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어요[16일의 편지-2025년 11월] 다섯번째 팽목기억캠프, 세 명의 후기글 모음

2025-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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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8~9일간 팽목기억캠프가 진행되었습니다. 각 지역에서 함께 해주신 세 분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이제야 세월호를 시작합니다.

- 팽목항 기억캠프에서 배운 돌보는 시민성 -

4.16 세종시민모임 정유숙

세월호 11주기가 지났지만, 저는 그 시간을 멀리서만 바라보았습니다. 아이들 만나는 학교 현장에서 봄꽃 피는 4월마다 애도의 시간을 가져왔지요. 허나 슬픔의 심연에 감히 다가가지 못하고 사실을 전달하는 정도에 그쳤어요. 그러다 우연처럼, 어쩌면 늦은 부름처럼 4.16 세종시민모임이라는 울력에 기대어 팽목항에 걸음했습니다.

기억순례길을 걷는 노란 깃발이 바람에 펄럭입니다. 대구시민상주모임과 세월호를기억하는제주청소년모임(이하 세제모)이 그려내는 노란 행렬이 이어진 마음 같아 좋았어요. 생각을 가다듬으며 꽁무늬쯤 걷다 보면 어귀마다 버스가 멈춰 기다리고 있었지요. 우리의 속도와 숨을 배려하면서요.

기억전시관을 둘러보고, 성당에도 들러요. 사진속 얼굴들과 이름 하나하나를 오래 보았습니다. 방파제 ‘기억의 벽’에 마련된 추모 그림과 글들도 읽어요. 붉은 등대, 하늘나라 우체통, 빛바랜 깃발들. 너울대는 파도 저 너머 그날의 고통을 가늠하다가 이내 멈춥니다. 떨어지는 빗방울과 바람. 자연은 참 무상하기도 하지. 아니 무심하기도 하지. 

노란 리본이 흔들리는 팽목항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멈춰있지 않았어요. 누군가는 꽃을 심고, 누군가는 밥을 짓고, 누군가는 미사를 드리고 누군가는 해풍에 삭는 깃대를 교체합니다. ‘잊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기 위해’ 그곳에 있습니다. 길고 긴 기다림의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서로를 돌보는 일상의 힘 덕분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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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순례길을 걷는 노란 행렬

무려 8년 동안 홀로 팽목항을 지켜왔다는 우재군의 아버님이 차려낸 저녁. 감정을 다잡으며 함께 간 아홉 살 딸아이와 밥을 먹습니다. 가장 큰 슬픔을 겪은 사람들. 그리고 그 손을 잡은 사람들. 그들이 만든 이 공간의 깊이와 머물렀을 마음을 헤아리는 일이 쉽지 않았어요. 빗줄기가 거세져 기억캠프는 강당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긴 시간 소식을 기다리며 간절한 마음으로 가족들이 생활했던 곳이고 오늘 우리가 하룻밤 묵을 곳이기도 하지요. 

북놀이패 장단에 들썩이다가 오카리나 연주에 훌쩍이다가, 박성언 밴드의 노래 ‘기억들이 모여 우리가 된다, 우리들이 모여 희망이 된다’를 소리 높여 함께 부릅니다. 울다 웃다 함께 부르는 노래는 놀라운 힘이 있어요. 적당한 말과 표정을 찾지 못해 마주하지 못했던 유가족분들의 얼굴을 바라볼 용기가 생겼거든요. 세제모의 노래와 군무(!) 공연까지 이어지자 함께 소리 내던 저도 어느새 여기에 말을 얹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슬픔이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감정이 되고 나의 문제가 되니 이제 저도 여기서 빠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세월호 이후를 함께 사는 사람들’입니다.

비가 그친 아침의 팽목항은 눈부시게 아름답습니다. 애진 아버님은 장작을 자르고, 우재 아버님은 또 아침을 차려요. 저마다 분주하게 서로를 돌보는 일상을 시작합니다. 스피커에서는 노래가 흐르고 하룻강아지 나라와 제 딸 아이는 마당을 신나게 뛰어다녀요. 어제와 달리 고요하고 평온한 바다, 이 잔인하도록 찬란한 아침이 얼마나 많이 흘렀을까요. 작별인사를 하며 비로소 어머님 아버님을 안아드릴 용기가 생기더군요. 손부끄럽지만 단감 한봉지와 아이 용돈까지 받아 듭니다. 서로의 삶에 스며들어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능력, 이것이야말로 시민성의 또 다른 이름인지도 모릅니다. 하룻밤 사이 저는 어제와 다른 사람이 되었는지도요.

목포로 건너가 인양된 선체를 마주했습니다. 의혹과 해명의 과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하도에 새로운 공간이 마련되어 더 많은 이들이 세월호를 기억하고 생명안전을 고민할 수 있게 된다니 조금은 안도했습니다.

