 일이 잦지, 무언가에 뽑히는 일이 없다는 김상열 회원을 그렇게 만났다.
김상열 회원은 민주노총의 활동가다. 서울본부 조직국장으로 있을 때 참사를 목도했다. 관련 활동가를 많이 알아서 4.16연대가 만들어지던 처음부터 회원으로 가입했다. ‘잊지 않겠다’ 스스로 한 약속을 담은, 당연한 가입이었다.
김 회원의 첫 사회운동은 빈민운동이었다. 노점상과 철거민들의 벗이 되었다. 대학은 2학년 1학기까지 다닌 게 전부이지만 전산과 출신인데도 컴맹이라니 얼마나 수업에 부실하게 참석했는지 알만하다. 허리가 안 좋아 군 면제까지 받았다니 젊다기보다 어린 나이에 사회운동의 길로 뛰어든 셈이다. 당시 평생 진로 선택의 이유를 물었다.
“마땅히 할 게 없으니까. 중퇴라 취직도 안 되고.”
큰 망설임 없던 선택이었다. 선택에 아쉬움이 남거나 후회가 있는지도 물었다.
“이쪽 길로 들어선 걸 후회한 적 없어요. 후회했다면 다르게 살았겠죠.”
그제부터 이제까지 확고하고 일관되고 부동인 김 회원이었다.
취미로 사진을 찍었던 터라 ‘노동해방문학’ 사진기자 생활도 조금 했다. ‘길을 찾는 사람들’ 창간 멤버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느 시기 사진을 깨끗이 접었다. 투쟁의 현장에서 촬영하느라 싸우지 못하는 게 아쉬웠던 터에 사진기자가 분신하는 이의 몸에 붙은 불을 끄지 않고, 그것을 촬영한 일을 접하고 혼란이 더 커져서였다. 사진이 알려내는 역할과 의무가 있음은 알고 있지만 ‘직접 뛰자’고 생각했다. 가지고 있으면 미련이 남으니까 싹 다 버리는 방식으로 사진을 정리했다.
화염병 던지고 파이프 들고 데모하며 한평생을 살았다. “조합원들이 ‘싸움꾼’이라고 많이 불렀죠. 끝장을 봤으니까.” 요즘도 임단협의 체결을 위한 현장 등에서 액션이 크고 목소리도 큰 싸움꾼인 건 맞다.
삶에 후회는 없지만 부모님이나 배우자의 여러 고생에 미안한 마음이 없을 순 없다. 옆지기에게 ‘10원 한 장 못 갖다준’ 시간도 짧지 않았다. 구속됐을 때 영치금이 ‘짭짤’해서 옆지기가 “니 때문에 가장 많은 돈을 만져봤다.”며 집행유예로 나올 때 아쉬워했다고. 헌신 어린 비장미보다 갇혀있는 남편에게 이렇게 농이 섞인 말도 던질 수 있는 아내라서 길고도 험난한 길에서 그 옆을 지켜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보수적이라는 아내와는 어떻게 결혼에 이르렀을까 궁금했다. “제가 결혼하자고 했어요.” 어떻게 상대가 받아들였는지가 궁금했다. “미쳤냐고 하더라고요. 끈질기게 이야기했죠.” 진정성의 전달이었다. 옆지기는 서로를 소개해준 친구를 평생의 원수로 여기고 안 만나고 있다고 말한다는데, 김 회원은 만나는지 안 만나는지 모른다는데. 중매를 선 이가 옆지기에게 술을 석 잔 얻어 마셨을지, 뺨을 석 대 맞았을지는 나도 모를 일이다.
인터뷰를 진행하며 김상열 회원은 길을 찾는 사람이자 길을 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의 투박한 ‘싸움꾼’이되 속살은 더없이 따듯한 공감의 김 회원. 10.29 이태원 참사를 겪으며 피할 수 있던, 반복되는 참사에 이태원 참사 희생자 부모님은 물론 세월호 부모님도 자괴감, 안타까움이 커지고 되살아나는 기억에 슬픔이 더 깊어질 거라는 상심을 이야기한다. “이 일을 오래 하다 보니까 상황을 볼 수 있잖아요.” 명확한 관점의 김 회원. 민주당 역시도 보수정당이다, 장막에 가려진 이면의 모습을 보아야지 쇼에 속지 말아야 한다, 문재인 정권 때도 헛된 기다림 속 시간만 보냈다는 지적을 한다. 계속된 안전사고에 우리가 무감각해지지 말아야 한다, 보수 정치인에게 해결하라고 요구하며 기대기보다 우리 스스로 싸워야 한다, 그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김 회원이다.
김 회원의 자전거에는 세월호 리본이 달려 있다. “아직도 세월호냐?” 욕하는 사람들과 싸우기도 한다는데 매일 매 순간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며 새기지 못하더라도, 라이딩할 때만이라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세상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기에 ‘아직도 세월호’여야 한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