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모니터링을 마치며
박서희
2박 3일동안의 선박안전 모니터링이 끝이 났다. 배에서도 많은 이야기를 듣고 배울 수 있어서 좋았지만 내가 더 많이 배울 수 있었던 장소는 배에서 내린 후 목포와 진도에서였다. 세제모활동을 하며 세월호라는 배는 사진으로 접하기만 했는데 이번 기회에 배 내부에도 들어가보고 언니 오빠들이 올라왔던 팽목항에도 가보면서 책과 사진, 영상들로만 접했었던 곳들을 직접가서 확인하고 많이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세월호참사를 계속 보고 알면 알수록 내 마음속에는 분노가 올라온다. 사람들은, 정부는 그렇게 간단한 왜? 라는 질문에 솔직하게 답을 해주지 않는 것일까, 답을 계속해주지 않으니까 내 마음속에는 왜라는 질문을 계속 하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했던 질문들에 답이 되는 것은 거의 없었다. 세월호참사는 어떤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보면 밝혀진 것이 없다고 봐야한다. 가장 간단한 두 질문, 왜 침몰했는가? 왜 구하지 않았는가? 에 대해서 밝혀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두가지 가장 기본적인 질문이기에 이 질문이 해결되지 않으면 다른 진도를 나가기가 어렵다.
진상규명해달라고 정부에게 외치지만 정부에선 아무런 대답이 없고 우리는 추측만 계속 할 뿐이다. 사람들은 내인설이냐 외력설이냐를 가지고 근거를 대며 실랑이를 하는데 전부 다 확신은 못하고 추측을 기반으로 이야기한다. 아니 할 수 밖에 없다. 난 이런 부분에서 화가 났던 것이다. 세월호참사의 피해자인 유가족분들이 진상규명을 위해서 힘써야하고 자식의 죽음을 계속해서 말하고 알려야 하고 생업을 포기하고 거리에 나와야 하는 현실이 화가나고 답답하다. 정부는 계속해서 답을 피하고 외면하고 있고 진실에 대해선 입을 꾹 다물고 있다. 국민 앞에서 가장 투명해야하고 솔직해야하는 것이 정부인데 왜 계속 감추려고 하는지, 떳떳하지 못하다면 왜 그런 것인지 이야기를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2박 3일을 갔다오면서 가슴이 많이 아팠다. 안산 워크숍에서 기억교실과 단원고에 갔을 때 기분이랑 비슷한 기분이었다. 세월호 배에선 우리가 타고 왔던 퀸메리호에서 있었던 일상과 비슷하게 생활했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고 팽목항에서는 유가족분들의 심정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이 죽어서 슬플까 아니면 차가운 바다에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서 고마울까 나는 그것에 결론을 짓지 못했다. 나는 지을 수가 없었다. 나로썬 그 심정을 이해할 수가 없고 느낄 수가 없다. 유가족들은 이제 아픔을 헤아려달라고 이야기도 안하신다. 진상규명이 먼저라고 하신다. 세월호 당시 무능하고 힘없고 정말 멍청한 정부가 이제와서 진상규명을 한다고 해도 나는 화가 날것 같다.
난 어떻게 보면 유가족도, 피해자도 아닌 외부인인 학생이 이런 분노를 품는데 가족들의 심정은 오죽하실까 생각이 들었다. 이번을 기회로 우리 청소년들이 더 움직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따. 세월호참사가 한시라도 빠르게 진상규명되어 부모님들이 바라시는 안전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번에 갔었던 모니터링은 잊지 못할 것이고 기억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강새누
세월호 모니터링 활동을 하였다. 청소년들이 직접 선박에 승선하여 선박 안정상태를 확인하는 활동이었다. 제주항에서 출발하는 산타모니카에 탑승하였다. 산타모니카호는 정말 컸다. 나는 이렇게 큰 배를 처음 타보아서 마냥 신나있었다. 외관도 깨끗했지만 내부 리모델링을 하여 깨끗했다. 사람들도 정말 많았다. 특히 수학여행을 하는 학생들이 정말 많았다. 그 순간 내 마음속에서는 걱정이 되었다. 노란티를 입고 있는 무리를 이상한 눈빛으로 보는 듯 해서 당당하지 못했다.
