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기고 독한 성기봉 회원을 만나다
김 우
성기봉 회원의 고향은 원주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가족이 정선으로 이사했다. 시청 청소부였다가 탄광 광부 일을 하러 가는 아버지를 따라서다. 다시 중학교 2학년 때 원주로 유학을 나와 할머니랑 살았다. 아들만큼은 광부 하지 말고 공부하라는 부모님 뜻에 따라서였다.
부모님은 장남 미래에 ‘욕심이 많았다.’ 아버지는 탄을 캐고, 어머니는 시장에서 좌판을 열면서 재정적으로 부담이 될 텐데도 어린 나이부터 과외 공부시키고, 주산학원에 보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줄곧 태권도를 익혔는데 이것만큼은 배우고 싶어서, 하고 싶어서 한 운동이었다. 어머니는 계란을 도매로 떼어와 집에서 팔다가, 시장에서 부침개 장사를 하다가, 가게를 얻어 통닭 장사를 했다.
성적은 소위 문제아 친구들과 어울리며 많이 떨어졌다. 처음엔 ‘삥’을 뜯고 뜯기는 사이였다. 어느 순간 아버지가 힘들게 일해서 번 돈을 그대로 뺏길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으면서 덤비고 그러다 친해진 거였다.
“독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나 봐요. 코피 나고 머리 깨지면서도 덤볐죠.” 피 칠갑하고 친구 집 안방까지 들이닥친 성 회원을 보았던 친구 어머니가 요즘도 이야기하길 “내 아들이 말썽 피우는 건 많이 봤지만, 너처럼 집까지 쫓아오는 지독한 애는 처음 봤다.”고 한다. 독하다는 자평을 하고, 역시 지독하다는 평가를 듣는 성 회원이다.
아버지는 설암으로 2013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어머니는 79세인데도 식당을 한 경험을 살려 요리 자원봉사 활동을 다닌다. 늘 사람의 도리를 하라는 어머니 말씀과 실천이 산교육이 된 것인지 성 회원은 4.16 운동에 지칠 줄 모르고, 동생은 공무원 노조 지부장을 맡고 있다.
전에는 전공을 살려 카센터도 운영했는데 요즘은 건설 일용직 일을 하는 성 회원. 오히려 본업이 ‘세월호 활동’이라 할 수 있다. 끼니를 거르며 전국에 지원 다니다 보니 영양 결핍이 오기도 하고 요사이엔 무릎 연골이 파손돼서 입원 치료를 받고 있기도 하다.
성 회원은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집은 ‘비정규노동자의 집 꿀잠’처럼 운영하고 싶다. 또 세월호 제주기억관처럼 꾸미고 싶다. 다른 곳에 식당을 하나 차려서는 옻닭을 팔고 고기 안 먹는 이들에겐 두부 요리를 해주고 싶다.
“이윤 추구보다는 사람과 사람이 만날 수 있는 공간을 열고 싶어요.” 지인들이 한 번씩 들러서 한 끼 먹고 갈 수 있는 식당을 꿈꾼다. 유지는 어떻게 하냐고 물으니 그게 걱정이란다.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땅은 이미 1천 평을 사놓았고, 생각만은 기억관과 식당을 이미 지었다.
성 회원은 4.16연대를 탈퇴했다가 최근 재가입을 했다. “연대에서 하는 일이 제 욕심에 차지 않고, 생각하는 것에 못 미쳐서요.” 개인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 단체이다 보니 여러 애로사항이 있을 거라 짐작한다. ‘여전히 답답한 면이 없지는 않지만, 배척보다는 쓴소리도 하고 칭찬도 하며 같이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재가입을 했다. “혹 떨어져 나갔다고 오해받는 이들도 바쁘게 살다 보니까 그런 거고 언제가 다시 충분히 힘이 되 줄 거예요.” 전부터 활동을 같이 해왔던 이들을 믿는 마음도 크다.
“세월호를 한 번도 남의 일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실제 4월이 되면 밥도 잘 넘어가지 않고 ‘굉장히’ ‘많이’ 힘들다는 성 회원이다. “내 역할을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도록.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세월호 참사뿐만 아니라 안타까운 죽음들이 많죠. 밝혀내고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애써야죠. 세월호엔 사회 전반의 문제가 포함되어 있어요.” “앞으로도 그럴 듯해요. 살아가는 동안 멈추지 않고 할 거 같아요.” 맞아 쓰러져도 발딱 일어나 덤비던 대로, 어른들이 잘못 만든 세상을 바꾸어가는 활동을 질기고도 독하게 하는 성기봉 회원이다.
