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우
이루하 님은 기억공간 활동가다. 작년 3월부터 일요일마다 오전 11시~오후 8시 서울시의회 마당에 있는 기억공간을 지켜왔다. 언니네트워크의 여성주의 책방 ‘꼴’의 운영에 힘 보태는 자원 활동도 한다. 98년생으로 학생이라서 책방 자원 활동은 동아리 활동인 셈이란다.
학비는 장학금으로 해결하고 생활비는 알바로 마련하고 있다고 해서 불안정 노동의 애환을 하나 들려달라고 청했다. 이루하 님이 첫손에 꼽은 ‘진상 손님’은 백화점 명품 의류 쪽에서 일할 때 만난 사람이었다. 재킷 입는 걸 옆에서 거들었는데 “머리”라고 짧게 말해서 무슨 말인가 생각했는데 재킷 안에 들어간 머리카락을 들어서 빼라는 요구였다. 자기 머리 하나 자기 손으로 만지지 않으며 점원을 하인 대하듯 하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 말고도 ‘돈만 내면’ 왕으로 군림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어른을 참 많이도 보았다. 감정 노동을 수반하는 여러 서비스직을 거쳐 지금은 초등학교 도서관 일을 한다.
“척박한 세상에서 굴려지다가 귀여운 아이들 마주 보고 일하니까 좋아요. 근데 기후도 안 좋아지고 몇 세대 안에 인류가 사라질 듯한 위기를 느껴요. 아이들은 미래에 더 나은 세상에서 살아갔으면 좋겠는데 말이에요.”
이루하 님은 세월호 참사 당시 고1이었다. 당시 학교에선 이동전화기를 내놓아야 했는데 용케 내지 않고 있던 한 친구가 급우들에게 참사 소식을 알렸다. 집에 가서 뉴스를 보면서는 무언가 자꾸 번복되는 상황으로 황당했다. 애도하는 방식조차 잘 모르는 사회에서 제대로 알려주지도 일러주지도 않는 공간이 학교였고 그런 제도가 교육이었다.
“무균의 상태로 키우고 싶은 어른의 욕망이 있는 거죠. 사회인으로 성장해야 하는데 말이에요.”
“서이초 일도 많이 안타까워요. ‘어리니까 알지 않아도 돼’ 하면서 쉬쉬하고.”
덮기보다 어떻게 잘 해결하고 헤쳐 나가는지 보여주는 게 교육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맨날 싸우는 나쁜 어른들 대신 좋은 어른들에게 더 많은 마이크를 주었음 좋겠어요. 그걸 보는 다음 세대가 있으니까요. 정치인이나 기업인처럼 언론에 많이 나오는 분들은 뭔가 본인이 가진 많은 권력을 어떻게 쓸까 고민하기보다 더 부풀리려 하는 것만 같아요. 언론도 자극적이고 나쁜 쪽에 포커스를 두니 요즘에는 뉴스도 많이 못 보겠더라고요.”
성인이 돼서 페미니즘 의제에 자연스레 눈을 뜨게 된 것이 사회적 관심의 시작이었다.
“이거 대개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여성들이 문제라고 발화시키는 말이 맞는 말로 들려왔어요. 부당하다고 느낀 부분을 언어화하는데 ‘내가 느끼는 감정이 이런 것이었구나’ ‘우리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해도 되는구나’ 하고 알게 됐어요.”
“여성, 소수자, 장애인, 피해자 등 인권 존중의 마음은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연결된 거잖아요.”
책을 읽고 기사를 검색하고 연대 활동을 하며 세월호 참사에 대한 감수성도 커졌다. 참사와 안전 사회에 관한 생각이 생기면서 추모하는 곳에도 갈 수 있었다.
기억공간에서 활동하며 기억공간에 관한 생각도 더 커졌다.
“우리 고등학교 시절 얼굴이 있는 거예요. 당시 유행하던 머리, 화장, 안경 스타일,… 내 고등학교 사진이랑 별다를 게 없는데 난 여기서 일하고, 그들은 세상에 없구나.”