나에게 전환이 필요했다. 나는 마음을 다시 먹었다. 세월호를 공부하고 기억하고 알리는 것을 더욱 열심히 하자고 생각이 들었다. 그로부터는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많은 사람들 앞을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 후에는 모니터링 활동 뿐 아니라 팽목 순례걷기, 선상 간담회, 선체 안을 돌아보기 등 세월호참사 당일을 생생히 기억하게 되었고 공감이 되었다. 프로그램명이 ‘제주의 안전은 내가 지킨다’. 선박 모니터링 이어서 모니터링 활동이 주가 될 줄 알았지만 그것보다 의미있는 활동이 많았다. 세월호참사 이후 세월호를 깊히 공부한 적이 없다. 궁금한 것도 많았지만 공부 할 수 있는 환경도 많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활동이 마음에 든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팽목캠프이다. 다른 것들도 기억나지만 팽목캠프가 가장 인상깊었다. 4.16연대 유가족 등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다. 공연을 하면서도 그분들게 힘이 되어 드리고 싶었다. 바람의 노래, 그대에게를 하며 그분들에게 도움을 드린 것 같고 힘이 되어 드린 것 같아서 좋다. 가장 의미있는 공연이었다. 이번 활동을 하면서 느낀 것은 정말 따뜻한 사람이 많다는 것이었다. 세월호의 진상규명이 될 수 있고 세월호를 기억하기 위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힘쓰시는 분들이 정말 많다는 것이다. 활동을 하면서도 우리를 잘 챙겨주셨다. 또 힘들어하는 것 같았던 유가족분들도 열심히 살려고 애쓰시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한 순간의 어린 시절을 잃어버린 단원고 누나 형들 선생님 일반인 분들이 얼마나 힘드셨을지 공감되었고 더 나는 세상을 위해 힘써야겠다고 다짐한다.
이창학
2박3일동안 세월호 모니터링을 하며 많은 곳을 갔고 새로운 느낌을 느꼈다. 처음 퀸메리호 선박 모니터링부터, 세월호에 타고 행진도 하며 팽목항도 갔었다. 대표님과 지성이누나 아버지께서 해주신 간담회도 들었다. 2박3일동안 세월호에 대해서 마음으로 몸으로 더 깊숙하게 배웠다. 여러 활동들을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따. 왜 나는 필요하고 기억해야 하는 세월호를 어느 순간에는 잊어버리게 될까?
어렸을 때부터 세월호에 관해서 캠페인도 하고 집회도 나가고 공부도 했지만 어느 순간에는 잊어버리고 살고 있다. 내가 쉽게 잊어버리게 된 이유는 어렸을 때부터 한 활동들이 나에게 무의미로 지나갔기 때문에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니었고 학교의 분위기에 따라갔다. 몸은 활동을 하고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으로 가 있었다.
사실 처음에 세제모 활동을 할때도 그렇게 까지 흥미가 있거나 큰 관심이 있지 않았다. 하지만 2박 3일동안 세월호 모니터링을 하며 생각이 바뀌었다. 나의 생각을 바꾸게 한 것은 간담회와 세월호 모니터링 팽목항에 간 것이었다. 사진이나 영상으로 보던 곳을 내가 직접 가보니 슬픈 마음이 들었다. 가는 곳 마다 가슴이 뭉클했다. 2박3일동안 세월호 모니터링을 하며 어느새 나의 마음은 함께하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나에게 너무 좋았던 세월호 모니터링이었다. 이제는 나도 동참해야겠다. 많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같이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억하는 것부터 시작이다.
박은유
2박3일간의 세월호 모니터링 프로그램이 끝이 났다.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는 시간이었다. 세월호 진상규명의 현재진행상황, 대표님의 주관적인 의견과 과학적 사실들을 들으며 많은 충격을 받았다.
여객선에 타서 모니터링도 하고 세월호 선체에 들어가서 그날을 떠올려보고, 순례길도 걷고 팽목캠프도 하고 지성이누나 아버님과 선상 간담회도 하며 그날을 기억하는 것 이상으로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 알고 있던 해경이 구조를 제대로 안했다, 대통령이 사라졌었다, 이상으로 기가 막히고 화가 치밀어 오르는 말도 안되는 일들에 대해 많이 들었다.
매년 할머니댁에 갈 때마다 배를 탔지만 한번도 신경쓰지 않았던 배의 안전시설들을 혼자 이것저것 체크할 수 있는 시야가 생겼다. 이 모든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주신 모든 분들게 감사하다. 2박3일동안 배운 것들 절대 까먹지 않고 진상규명이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안전사회 건설을 꿈꾸며 살아갈 것이다. 아침에 이태원 참사 뉴스를 보았다. 모니터링 마지막 날 안전사회를 위해 열심히 배우고 있는 도중에 또 대형참사가 일어났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마지막으로 본 통게는 151명 사망 76명 부상 실종신고 접수 2600여건이었다. 또 사상자가 더 있을거라는 내용도 있었다. 세월호참사 이후 최대 사상자라는 기사로 세월호도 계속 거론되고 있는데 이번 일로 안전사회 건설에 한발 가까워졌으면 좋겠고 사상자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필연적인 사고는 충분히 예방할 수 있다. 자본보다 생명이 우선시 되는건 당연한 것이다. 안전한 나라에서 살고싶다.