세종으로 돌아오는 길도 역시 멀어요. 그러나 앞으로를 생각하면 한달음 길입니다. 기억은 멈춘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으로 지속되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누군가의 고통 앞에 어떻게 설 것인가. 타인의 아픔에 응답할 수 있고 더 많은 이들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그리하여 서로를 돌보는 시민들이 더 많아지는 것이 세월호 이후 우리가 살아갈 세상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늦었지만 이제 저도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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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 세종시민모임과 함께




아픔으로 연결된 우리들

대구 4.16연대 이석현

이번 겨울 동안 구미에서 지내게 되었다. 이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고, 감사하게도 대구 4.16연대와 연락이 닿았다. 그 즈음 '팽목기억캠프'도 갈지 말지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대구 차에 한 자리 남아요~"라는 위원장님의 초대에 팽목을 가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기억의 숲에서 순례길을 따라 팽목으로 향했다. 팽목을 간 건 이번이 세 번째다. 오랜만에 보는 분들이 반가웠고, 처음 보는 분들은 더 반가웠다. 지난번 팽목에 왔을 때 새로운 사람이 많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들뜬 마음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출발할 무렵 하늘이 많이 흐리고 바람도 불었다. 중간에는 비도 내리기 시작해서 모두 가방을 열어 서로에게 노란 우비를 나누어 주었다. 진도에는 아직 단풍이 많이 물들지 않았는데, 행렬이 길을 노랗게 적시고 있는 것 같아 보기 좋았다. 팽목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해 계셨던 부모님들께서 우리를 따뜻하게 환영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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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보다 비가 더 많이 내리고 바람도 불어서 예정되었던 팽목항 깃발 교체는 미뤄졌다. 그 시간동안 모두들 저마다 시간을 보냈는데, 노란 우비를 입은 채로 팽목항을 돌아다니며 사진으로 담아가거나 기억관에 들러 추모를 하고 글을 남기는 모습도 보였다. 식당에는 부모님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사람들도 모락모락 모여있었고, 강당에서는 잠시 뒤에 있을 문화제 공연 연습을 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지금 비바람이 불고 있는 곳에 서있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따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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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저번에 만들어 준거, 리본 있잖아. 팽목에 남기고 와도 될까?"

얼마 전 일이다. 엄마와 함께 걷던 어느 날, 직접 뜬 노란 리본을 가방에 매달고 다니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그 리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엄마께 "우리 엄마 저런 거 만들 줄은 아시려나?"라고 놀렸더니 집에 오시자마자 스무 개가 넘는 리본을 만들어 놓으셨다. 그 리본을 몇 개를 챙겨 내려왔는데, 이번에 등대 근처에 매달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녁에는 문화제가 있었다. 오카리나를 연주하셨던 어느 어머니의 손가락이 가장 기억에 남아 있다. 그 어머니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오카리나를 연주해주셨는데, 그 모습에서 노래로 응원을 하시려는 마음이 참 순수하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래 ‘오월, 기다림’도 기억에 남는다. 이 노래는 작년 광주에서 처음 들었는데 그때도 노래가 너무 좋아서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가 울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는 ‘오월’을 ‘사월’로 바꾸어 불러주셨는데, 노래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 눈물을 흘렸다. 

다음날 아침, 하늘은 무척 맑았고 어제 하지 못했던 깃발 교체를 할 수 있었다. 그동안 방파제를 지켜주던 깃발들이 색이 바래져 있었는데, 그 깃발들을 걷고 새로운 깃발로 교체하는 활동이었다. 깃발을 교체하니 노란 깃발이 가을 하늘과 어우러지며 예쁘게 보였다. 펄럭이는 깃발들이 보이는 방파제의 가장자리를 보니 이번 팽목항에서의 활동을 마무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깃발 교체를 하는 동안, 부모님들께서 따뜻한 감자 수제비를 아침으로 준비해주셨다. 그리고 부모님과 인사를 하며 다음에 또 오겠다는 약속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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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 아픔으로 연결되어 만난다. 도움이 되고 싶어 시작한 활동들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만 하게 된다. 이렇게만 살아가도 되는 걸까, 나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살고 있을까? 




진도 팽목항 세월호 다섯번째 팽목기억캠프

강동평화의소녀상 보존 시민위원회 강해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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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사정으로 이제서야 방문한 진도 팽목항. 그간 계획만 갖고 있던 일들을 4.16연대 활동가분들과 함께 방문하게 되었다. 서울에서는 여러가지 활동과 집회에 참여도 했지만 팽목항을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그 즈음  여러가지 개인적인 사정으로 마음에만 담아두게 되었던 곳 팽목항. 기다림의등대, 기억의 벽, 노란리본, 바다.... 우리 아이들 가족... 우리들의 아픈 기억을... 흔적이 지워지지 않게 유가족 분들이 돌아가며 일상과 함께 지켜내고 있는 곳. 그렇게 11년이 넘게 흘렀고 아직도 우리가 진실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시작점. 진도 팽목항.