초기엔 희생자 영정 사진을 가까이에서 오래 보는 경험으로 여러 생각이 들었다면, 지금은 기억공간을 잘 지키고 관리해야겠다는 다짐이 자리 잡았다. 기억공간에 있으면 다양한 사람이 찾아온다. 혐오 세력이 와서 욕을 하기도 하지만 지나가던 시민이 들르는 공간이다. 가족이 오기도 하고, 학교에서 아이들이 단체로 오기도 한다. 참사가 반복되는 사회에서 안전 사회를 건설하는데 이런 기억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해졌다. 하지만 임시 공간이다 보니 열악할 수밖에 없다. 밖에서 바람 대신 열기가 들어오고 오후 6시만 되면 시의회에서 전기를 차단해서 간이 조명을 놓아야 하는 상황이다. 더워도 너무 더운 요즘에도 일요일마다 꼬박꼬박 가서 하루를 그 공간에 있지만 이루하 님은 무더위보다도 존립 여부가 불안정한 현 상황이 안타깝기만 하다.
“사회적 참사에 대하여 국가와 사회가 함께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 일들의 몫을 시민들에게만 떠넘기고 있는 것 같아요."
세월호 참사에서 고등학생 또래가 희생됐고, 이태원 참사에서는 친구의 친구가 당했다. 대책도 없고, 책임자도 피하려 하고, 반복만 되는 참사에서 또래 친구들이 죽어 나가고 있어서 ‘그래서 더 와닿는 거 같다’는 이루하 님이다.
“너무 화가 나요. 전 운이 좋았다고 생각할 뿐이에요. ‘그다음은 날까?’ 그런 생각도 들고요. 여성혐오 범죄도 많은 세상에서 살아있다는 사실이 단지 운이 좋아서라면 이 세상을 바꿔야죠.”
“모두가 먹고 사는 일보다 좀 더 나은, 사회적 고민을 했으면 좋겠어요. 불편하지만 정의롭게 사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에요.
이루하 님은 운이 좋아 살아갈 뿐인 막막한 세상이 아니라 정말 살만한 세상, 사회 안전망을 갖춘 국가, 살고 싶은 사회로 바꾸고 싶고 그것에 기여하고 싶다고 한다. 함께 걸으면 길이 될 거라 믿으며 우리도 걸어가야 할 길이다.
김 우
이루하 님은 기억공간 활동가다. 작년 3월부터 일요일마다 오전 11시~오후 8시 서울시의회 마당에 있는 기억공간을 지켜왔다. 언니네트워크의 여성주의 책방 ‘꼴’의 운영에 힘 보태는 자원 활동도 한다. 98년생으로 학생이라서 책방 자원 활동은 동아리 활동인 셈이란다.
학비는 장학금으로 해결하고 생활비는 알바로 마련하고 있다고 해서 불안정 노동의 애환을 하나 들려달라고 청했다. 이루하 님이 첫손에 꼽은 ‘진상 손님’은 백화점 명품 의류 쪽에서 일할 때 만난 사람이었다. 재킷 입는 걸 옆에서 거들었는데 “머리”라고 짧게 말해서 무슨 말인가 생각했는데 재킷 안에 들어간 머리카락을 들어서 빼라는 요구였다. 자기 머리 하나 자기 손으로 만지지 않으며 점원을 하인 대하듯 하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 말고도 ‘돈만 내면’ 왕으로 군림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어른을 참 많이도 보았다. 감정 노동을 수반하는 여러 서비스직을 거쳐 지금은 초등학교 도서관 일을 한다.
“척박한 세상에서 굴려지다가 귀여운 아이들 마주 보고 일하니까 좋아요. 근데 기후도 안 좋아지고 몇 세대 안에 인류가 사라질 듯한 위기를 느껴요. 아이들은 미래에 더 나은 세상에서 살아갔으면 좋겠는데 말이에요.”
이루하 님은 세월호 참사 당시 고1이었다. 당시 학교에선 이동전화기를 내놓아야 했는데 용케 내지 않고 있던 한 친구가 급우들에게 참사 소식을 알렸다. 집에 가서 뉴스를 보면서는 무언가 자꾸 번복되는 상황으로 황당했다. 애도하는 방식조차 잘 모르는 사회에서 제대로 알려주지도 일러주지도 않는 공간이 학교였고 그런 제도가 교육이었다.
“무균의 상태로 키우고 싶은 어른의 욕망이 있는 거죠. 사회인으로 성장해야 하는데 말이에요.”
