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어 보이는 사람’을 만나다
김우
11월 16일의 편지 인터뷰이는 마포세월공감의 박진교 (이하 별칭인 나무늘보로 칭한다) 님이다. 나무늘보는 격주 목요일 망원역에서 세월호 피케팅을 함께하는 사이인데 애초 회원 인터뷰를 거듭 사양했다. 자기 말고 훌륭한 다른 회원들을 인터뷰하라는 거였다. 훌륭한 사람을 담으려는 게 아니라 평범한 우리를 이야기하면 된다는 실랑이의 마무리는 이랬다.
“내가 만만해 보여서 하자는 거죠?”
“아뇨. 있어 보여서요.”
사실이었다. 나무늘보는 한겨울에도 장갑을 안 끼고, 겨울 코트나 두툼한 패딩을 안 입고 피케팅을 했다. “세월호 리본 받아 가세요~” 춥고 시린 날씨에 맨손으로 내미는 나무늘보의 노란리본은 지나치다가도, 주머니에 찔러 넣었던 손을 빼서 받아 가는 경우가 왕왕 있다. 이번 기회에 그 이유를 들어보았다. “쎄 보이려고요.” 웃으며 답했지만 실은 환경을 생각하는 마음이었다. 날씨가 덥다고 또 날씨가 춥다고 전기며 가스 에너지를 쓰며 인위적으로 온도를 낮추고 올리기보다 참고 적응력을 키운다는 고수의 이야기였다. 역시 있어 보였다.
나무늘보는 중학교 선생님이고, 배우자는 여성환경단체의 활동가다. 18살인 딸도 아빠와 엄마에게 ‘적응’해서 산다. “저희가 가난하기도 하지만 딸아이는 훨씬 더 가난한 걸로 알고 있어요.” 뭘 사는 일이 없지만 사더라도 웬만하며 중고로 산다. 옥탑방인 4층에서도 에어컨 없이 살았는데 올해 이사한 곳에는 에어컨이 남겨져 있어서 여름에 딱 한 번 틀었다.
“노는 거 좋아하는, 아주 시골 놈이었어요.” 나무늘보는 전북 익산이 고향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돼서야 동네로 버스가 들어왔고, 짜장면은 중2 때에야 시내 나가서 한 번 먹어본 기억이다. “예뻤던 할머니가 무진 고생하셨죠.” 할아버지가 몰락한 잔반으로 글만 읽고 생활 능력이 없던 탓에 할머니는 글 읽으면 굶어 죽는다며 장남인 아버지를 학교에 안 보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소작하는 빈농으로 살았는데, 농한기면 어머니는 식당으로, 아버지는 제재소 등에서 삯일했다. 막내인 나무늘보만 겨우 공고가 아닌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던 건 형들이 부모님을 설득한 결과였고, 주말엔 아버지와 일하는 조건이 붙은 것이기도 했다. 책상에 앉아 공부만 하기보다 시골에서 맘껏 놀아본 구력이 있고, 곱게만 자란 게 아니라 고생이 뭔지 아는 나무늘보였다. 어려움이 뭔지 아는 사람으로 사회의 아픔과 고통을 같이 느끼며 끈덕지게 달라붙어 곁을 지키는 나무늘보가 역시 있어 보였다.
나무늘보가 세월호 참사를 접하던 때는 한창 혁신학교 활동하느라 바쁘던 시기였다. 서울에선 2011년부터 혁신학교 움직임이 싹이 터 자라고 있었고, 교육에도 개혁과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집에 텔레비전도 두지 않았던 나무늘보는 참사 당일이 지나서야 뉴스로 알게 됐다. 희생자들 대개가 학생이었고 나무늘보는 교사였기에 충격이 더 컸다. 학생들은 배가 기울고 물이 들어찰 때까지도, 승무원과 교사들의 지시에 따른 죄밖에 없었다. 어른이, 해경이, 국가가 구조해줄 거라는 신뢰를 끝까지 가졌던 착각의 죄로 그렇게 스러져 갔다. 나무늘보는 전 국민이 그랬듯 아무것도 못 하는 자괴감과 3자인 방관자로 죄책감이 컸다.
