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참 좋았다
-한상균 회원 인터뷰-
4.16연대 운영위원 김우
한상균 회원의 할머니는 있어도 나누고, 없어도 나누는 사람이었다. 귀한 찰밥을 해서 나누고, 집에 있는 술까지 퍼서 나누었다. 손주들 이야기도 잘 들어주는 다정한 사람이 바로 할머니였다. 할머니의 손에서 먹거리를 얻어먹던 이웃집 꼬맹이들이 커서 명절에 마을로 올 때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꼭 할머니의 선물은 챙겨 왔다고 한다. 그런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동네에서 집집이 애도와 추모의 뜻을 담아 들고 온 만장이 ‘수두룩 빽빽’이었다.
항암 치료받으며 입맛을 잃은 동지들에게 한 회원이 옆지기와 함께 손수 담아서, 문 앞 배송으로 전하던 김치 3종 세트의 손길도 ‘나눔의 전도사’였던 할머니를 닮은 것이겠거니 짐작이 갔다.
“제가 사람을 좋아하나 봐요, 천성적으로. 할머니의 영향도 있다고 봐야죠.”
89년 12월 결혼을 하며 얻은 신혼집은 보증금 없이 월세 5만 원인 단칸방이었다. 장을 들이려면 문을 뜯어야 했고, 들여온 장을 세우려면 천장을 뜯어야 했던 작은 방이었다. 그래도 집들이 손님은 많이도 와서 마당에 종이 상자를 뜯어 깔고 맞이해야 했다. 한 회원의 딸이 결혼하던 날 역시도 하객으로 예식장이 미어터졌다. 고위직 권력자의 혼사도 아닌데 말이다. 권력도 없고, 돈도 없는 한 회원이지만 그이를 믿고 응원하는 관계만큼은 차고도 넘쳐흐른다.

소탈한 평상시 모습
나주 봉황면의 작은 마을. 한 회원의 초중등 시절은 공치기, 자치기, 저수지 수영, 수박 서리 등으로 평범하고 친근하다. 여름 방학이면 소여물을 쑬 꼴을 베고, 겨울 방학이면 산에 나무하러 다니며 동네 형들과 어울렸다. 초등학교 동창이 딱 한 명일 정도로 작아도 너무 작은 마을. 그나마 중학교 시절엔 마을 안에 동기가 아예 없기도 했다.
“우리 집이 그냥 이렇게 ‘거으’ 차가 안 다니는 완전 숲길이에요.”
큰길에서 벗어나 공동묘지 50기까지 갖춘 숲길, 온갖 귀신 이야기가 오싹오싹 떠오르는 밤길이었지만 한 회원은 혼자서도 씩씩하게 다녔다. 오히려 40대인 작은아버지가 할아버지 심부름으로 늦은 시간 면 소재지까지 나갈 때면 초등생인 한 회원을 부러 찾아서 동행하곤 했다. 한 회원이 어린 시절부터 담력이 있었다는 얘기다.
“국립은 돈이 적게 들고, 졸업하면 취직이 잘 된다고 해서요.”
초중등학교에선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공부를 잘해서 우등상도 많이 받았지만, 광주에 있는 실업계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너는 대학 못 보낸다’라던 아버지가 서운했는지 물었다. 서운했다기보다 적성에 맞지 않아 방황하고 갈등한 시간이었다고 했다.
고2 때는 ‘집에서 용돈 줄 형편이 안 되니까 돈 좀 벌어볼까 모의해서’ 친구들과 넷이서 포장마차를 열기도 했다. 누구는 재료 준비하고 누구는 호객하고, 한 회원은 굽는 걸 담당했다. 꼼장어에 닭발과 닭똥집이며 참새를 구워 본 실력파라서 요즘도 동료들과 모일 때면 왕년의 장기를 살려 닭 소금구이 요리를 하곤 한다.
그래도 한 회원의 고교 시절은 ‘사람답게 사는 게 무엇인가?’하는 화두 하나는 붙잡고 지낸 시간이었다는데, 고3에 5월 광주항쟁을 만났다.
“정말 진짜 잔혹한 현장을 겪게 된 거죠. ‘이럴 수가 있는 것이냐’하는, 너무나 야만적인, 군인들의 폭력과 살인들을 본 거죠.”
“다 거기 있는 사람들이 생사의 두려움이 있으면 군인들 총 쏘고 있는데 전두환 물러가라, 노태우 물러가라 시위를 할 수 있겠어요?”
“동네 골목과 시골 논두렁 걸으며 생각했던, 친구와 이웃의 관계 속에서나 느꼈던,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선이 확 바뀌게 된 계기였죠.”