세월호 모니터링을 마치며
박서희
2박 3일동안의 선박안전 모니터링이 끝이 났다. 배에서도 많은 이야기를 듣고 배울 수 있어서 좋았지만 내가 더 많이 배울 수 있었던 장소는 배에서 내린 후 목포와 진도에서였다. 세제모활동을 하며 세월호라는 배는 사진으로 접하기만 했는데 이번 기회에 배 내부에도 들어가보고 언니 오빠들이 올라왔던 팽목항에도 가보면서 책과 사진, 영상들로만 접했었던 곳들을 직접가서 확인하고 많이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세월호참사를 계속 보고 알면 알수록 내 마음속에는 분노가 올라온다. 사람들은, 정부는 그렇게 간단한 왜? 라는 질문에 솔직하게 답을 해주지 않는 것일까, 답을 계속해주지 않으니까 내 마음속에는 왜라는 질문을 계속 하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했던 질문들에 답이 되는 것은 거의 없었다. 세월호참사는 어떤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보면 밝혀진 것이 없다고 봐야한다. 가장 간단한 두 질문, 왜 침몰했는가? 왜 구하지 않았는가? 에 대해서 밝혀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두가지 가장 기본적인 질문이기에 이 질문이 해결되지 않으면 다른 진도를 나가기가 어렵다.
진상규명해달라고 정부에게 외치지만 정부에선 아무런 대답이 없고 우리는 추측만 계속 할 뿐이다. 사람들은 내인설이냐 외력설이냐를 가지고 근거를 대며 실랑이를 하는데 전부 다 확신은 못하고 추측을 기반으로 이야기한다. 아니 할 수 밖에 없다. 난 이런 부분에서 화가 났던 것이다. 세월호참사의 피해자인 유가족분들이 진상규명을 위해서 힘써야하고 자식의 죽음을 계속해서 말하고 알려야 하고 생업을 포기하고 거리에 나와야 하는 현실이 화가나고 답답하다. 정부는 계속해서 답을 피하고 외면하고 있고 진실에 대해선 입을 꾹 다물고 있다. 국민 앞에서 가장 투명해야하고 솔직해야하는 것이 정부인데 왜 계속 감추려고 하는지, 떳떳하지 못하다면 왜 그런 것인지 이야기를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2박 3일을 갔다오면서 가슴이 많이 아팠다. 안산 워크숍에서 기억교실과 단원고에 갔을 때 기분이랑 비슷한 기분이었다. 세월호 배에선 우리가 타고 왔던 퀸메리호에서 있었던 일상과 비슷하게 생활했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고 팽목항에서는 유가족분들의 심정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이 죽어서 슬플까 아니면 차가운 바다에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서 고마울까 나는 그것에 결론을 짓지 못했다. 나는 지을 수가 없었다. 나로썬 그 심정을 이해할 수가 없고 느낄 수가 없다. 유가족들은 이제 아픔을 헤아려달라고 이야기도 안하신다. 진상규명이 먼저라고 하신다. 세월호 당시 무능하고 힘없고 정말 멍청한 정부가 이제와서 진상규명을 한다고 해도 나는 화가 날것 같다.
난 어떻게 보면 유가족도, 피해자도 아닌 외부인인 학생이 이런 분노를 품는데 가족들의 심정은 오죽하실까 생각이 들었다. 이번을 기회로 우리 청소년들이 더 움직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따. 세월호참사가 한시라도 빠르게 진상규명되어 부모님들이 바라시는 안전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번에 갔었던 모니터링은 잊지 못할 것이고 기억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강새누
세월호 모니터링 활동을 하였다. 청소년들이 직접 선박에 승선하여 선박 안정상태를 확인하는 활동이었다. 제주항에서 출발하는 산타모니카에 탑승하였다. 산타모니카호는 정말 컸다. 나는 이렇게 큰 배를 처음 타보아서 마냥 신나있었다. 외관도 깨끗했지만 내부 리모델링을 하여 깨끗했다. 사람들도 정말 많았다. 특히 수학여행을 하는 학생들이 정말 많았다. 그 순간 내 마음속에서는 걱정이 되었다. 노란티를 입고 있는 무리를 이상한 눈빛으로 보는 듯 해서 당당하지 못했다.