성미산마을에선 무어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는 주민들이 울림두레생협 성산점 앞에서 모여 촛불을 들기 시작했다. 나무늘보는 그 시작의 날부터 함께했다. 추모 집회 장소는 더 많은 사람을 만나려고 망원 우체국 사거리, 합정역 등으로 다양하게 넓혀갔다. 그러다가 피케팅 보관 장소를 고정하며 피케팅 장소 역시 망원역으로 고정한 게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망원역 지킴이라는 이름으로 2인 1조 포함 6명이 고정으로 평일 요일을 책임지던 시기가 있었다. 매일 하다가, 주 1회로 하다가, 코로나 이후 월 2회로 재가동한 것도 그런 어제들이 있어 가능한 오늘이다. 독수리 5형제처럼 망원역 6남매 같은 핵심 인원이 있었고, 그중 월요일의 지킴이가 나무늘보였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퇴근길 저녁도 먹지 않고 월요일이면 어김없이 망원역에서 피켓을 들었던 마음을 물었다. 소련이 무너지고 당시 학생 운동권이 휘청하며 모두 학교로 돌아가고, 대학원에 가고, 유학을 가던 시기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노동야학으로 만났던 노동자들에게 함부로 떠들었는데 말만 하지 말고 현장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단다. 의리 같은 거였다는데 “대학 다니다 들어가면 있어 보이잖아요.”라며 웃었다. 망원역지킴이로 남았던 것도 마찬가지의 마음이었단다. “뭐가 깊은 뜻이 있었던 거 아니고요. 너무 힘들거나 다른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만두는 게 더 어려운 일이라 생각했어요. 더 중요하고 더 시급한 일이 생겼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니. 하던 거 하는 거죠.”
“거창한 뜻이 있어야 하는 거면 지금까지 못 했을 거 같아요. 그냥 그 요일은 피치 못한 일이 없다면 다른 일을 만들지 않는 거뿐이에요.”
“계속 오래가야 한다면 조금 더 다수인 게 의미 있으니 나처럼 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하죠. 깊이 있게 연구하고 생각을 벼려내고 하는 사람만 할 수 있다면 소수만 할 수 있을 거니까요.”
리본을 받아 가는 사람도 가방에 걸고 다니는 사람도 자기 상황에 맞게 같이 하는 거라는 나무늘보. 세월의 더께가 앉고 동력이 떨어지고 약해진 듯 보여도 다른 국면과 상황에서 모두가 확 달라붙고 확 타오를 수 있다고 믿는 나무늘보다. 피케팅에 합류하려고 망원역 출구로 걸어오다 보면 10년 가까운 세월에 일행들이 어느새 망원역의 배경이 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흐리멍덩해 보일 수도 있지만, 얕고 뜨뜻미지근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지금은 가늘고 길게 갈 때일 수도 있는 거죠. 같이 잘 버티고 가면 좋겠어요. 바람에 흔들리는 풀처럼, 바람에 흩날리는 민들레 홀씨처럼 제 자리를 잘 지켜가야죠.”
‘있어 보이는 사람’을 만나다
김우
11월 16일의 편지 인터뷰이는 마포세월공감의 박진교 (이하 별칭인 나무늘보로 칭한다) 님이다. 나무늘보는 격주 목요일 망원역에서 세월호 피케팅을 함께하는 사이인데 애초 회원 인터뷰를 거듭 사양했다. 자기 말고 훌륭한 다른 회원들을 인터뷰하라는 거였다. 훌륭한 사람을 담으려는 게 아니라 평범한 우리를 이야기하면 된다는 실랑이의 마무리는 이랬다.
“내가 만만해 보여서 하자는 거죠?”
“아뇨. 있어 보여서요.”
사실이었다. 나무늘보는 한겨울에도 장갑을 안 끼고, 겨울 코트나 두툼한 패딩을 안 입고 피케팅을 했다. “세월호 리본 받아 가세요~” 춥고 시린 날씨에 맨손으로 내미는 나무늘보의 노란리본은 지나치다가도, 주머니에 찔러 넣었던 손을 빼서 받아 가는 경우가 왕왕 있다. 이번 기회에 그 이유를 들어보았다. “쎄 보이려고요.” 웃으며 답했지만 실은 환경을 생각하는 마음이었다. 날씨가 덥다고 또 날씨가 춥다고 전기며 가스 에너지를 쓰며 인위적으로 온도를 낮추고 올리기보다 참고 적응력을 키운다는 고수의 이야기였다. 역시 있어 보였다.
나무늘보는 중학교 선생님이고, 배우자는 여성환경단체의 활동가다. 18살인 딸도 아빠와 엄마에게 ‘적응’해서 산다. “저희가 가난하기도 하지만 딸아이는 훨씬 더 가난한 걸로 알고 있어요.” 뭘 사는 일이 없지만 사더라도 웬만하며 중고로 산다. 옥탑방인 4층에서도 에어컨 없이 살았는데 올해 이사한 곳에는 에어컨이 남겨져 있어서 여름에 딱 한 번 틀었다.