80년의 광주는 열아홉 살의 한 회원을 총을 멘 시민군으로 이끌었고, 국가폭력 앞에 생사의 두려움까지 넘어서던 시간 속에서 그이의 생각은 국가와 사회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으로 확장했다.
제대 후에는 부산에서 작은 공장에도 다니고, 책이나 향수를 파는 외판원을 하기도 했다. ‘피폐하고 곤궁한 삶이 적응하게 만들어’ 이런저런 세일즈도 그럭저럭 할 수 있었다. IMF 때는 야간조가 일주일씩 쉴 때 동료의 본가에서 운영하는 오징어 덕장에서 오징어를 떼어다가 가게에 납품하는 일도 했다. 하지만 포장마차 운영 때와 마찬가지로 외상 준 것을 받지 못해서, 남은 건 별로 없었다.
86년은 25살의 한 회원이 ‘펄펄 날랐던 시기’였다. 회사의 부당함에 맞서 노조를 만드는 주체가 된 것이다.
“다 침묵하고 있었던 거고. ‘이대로는 안 된다, 노조를 만들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빡시게 준비해 보자, 그 시절에 인생을 걸었어요. 설립 때까지 뼈를 갈아 넣었죠.”
인수 합병으로 부산에서 평택의 더 큰 회사로 왔지만, ‘작은 회사보다도 훨씬 못하고, 인간 존엄이 없고, 갑질하고, 폭력적이고, 대우가 더 낮은’ 게 비교가 되고 체감이 되니 본능적으로 ‘이건 아니재’ ‘참고 살면 우리가 바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각한 노동자로, 실천하는 노동자로 살아온 한평생의 시작이었다.
사실 광주 민주화항쟁을 거치며 투쟁하는 삶으로 벼려지기 전에도 한 회원은 좌파일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이름부터 나라 한(韓) 서로 상(相) 고를 균(均), 서로 균등하게 살아야 한다는, 거국적 평등의 가치가 담긴 이름이니 말이다.
2009년 쌍용차 옥쇄파업 투쟁을 이끌면서는 거대한 국가폭력, 사악한 자본의 탄압, 간부의 배신, 양승태 사법농단, 사회적 학살이자 사회적 타살에까지 이르는 절망과 고립에 맞닥뜨려야 했다. 그럼에도 평조합원의 헌신, 연대의 희망버스로 ‘쌍차는 오뚝이처럼 살아왔다’라는 한 회원의 말에 쌍차 대신 한 회원 자신을 대입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노‧농‧빈이 세월호 문제를 주요 의제로 걸고 싸웠죠.”
“누구나, 다, 같이, 같은 마음이었어요.”
세월호참사가 일어난 2014년에 민주노총이 더 적극적으로 싸우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도 컸기에 2015년 민중총궐기 투쟁의 소집권자였던 한 회원에게 세월호 문제는 빠질 수 없는 의제였다. 그이를 감옥에 가둔 죄목 중에 가장 앞선 것으로 세월호 관련 가두시위도 포함돼 있다. 촛불의 요구와 광장의 요구를 배반하는 정권, 세월호의 진실을 책임 있게 밝혀내지 못하는 정권에 더 기대하는 것은 없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조차 무언가 계산하는 것이고, 국힘과 더불어라는 막강한 보수 양당 기득권에 파열구를 내는, 바위를 깨는 계란이 돼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한 회원이다.

2015년 1월 쌍용자동차 굴뚝농성 지지 집회에서
사실 한 회원은 담대함으로 세상을 돌파해 왔다. 저인망 체포조가 대기하던 시기에도 집회 이후 뒷골목으로 피했다면 필히 체포당했을 텐데 오히려 동지들 예닐곱 명과 ‘파란 우비, 검정 우비, 찢어진 우비’를 입고 나란히 중앙선으로 걸어가서 적의 허를 찔렀다. 빤히 쳐다보던 경찰 중 아무도 누구도 한 회원을 알아채지 못했다.
‘계파가 양파, 쪽파처럼 우후죽순 생겨나는’ 곳에서 ‘좌파‧중앙파‧자주파도 아닌 오직 민주노총의 선언과 강령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민주노총파’로 살았다는 한 회원. 부정의한 권력에 맞서고 부당한 회사에 맞짱 뜨며 두려움 없이 살아온 그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느낀 것은 당당함과 더불어 소탈함, 그리고 붉은 가슴의 진정성이었다. 62년생 범띠로 올해 나이 한창때인 예순셋. 앞으로도 열정적으로 살아낼 날들이 많겠지만, 나중에 고향 마을에 묻힐 때 ‘노동자로 살았다. 그래서 참 좋았다’라는 묘비명으로 남고 싶다던 말이 마음에 남았다.