나에게 전환이 필요했다. 나는 마음을 다시 먹었다. 세월호를 공부하고 기억하고 알리는 것을 더욱 열심히 하자고 생각이 들었다. 그로부터는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많은 사람들 앞을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 후에는 모니터링 활동 뿐 아니라 팽목 순례걷기, 선상 간담회, 선체 안을 돌아보기 등 세월호참사 당일을 생생히 기억하게 되었고 공감이 되었다. 프로그램명이 ‘제주의 안전은 내가 지킨다’. 선박 모니터링 이어서 모니터링 활동이 주가 될 줄 알았지만 그것보다 의미있는 활동이 많았다. 세월호참사 이후 세월호를 깊히 공부한 적이 없다. 궁금한 것도 많았지만 공부 할 수 있는 환경도 많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활동이 마음에 든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팽목캠프이다. 다른 것들도 기억나지만 팽목캠프가 가장 인상깊었다. 4.16연대 유가족 등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다. 공연을 하면서도 그분들게 힘이 되어 드리고 싶었다. 바람의 노래, 그대에게를 하며 그분들에게 도움을 드린 것 같고 힘이 되어 드린 것 같아서 좋다. 가장 의미있는 공연이었다. 이번 활동을 하면서 느낀 것은 정말 따뜻한 사람이 많다는 것이었다. 세월호의 진상규명이 될 수 있고 세월호를 기억하기 위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힘쓰시는 분들이 정말 많다는 것이다. 활동을 하면서도 우리를 잘 챙겨주셨다. 또 힘들어하는 것 같았던 유가족분들도 열심히 살려고 애쓰시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한 순간의 어린 시절을 잃어버린 단원고 누나 형들 선생님 일반인 분들이 얼마나 힘드셨을지 공감되었고 더 나는 세상을 위해 힘써야겠다고 다짐한다.
이창학
2박3일동안 세월호 모니터링을 하며 많은 곳을 갔고 새로운 느낌을 느꼈다. 처음 퀸메리호 선박 모니터링부터, 세월호에 타고 행진도 하며 팽목항도 갔었다. 대표님과 지성이누나 아버지께서 해주신 간담회도 들었다. 2박3일동안 세월호에 대해서 마음으로 몸으로 더 깊숙하게 배웠다. 여러 활동들을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따. 왜 나는 필요하고 기억해야 하는 세월호를 어느 순간에는 잊어버리게 될까?
어렸을 때부터 세월호에 관해서 캠페인도 하고 집회도 나가고 공부도 했지만 어느 순간에는 잊어버리고 살고 있다. 내가 쉽게 잊어버리게 된 이유는 어렸을 때부터 한 활동들이 나에게 무의미로 지나갔기 때문에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니었고 학교의 분위기에 따라갔다. 몸은 활동을 하고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으로 가 있었다.
사실 처음에 세제모 활동을 할때도 그렇게 까지 흥미가 있거나 큰 관심이 있지 않았다. 하지만 2박 3일동안 세월호 모니터링을 하며 생각이 바뀌었다. 나의 생각을 바꾸게 한 것은 간담회와 세월호 모니터링 팽목항에 간 것이었다. 사진이나 영상으로 보던 곳을 내가 직접 가보니 슬픈 마음이 들었다. 가는 곳 마다 가슴이 뭉클했다. 2박3일동안 세월호 모니터링을 하며 어느새 나의 마음은 함께하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나에게 너무 좋았던 세월호 모니터링이었다. 이제는 나도 동참해야겠다. 많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같이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억하는 것부터 시작이다.
박은유
2박3일간의 세월호 모니터링 프로그램이 끝이 났다.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는 시간이었다. 세월호 진상규명의 현재진행상황, 대표님의 주관적인 의견과 과학적 사실들을 들으며 많은 충격을 받았다.
여객선에 타서 모니터링도 하고 세월호 선체에 들어가서 그날을 떠올려보고, 순례길도 걷고 팽목캠프도 하고 지성이누나 아버님과 선상 간담회도 하며 그날을 기억하는 것 이상으로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 알고 있던 해경이 구조를 제대로 안했다, 대통령이 사라졌었다, 이상으로 기가 막히고 화가 치밀어 오르는 말도 안되는 일들에 대해 많이 들었다.
매년 할머니댁에 갈 때마다 배를 탔지만 한번도 신경쓰지 않았던 배의 안전시설들을 혼자 이것저것 체크할 수 있는 시야가 생겼다. 이 모든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주신 모든 분들게 감사하다. 2박3일동안 배운 것들 절대 까먹지 않고 진상규명이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안전사회 건설을 꿈꾸며 살아갈 것이다. 아침에 이태원 참사 뉴스를 보았다. 모니터링 마지막 날 안전사회를 위해 열심히 배우고 있는 도중에 또 대형참사가 일어났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마지막으로 본 통게는 151명 사망 76명 부상 실종신고 접수 2600여건이었다. 또 사상자가 더 있을거라는 내용도 있었다. 세월호참사 이후 최대 사상자라는 기사로 세월호도 계속 거론되고 있는데 이번 일로 안전사회 건설에 한발 가까워졌으면 좋겠고 사상자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필연적인 사고는 충분히 예방할 수 있다. 자본보다 생명이 우선시 되는건 당연한 것이다. 안전한 나라에서 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