“노는 거 좋아하는, 아주 시골 놈이었어요.” 나무늘보는 전북 익산이 고향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돼서야 동네로 버스가 들어왔고, 짜장면은 중2 때에야 시내 나가서 한 번 먹어본 기억이다. “예뻤던 할머니가 무진 고생하셨죠.” 할아버지가 몰락한 잔반으로 글만 읽고 생활 능력이 없던 탓에 할머니는 글 읽으면 굶어 죽는다며 장남인 아버지를 학교에 안 보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소작하는 빈농으로 살았는데, 농한기면 어머니는 식당으로, 아버지는 제재소 등에서 삯일했다. 막내인 나무늘보만 겨우 공고가 아닌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던 건 형들이 부모님을 설득한 결과였고, 주말엔 아버지와 일하는 조건이 붙은 것이기도 했다. 책상에 앉아 공부만 하기보다 시골에서 맘껏 놀아본 구력이 있고, 곱게만 자란 게 아니라 고생이 뭔지 아는 나무늘보였다. 어려움이 뭔지 아는 사람으로 사회의 아픔과 고통을 같이 느끼며 끈덕지게 달라붙어 곁을 지키는 나무늘보가 역시 있어 보였다.
나무늘보가 세월호 참사를 접하던 때는 한창 혁신학교 활동하느라 바쁘던 시기였다. 서울에선 2011년부터 혁신학교 움직임이 싹이 터 자라고 있었고, 교육에도 개혁과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집에 텔레비전도 두지 않았던 나무늘보는 참사 당일이 지나서야 뉴스로 알게 됐다. 희생자들 대개가 학생이었고 나무늘보는 교사였기에 충격이 더 컸다. 학생들은 배가 기울고 물이 들어찰 때까지도, 승무원과 교사들의 지시에 따른 죄밖에 없었다. 어른이, 해경이, 국가가 구조해줄 거라는 신뢰를 끝까지 가졌던 착각의 죄로 그렇게 스러져 갔다. 나무늘보는 전 국민이 그랬듯 아무것도 못 하는 자괴감과 3자인 방관자로 죄책감이 컸다.
성미산마을에선 무어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는 주민들이 울림두레생협 성산점 앞에서 모여 촛불을 들기 시작했다. 나무늘보는 그 시작의 날부터 함께했다. 추모 집회 장소는 더 많은 사람을 만나려고 망원 우체국 사거리, 합정역 등으로 다양하게 넓혀갔다. 그러다가 피케팅 보관 장소를 고정하며 피케팅 장소 역시 망원역으로 고정한 게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망원역 지킴이라는 이름으로 2인 1조 포함 6명이 고정으로 평일 요일을 책임지던 시기가 있었다. 매일 하다가, 주 1회로 하다가, 코로나 이후 월 2회로 재가동한 것도 그런 어제들이 있어 가능한 오늘이다. 독수리 5형제처럼 망원역 6남매 같은 핵심 인원이 있었고, 그중 월요일의 지킴이가 나무늘보였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퇴근길 저녁도 먹지 않고 월요일이면 어김없이 망원역에서 피켓을 들었던 마음을 물었다. 소련이 무너지고 당시 학생 운동권이 휘청하며 모두 학교로 돌아가고, 대학원에 가고, 유학을 가던 시기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노동야학으로 만났던 노동자들에게 함부로 떠들었는데 말만 하지 말고 현장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단다. 의리 같은 거였다는데 “대학 다니다 들어가면 있어 보이잖아요.”라며 웃었다. 망원역지킴이로 남았던 것도 마찬가지의 마음이었단다. “뭐가 깊은 뜻이 있었던 거 아니고요. 너무 힘들거나 다른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만두는 게 더 어려운 일이라 생각했어요. 더 중요하고 더 시급한 일이 생겼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니. 하던 거 하는 거죠.”
“거창한 뜻이 있어야 하는 거면 지금까지 못 했을 거 같아요. 그냥 그 요일은 피치 못한 일이 없다면 다른 일을 만들지 않는 거뿐이에요.”
“계속 오래가야 한다면 조금 더 다수인 게 의미 있으니 나처럼 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하죠. 깊이 있게 연구하고 생각을 벼려내고 하는 사람만 할 수 있다면 소수만 할 수 있을 거니까요.”
리본을 받아 가는 사람도 가방에 걸고 다니는 사람도 자기 상황에 맞게 같이 하는 거라는 나무늘보. 세월의 더께가 앉고 동력이 떨어지고 약해진 듯 보여도 다른 국면과 상황에서 모두가 확 달라붙고 확 타오를 수 있다고 믿는 나무늘보다. 피케팅에 합류하려고 망원역 출구로 걸어오다 보면 10년 가까운 세월에 일행들이 어느새 망원역의 배경이 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흐리멍덩해 보일 수도 있지만, 얕고 뜨뜻미지근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지금은 가늘고 길게 갈 때일 수도 있는 거죠. 같이 잘 버티고 가면 좋겠어요. 바람에 흔들리는 풀처럼, 바람에 흩날리는 민들레 홀씨처럼 제 자리를 잘 지켜가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