그래서 참 좋았다
-한상균 회원 인터뷰-
4.16연대 운영위원 김우
한상균 회원의 할머니는 있어도 나누고, 없어도 나누는 사람이었다. 귀한 찰밥을 해서 나누고, 집에 있는 술까지 퍼서 나누었다. 손주들 이야기도 잘 들어주는 다정한 사람이 바로 할머니였다. 할머니의 손에서 먹거리를 얻어먹던 이웃집 꼬맹이들이 커서 명절에 마을로 올 때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꼭 할머니의 선물은 챙겨 왔다고 한다. 그런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동네에서 집집이 애도와 추모의 뜻을 담아 들고 온 만장이 ‘수두룩 빽빽’이었다.
항암 치료받으며 입맛을 잃은 동지들에게 한 회원이 옆지기와 함께 손수 담아서, 문 앞 배송으로 전하던 김치 3종 세트의 손길도 ‘나눔의 전도사’였던 할머니를 닮은 것이겠거니 짐작이 갔다.
“제가 사람을 좋아하나 봐요, 천성적으로. 할머니의 영향도 있다고 봐야죠.”
89년 12월 결혼을 하며 얻은 신혼집은 보증금 없이 월세 5만 원인 단칸방이었다. 장을 들이려면 문을 뜯어야 했고, 들여온 장을 세우려면 천장을 뜯어야 했던 작은 방이었다. 그래도 집들이 손님은 많이도 와서 마당에 종이 상자를 뜯어 깔고 맞이해야 했다. 한 회원의 딸이 결혼하던 날 역시도 하객으로 예식장이 미어터졌다. 고위직 권력자의 혼사도 아닌데 말이다. 권력도 없고, 돈도 없는 한 회원이지만 그이를 믿고 응원하는 관계만큼은 차고도 넘쳐흐른다.
소탈한 평상시 모습
나주 봉황면의 작은 마을. 한 회원의 초중등 시절은 공치기, 자치기, 저수지 수영, 수박 서리 등으로 평범하고 친근하다. 여름 방학이면 소여물을 쑬 꼴을 베고, 겨울 방학이면 산에 나무하러 다니며 동네 형들과 어울렸다. 초등학교 동창이 딱 한 명일 정도로 작아도 너무 작은 마을. 그나마 중학교 시절엔 마을 안에 동기가 아예 없기도 했다.
“우리 집이 그냥 이렇게 ‘거으’ 차가 안 다니는 완전 숲길이에요.”
큰길에서 벗어나 공동묘지 50기까지 갖춘 숲길, 온갖 귀신 이야기가 오싹오싹 떠오르는 밤길이었지만 한 회원은 혼자서도 씩씩하게 다녔다. 오히려 40대인 작은아버지가 할아버지 심부름으로 늦은 시간 면 소재지까지 나갈 때면 초등생인 한 회원을 부러 찾아서 동행하곤 했다. 한 회원이 어린 시절부터 담력이 있었다는 얘기다.
“국립은 돈이 적게 들고, 졸업하면 취직이 잘 된다고 해서요.”
초중등학교에선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공부를 잘해서 우등상도 많이 받았지만, 광주에 있는 실업계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너는 대학 못 보낸다’라던 아버지가 서운했는지 물었다. 서운했다기보다 적성에 맞지 않아 방황하고 갈등한 시간이었다고 했다.
고2 때는 ‘집에서 용돈 줄 형편이 안 되니까 돈 좀 벌어볼까 모의해서’ 친구들과 넷이서 포장마차를 열기도 했다. 누구는 재료 준비하고 누구는 호객하고, 한 회원은 굽는 걸 담당했다. 꼼장어에 닭발과 닭똥집이며 참새를 구워 본 실력파라서 요즘도 동료들과 모일 때면 왕년의 장기를 살려 닭 소금구이 요리를 하곤 한다.
그래도 한 회원의 고교 시절은 ‘사람답게 사는 게 무엇인가?’하는 화두 하나는 붙잡고 지낸 시간이었다는데, 고3에 5월 광주항쟁을 만났다.
“정말 진짜 잔혹한 현장을 겪게 된 거죠. ‘이럴 수가 있는 것이냐’하는, 너무나 야만적인, 군인들의 폭력과 살인들을 본 거죠.”
“다 거기 있는 사람들이 생사의 두려움이 있으면 군인들 총 쏘고 있는데 전두환 물러가라, 노태우 물러가라 시위를 할 수 있겠어요?”
“동네 골목과 시골 논두렁 걸으며 생각했던, 친구와 이웃의 관계 속에서나 느꼈던,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선이 확 바뀌게 된 계기였죠.”
