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로 세월호 싸움을 하다-쉼표 인터뷰
김 우
박미리 회원의 별칭은 ‘쉼표’다. 2015년 세월호 참사 500일 추모 합창문화제를 기획하며 4.16 합창단을 만났고, 내내 지휘자로 활동해 오고 있다. 4.16 합창단은 세월호 참사 6주기에 첫 음반을 내고, 요사이 두 번째 음반 작업 중이다. “(세월호) 부모님의 목소리, 우리의 목소리를 남겨두는 건 기록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음반은) 결과물이자 씨앗이 돼서 우리의 걸음을 이어가게 할 거라는 생각이죠.”
쉼표는 ‘노래로 세월호 싸움을 하는’ 4.16 합창단에 존경심이 크다. 세월호 부모님 곁에 있는 시민들이 긴 시간을 함께한 비결은 서로가 선을 넘지 않고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즘 합창단 안에서 마음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고민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고 했다. 10년 동안 저마다 지치고 힘든 마음 때문인지 합창단원 사이에 음반 작업 또한 진상 규명이라는 목표에 도움이 될 거라는 믿음이 흔들리는 듯도 해서다.
“이 시기를 잘 건너가야죠. 저도 발 빼듯 도망가듯 하지는 않을 거예요.” 단장으로 방향타를 잡아줄 창현 엄마도 그렇고 대개가 단단한 사람들이니, 내홍을 겪는 듯한 4.16 합창단 역시도 비 온 뒤 굳어지는 땅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똘망똘망하고 커어~다란 눈망울의 쉼표는 어떤 아이였을까. 답답할 정도로 착한 아이였다고 한다. 만화책도 안 보고, 오락실도 안 가고, 욕도 안 하고 중2 때까지 ‘수녀님이 꿈’인 아이였다. 1남 3녀의 막내로 아버지의 사랑을 흠뻑 받고 자란 막둥이였다. 무릎에 앉히고 예뻐하며 중학생 때까지도 업어주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힘들어 보이던 시기에 수녀의 꿈을 접고 공부에 집중하게 됐다. 아버지에게 힘이 돼주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함평의 집을 떠나 광주의 여고를 다닐 때 외로움도 힘겨움도 달래준 게 음악이었다. ‘음악으로 힘이 돼주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아버지는 쉼표가 ‘어떤 선택을 하든 모두 인정하고 응원해 주는’ 보루였다. 내야 할 레슨비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친구들을 돕느라 교습을 빼먹던 대학 시절에도 “네가 하는 일 알겠는데, 네 생각이 궁금하다”며 귀 기울여 주는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그 크신 사랑은 늘 쉼표를 성장시키는 자양분으로 남았다. “아버지한테 부끄럽지 않게요. 곱고 깊은 사람으로 아버지 앞에 서야지, 당당하게 살아야지 싶어요.” ‘속이 꽉 찬 여자 99.9’ 쉼표의 가슴 속엔 아버지가 꽉 차 있었다.
쉼표의 옆지기인 ‘느낌표’도 장인어른께 제일 사랑받는 사위였다. 아버지는 딸과 사위의 결혼기념일에도 축하 문자를 보내곤 했다. 마침 오늘이 결혼기념일이었다. “아버지 어디 가셨어? 사람의 목소리는 계속 기억에 남는 거 같아.” 느낌표가 오늘 아침에 했다는 말대로 기억은 힘이 세다, 기억 투쟁을 하는 우리에게 합창단의 노래 기록은 의미가 적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쉼표. 문장 부호 쉼표로 쉼의 의미일 거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연주 음표 사이에서 소리로 드러나지 않는데 오히려 소리를 더 응축시키고 극대화해 다음 음표를 돋보이게 하는 음악적 효과의 뜻을 담았다고 했다. 별칭 또한 긴장감 있게 꽉 차있었다.
그런 쉼표가 담담하게 말하는,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앞둔 다짐을 들었다. 세월호 참사 8주기 손글씨전 ‘그날을 쓰다’에서 본 붓글씨가 생각난다고 했다.
“오겠지?”
“올 거야.”
묻고 답하는 기다림의 마음처럼, 그런 마음이 모두에게 많이 있었으면 한다고 했다. ‘길게 보는 마음들’ 말이다.
“더 기다리며 함께 갈 수 있지 않을까요? 팽목항 무릎담요를 덮은 어머니의 등 모습을 잊지 않고, 그 기다림의 마음으로요.”
“기다림은 연약하고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게 아니라 다음으로 가기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는 시간이에요. 10주기라고 크게 다른 거 같진 않고요. 똑같은 마음으로, 기다림의 마음으로 노래 부르고 있을 듯해요. 난 노래하는 사람이니까요.”
노래로 싸우는 4.16 합창단, 그에 더해지는 4,160명 세월호 시민합창단의 장엄한 합창이 기다려진다.