“서이초 일도 많이 안타까워요. ‘어리니까 알지 않아도 돼’ 하면서 쉬쉬하고.”
덮기보다 어떻게 잘 해결하고 헤쳐 나가는지 보여주는 게 교육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맨날 싸우는 나쁜 어른들 대신 좋은 어른들에게 더 많은 마이크를 주었음 좋겠어요. 그걸 보는 다음 세대가 있으니까요. 정치인이나 기업인처럼 언론에 많이 나오는 분들은 뭔가 본인이 가진 많은 권력을 어떻게 쓸까 고민하기보다 더 부풀리려 하는 것만 같아요. 언론도 자극적이고 나쁜 쪽에 포커스를 두니 요즘에는 뉴스도 많이 못 보겠더라고요.”
성인이 돼서 페미니즘 의제에 자연스레 눈을 뜨게 된 것이 사회적 관심의 시작이었다.
“이거 대개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여성들이 문제라고 발화시키는 말이 맞는 말로 들려왔어요. 부당하다고 느낀 부분을 언어화하는데 ‘내가 느끼는 감정이 이런 것이었구나’ ‘우리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해도 되는구나’ 하고 알게 됐어요.”
“여성, 소수자, 장애인, 피해자 등 인권 존중의 마음은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연결된 거잖아요.”
책을 읽고 기사를 검색하고 연대 활동을 하며 세월호 참사에 대한 감수성도 커졌다. 참사와 안전 사회에 관한 생각이 생기면서 추모하는 곳에도 갈 수 있었다.
기억공간에서 활동하며 기억공간에 관한 생각도 더 커졌다.
“우리 고등학교 시절 얼굴이 있는 거예요. 당시 유행하던 머리, 화장, 안경 스타일,… 내 고등학교 사진이랑 별다를 게 없는데 난 여기서 일하고, 그들은 세상에 없구나.”
초기엔 희생자 영정 사진을 가까이에서 오래 보는 경험으로 여러 생각이 들었다면, 지금은 기억공간을 잘 지키고 관리해야겠다는 다짐이 자리 잡았다. 기억공간에 있으면 다양한 사람이 찾아온다. 혐오 세력이 와서 욕을 하기도 하지만 지나가던 시민이 들르는 공간이다. 가족이 오기도 하고, 학교에서 아이들이 단체로 오기도 한다. 참사가 반복되는 사회에서 안전 사회를 건설하는데 이런 기억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해졌다. 하지만 임시 공간이다 보니 열악할 수밖에 없다. 밖에서 바람 대신 열기가 들어오고 오후 6시만 되면 시의회에서 전기를 차단해서 간이 조명을 놓아야 하는 상황이다. 더워도 너무 더운 요즘에도 일요일마다 꼬박꼬박 가서 하루를 그 공간에 있지만 이루하 님은 무더위보다도 존립 여부가 불안정한 현 상황이 안타깝기만 하다.
“사회적 참사에 대하여 국가와 사회가 함께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 일들의 몫을 시민들에게만 떠넘기고 있는 것 같아요."
세월호 참사에서 고등학생 또래가 희생됐고, 이태원 참사에서는 친구의 친구가 당했다. 대책도 없고, 책임자도 피하려 하고, 반복만 되는 참사에서 또래 친구들이 죽어 나가고 있어서 ‘그래서 더 와닿는 거 같다’는 이루하 님이다.
“너무 화가 나요. 전 운이 좋았다고 생각할 뿐이에요. ‘그다음은 날까?’ 그런 생각도 들고요. 여성혐오 범죄도 많은 세상에서 살아있다는 사실이 단지 운이 좋아서라면 이 세상을 바꿔야죠.”
“모두가 먹고 사는 일보다 좀 더 나은, 사회적 고민을 했으면 좋겠어요. 불편하지만 정의롭게 사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에요.
이루하 님은 운이 좋아 살아갈 뿐인 막막한 세상이 아니라 정말 살만한 세상, 사회 안전망을 갖춘 국가, 살고 싶은 사회로 바꾸고 싶고 그것에 기여하고 싶다고 한다. 함께 걸으면 길이 될 거라 믿으며 우리도 걸어가야 할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