80년의 광주는 열아홉 살의 한 회원을 총을 멘 시민군으로 이끌었고, 국가폭력 앞에 생사의 두려움까지 넘어서던 시간 속에서 그이의 생각은 국가와 사회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으로 확장했다.
제대 후에는 부산에서 작은 공장에도 다니고, 책이나 향수를 파는 외판원을 하기도 했다. ‘피폐하고 곤궁한 삶이 적응하게 만들어’ 이런저런 세일즈도 그럭저럭 할 수 있었다. IMF 때는 야간조가 일주일씩 쉴 때 동료의 본가에서 운영하는 오징어 덕장에서 오징어를 떼어다가 가게에 납품하는 일도 했다. 하지만 포장마차 운영 때와 마찬가지로 외상 준 것을 받지 못해서, 남은 건 별로 없었다.
86년은 25살의 한 회원이 ‘펄펄 날랐던 시기’였다. 회사의 부당함에 맞서 노조를 만드는 주체가 된 것이다.
“다 침묵하고 있었던 거고. ‘이대로는 안 된다, 노조를 만들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빡시게 준비해 보자, 그 시절에 인생을 걸었어요. 설립 때까지 뼈를 갈아 넣었죠.”
인수 합병으로 부산에서 평택의 더 큰 회사로 왔지만, ‘작은 회사보다도 훨씬 못하고, 인간 존엄이 없고, 갑질하고, 폭력적이고, 대우가 더 낮은’ 게 비교가 되고 체감이 되니 본능적으로 ‘이건 아니재’ ‘참고 살면 우리가 바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각한 노동자로, 실천하는 노동자로 살아온 한평생의 시작이었다.
사실 광주 민주화항쟁을 거치며 투쟁하는 삶으로 벼려지기 전에도 한 회원은 좌파일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이름부터 나라 한(韓) 서로 상(相) 고를 균(均), 서로 균등하게 살아야 한다는, 거국적 평등의 가치가 담긴 이름이니 말이다.
2009년 쌍용차 옥쇄파업 투쟁을 이끌면서는 거대한 국가폭력, 사악한 자본의 탄압, 간부의 배신, 양승태 사법농단, 사회적 학살이자 사회적 타살에까지 이르는 절망과 고립에 맞닥뜨려야 했다. 그럼에도 평조합원의 헌신, 연대의 희망버스로 ‘쌍차는 오뚝이처럼 살아왔다’라는 한 회원의 말에 쌍차 대신 한 회원 자신을 대입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노‧농‧빈이 세월호 문제를 주요 의제로 걸고 싸웠죠.”
“누구나, 다, 같이, 같은 마음이었어요.”
세월호참사가 일어난 2014년에 민주노총이 더 적극적으로 싸우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도 컸기에 2015년 민중총궐기 투쟁의 소집권자였던 한 회원에게 세월호 문제는 빠질 수 없는 의제였다. 그이를 감옥에 가둔 죄목 중에 가장 앞선 것으로 세월호 관련 가두시위도 포함돼 있다. 촛불의 요구와 광장의 요구를 배반하는 정권, 세월호의 진실을 책임 있게 밝혀내지 못하는 정권에 더 기대하는 것은 없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조차 무언가 계산하는 것이고, 국힘과 더불어라는 막강한 보수 양당 기득권에 파열구를 내는, 바위를 깨는 계란이 돼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한 회원이다.
2015년 1월 쌍용자동차 굴뚝농성 지지 집회에서
사실 한 회원은 담대함으로 세상을 돌파해 왔다. 저인망 체포조가 대기하던 시기에도 집회 이후 뒷골목으로 피했다면 필히 체포당했을 텐데 오히려 동지들 예닐곱 명과 ‘파란 우비, 검정 우비, 찢어진 우비’를 입고 나란히 중앙선으로 걸어가서 적의 허를 찔렀다. 빤히 쳐다보던 경찰 중 아무도 누구도 한 회원을 알아채지 못했다.
‘계파가 양파, 쪽파처럼 우후죽순 생겨나는’ 곳에서 ‘좌파‧중앙파‧자주파도 아닌 오직 민주노총의 선언과 강령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민주노총파’로 살았다는 한 회원. 부정의한 권력에 맞서고 부당한 회사에 맞짱 뜨며 두려움 없이 살아온 그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느낀 것은 당당함과 더불어 소탈함, 그리고 붉은 가슴의 진정성이었다. 62년생 범띠로 올해 나이 한창때인 예순셋. 앞으로도 열정적으로 살아낼 날들이 많겠지만, 나중에 고향 마을에 묻힐 때 ‘노동자로 살았다. 그래서 참 좋았다’라는 묘비명으로 남고 싶다던 말이 마음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