노래로 세월호 싸움을 하다-쉼표 인터뷰
김 우
박미리 회원의 별칭은 ‘쉼표’다. 2015년 세월호 참사 500일 추모 합창문화제를 기획하며 4.16 합창단을 만났고, 내내 지휘자로 활동해 오고 있다. 4.16 합창단은 세월호 참사 6주기에 첫 음반을 내고, 요사이 두 번째 음반 작업 중이다. “(세월호) 부모님의 목소리, 우리의 목소리를 남겨두는 건 기록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음반은) 결과물이자 씨앗이 돼서 우리의 걸음을 이어가게 할 거라는 생각이죠.”
쉼표는 ‘노래로 세월호 싸움을 하는’ 4.16 합창단에 존경심이 크다. 세월호 부모님 곁에 있는 시민들이 긴 시간을 함께한 비결은 서로가 선을 넘지 않고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즘 합창단 안에서 마음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고민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고 했다. 10년 동안 저마다 지치고 힘든 마음 때문인지 합창단원 사이에 음반 작업 또한 진상 규명이라는 목표에 도움이 될 거라는 믿음이 흔들리는 듯도 해서다.
“이 시기를 잘 건너가야죠. 저도 발 빼듯 도망가듯 하지는 않을 거예요.” 단장으로 방향타를 잡아줄 창현 엄마도 그렇고 대개가 단단한 사람들이니, 내홍을 겪는 듯한 4.16 합창단 역시도 비 온 뒤 굳어지는 땅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똘망똘망하고 커어~다란 눈망울의 쉼표는 어떤 아이였을까. 답답할 정도로 착한 아이였다고 한다. 만화책도 안 보고, 오락실도 안 가고, 욕도 안 하고 중2 때까지 ‘수녀님이 꿈’인 아이였다. 1남 3녀의 막내로 아버지의 사랑을 흠뻑 받고 자란 막둥이였다. 무릎에 앉히고 예뻐하며 중학생 때까지도 업어주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힘들어 보이던 시기에 수녀의 꿈을 접고 공부에 집중하게 됐다. 아버지에게 힘이 돼주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함평의 집을 떠나 광주의 여고를 다닐 때 외로움도 힘겨움도 달래준 게 음악이었다. ‘음악으로 힘이 돼주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아버지는 쉼표가 ‘어떤 선택을 하든 모두 인정하고 응원해 주는’ 보루였다. 내야 할 레슨비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친구들을 돕느라 교습을 빼먹던 대학 시절에도 “네가 하는 일 알겠는데, 네 생각이 궁금하다”며 귀 기울여 주는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그 크신 사랑은 늘 쉼표를 성장시키는 자양분으로 남았다. “아버지한테 부끄럽지 않게요. 곱고 깊은 사람으로 아버지 앞에 서야지, 당당하게 살아야지 싶어요.” ‘속이 꽉 찬 여자 99.9’ 쉼표의 가슴 속엔 아버지가 꽉 차 있었다.
쉼표의 옆지기인 ‘느낌표’도 장인어른께 제일 사랑받는 사위였다. 아버지는 딸과 사위의 결혼기념일에도 축하 문자를 보내곤 했다. 마침 오늘이 결혼기념일이었다. “아버지 어디 가셨어? 사람의 목소리는 계속 기억에 남는 거 같아.” 느낌표가 오늘 아침에 했다는 말대로 기억은 힘이 세다, 기억 투쟁을 하는 우리에게 합창단의 노래 기록은 의미가 적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쉼표. 문장 부호 쉼표로 쉼의 의미일 거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연주 음표 사이에서 소리로 드러나지 않는데 오히려 소리를 더 응축시키고 극대화해 다음 음표를 돋보이게 하는 음악적 효과의 뜻을 담았다고 했다. 별칭 또한 긴장감 있게 꽉 차있었다.
그런 쉼표가 담담하게 말하는,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앞둔 다짐을 들었다. 세월호 참사 8주기 손글씨전 ‘그날을 쓰다’에서 본 붓글씨가 생각난다고 했다.
“오겠지?”
“올 거야.”
묻고 답하는 기다림의 마음처럼, 그런 마음이 모두에게 많이 있었으면 한다고 했다. ‘길게 보는 마음들’ 말이다.
“더 기다리며 함께 갈 수 있지 않을까요? 팽목항 무릎담요를 덮은 어머니의 등 모습을 잊지 않고, 그 기다림의 마음으로요.”
“기다림은 연약하고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게 아니라 다음으로 가기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는 시간이에요. 10주기라고 크게 다른 거 같진 않고요. 똑같은 마음으로, 기다림의 마음으로 노래 부르고 있을 듯해요. 난 노래하는 사람이니까요.”
노래로 싸우는 4.16 합창단, 그에 더해지는 4,160명 세월호 시민합창단의 장엄한 합창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