질기고 독한 성기봉 회원을 만나다
김 우
성기봉 회원의 고향은 원주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가족이 정선으로 이사했다. 시청 청소부였다가 탄광 광부 일을 하러 가는 아버지를 따라서다. 다시 중학교 2학년 때 원주로 유학을 나와 할머니랑 살았다. 아들만큼은 광부 하지 말고 공부하라는 부모님 뜻에 따라서였다.
부모님은 장남 미래에 ‘욕심이 많았다.’ 아버지는 탄을 캐고, 어머니는 시장에서 좌판을 열면서 재정적으로 부담이 될 텐데도 어린 나이부터 과외 공부시키고, 주산학원에 보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줄곧 태권도를 익혔는데 이것만큼은 배우고 싶어서, 하고 싶어서 한 운동이었다. 어머니는 계란을 도매로 떼어와 집에서 팔다가, 시장에서 부침개 장사를 하다가, 가게를 얻어 통닭 장사를 했다.
성적은 소위 문제아 친구들과 어울리며 많이 떨어졌다. 처음엔 ‘삥’을 뜯고 뜯기는 사이였다. 어느 순간 아버지가 힘들게 일해서 번 돈을 그대로 뺏길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으면서 덤비고 그러다 친해진 거였다.
“독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나 봐요. 코피 나고 머리 깨지면서도 덤볐죠.” 피 칠갑하고 친구 집 안방까지 들이닥친 성 회원을 보았던 친구 어머니가 요즘도 이야기하길 “내 아들이 말썽 피우는 건 많이 봤지만, 너처럼 집까지 쫓아오는 지독한 애는 처음 봤다.”고 한다. 독하다는 자평을 하고, 역시 지독하다는 평가를 듣는 성 회원이다.
아버지는 설암으로 2013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어머니는 79세인데도 식당을 한 경험을 살려 요리 자원봉사 활동을 다닌다. 늘 사람의 도리를 하라는 어머니 말씀과 실천이 산교육이 된 것인지 성 회원은 4.16 운동에 지칠 줄 모르고, 동생은 공무원 노조 지부장을 맡고 있다.
전에는 전공을 살려 카센터도 운영했는데 요즘은 건설 일용직 일을 하는 성 회원. 오히려 본업이 ‘세월호 활동’이라 할 수 있다. 끼니를 거르며 전국에 지원 다니다 보니 영양 결핍이 오기도 하고 요사이엔 무릎 연골이 파손돼서 입원 치료를 받고 있기도 하다.
성 회원은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집은 ‘비정규노동자의 집 꿀잠’처럼 운영하고 싶다. 또 세월호 제주기억관처럼 꾸미고 싶다. 다른 곳에 식당을 하나 차려서는 옻닭을 팔고 고기 안 먹는 이들에겐 두부 요리를 해주고 싶다.
“이윤 추구보다는 사람과 사람이 만날 수 있는 공간을 열고 싶어요.” 지인들이 한 번씩 들러서 한 끼 먹고 갈 수 있는 식당을 꿈꾼다. 유지는 어떻게 하냐고 물으니 그게 걱정이란다.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땅은 이미 1천 평을 사놓았고, 생각만은 기억관과 식당을 이미 지었다.
성 회원은 4.16연대를 탈퇴했다가 최근 재가입을 했다. “연대에서 하는 일이 제 욕심에 차지 않고, 생각하는 것에 못 미쳐서요.” 개인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 단체이다 보니 여러 애로사항이 있을 거라 짐작한다. ‘여전히 답답한 면이 없지는 않지만, 배척보다는 쓴소리도 하고 칭찬도 하며 같이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재가입을 했다. “혹 떨어져 나갔다고 오해받는 이들도 바쁘게 살다 보니까 그런 거고 언제가 다시 충분히 힘이 되 줄 거예요.” 전부터 활동을 같이 해왔던 이들을 믿는 마음도 크다.
“세월호를 한 번도 남의 일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실제 4월이 되면 밥도 잘 넘어가지 않고 ‘굉장히’ ‘많이’ 힘들다는 성 회원이다. “내 역할을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도록.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세월호 참사뿐만 아니라 안타까운 죽음들이 많죠. 밝혀내고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애써야죠. 세월호엔 사회 전반의 문제가 포함되어 있어요.” “앞으로도 그럴 듯해요. 살아가는 동안 멈추지 않고 할 거 같아요.” 맞아 쓰러져도 발딱 일어나 덤비던 대로, 어른들이 잘못 만든 세상을 바꾸어가는 활동을 질기고도 독하게 하는 성기봉 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