팽목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식사를 준비중이신  가족분들과 제주에서 다섯번째 팽목기억캠프를 함께 하려고 올라와 준 세제모 학생들이 10명쯤 그리고 저녁 공연을 준비 중인 여러 출연자 분들이 계셨다. 추모동에서 아이들과 인사를 하고 짐을 풀고 안내사항을 듣고 팽목항 주변을 둘러보았다. 팽목항은 기억 강당, 식당, 성당, 그리고 간이 화장실. 이렇게 컨테이너 5개동이 띄엄띄엄 자리 잡고 있었다. 다른 시설들도 많이 낡고 있었지만 화장실은 5분거리 터미널을 이용하는 게  편하다고 안내해 주실 정도로 겨울에는 씻기 힘들 정로 추울 것 같았다. 이렇게 10여 년의 세월을 지켜내고 버텨낸 유가족과 연대해주신 분들 생각에 울컥했다. 

제일 처음 보게된 기억관에서 묵념을 하고 아이들 한명 한명 이름을 마음으로 부르며 인사를 대신했다. 기억관이라고 해봤자 아이들 사진, 아이들 이름이 새겨진 손바닥만한 나무배 종이배, 노란 리본들 전국에서 보내 온 추모의 글과 그림, 노란리본들 추모할 수 있는 작은 모형들...이 전부이지만.. 모든 움직임 하나하나가 느껴져 그냥 마음이 따끔거렸다. 인사 후 강당에 짐을 풀고 나오며 신발을 신는데 저녁식사를 준비중인 식당이 보였다. 파랑 바탕에 노랑 고래와 노란풍등 아이들이 그려진 벽 가운데 창문으로 삐쭉 고개를 내민 연통에는 연기가 모락목락 피어 나오고 있었다. 함께 기억해준다는 것만으로 고마워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유가족 분들의 마음이 느껴져서 10여 년의 세월이 야속했다. 식당으로 들어가서 약 50인분의 저녁식사를 준비하시느라 정신없이 바쁜  유가족분들께 인사를 하고 혹시 손이 모자라지 않을까 괜한 질문도 해보다 방해만 될꺼 같아 나왔다. 세종에서 오신 활동가분들 틈에 끼어서 기억의등대로 갔다. 

비가 잦아들 즈음 카페를 나와 저녁을 먹으러 식당으로 향했다. 제주에서 온 세제모(세월호를 기억하는 제주청소년모임) 학생들이 공연을 준비로 먼저 식사를 하고 있어서 다시 잠시 틈이 생겼다. 그때 강당에서는 농협은행 직원 여성모임에서 오신 오카리나 공연팀이 연습을 하고 계셨는데 오카리나 소리가 울려펴지는 소리에 바다를 보고 있자니 언젠가 세월호 안전교육 강의를 들으러 갔을때 보게된 학교에서 웃고 떠들던 아이들의 모습이 생각났다. 교복치마에 체육복 바지를 입고 티없이 웃던 아이들 체육복과 교복을 입고 장난치던 아이들.... 그렇게 문득 우리 아이들이 명예졸업장을 받았다는 것이 다시 생각이 나니 바다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원망스런 마음이 들었다. 바다를 원망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10여년의 세월, 아이들의 기억을 잊혀지지 않게 하기위해 치열하게 지켜낸 유가족 분들이 더 지치지 않게 함께하는 것이 앞으로 우리가 해야하는 일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저녁을 먹으러 식당으로 들어오라고 하셔서 들어간 식당에는 뷔페가 차려져 있었다. 정성을 다해 준비해주신 맛있는 저녁을 감사히 먹고 공연을 보러 강당으로 이동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제주에서 온 세제모 학생들의 군무시간. 너무 열심히 마음을다 해 추고 있다는 순수함이 느껴진 순간 제주로 향하는 배를 기다리며 수학여행 장기자랑을 몰래 준비했을 아이들이 모습이 생각났다. 세제모학생들 사이사이 함께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눈물이 나서 누군가와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추스려가는 마음에 커져가는 그리움에 혹시나 내 눈물이 또다시 작은 상처가 되지는 않을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중에 보니 나만 눈물이 난 게 아니라서 다행이라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전통 풍물놀이. 우리네 아픈역사 5월의 노래를 4월의 노래로 개사해서 불러주신 광주에서 활동하신다는 남녀듀오 박성언밴드, 마음을 토닥여주시는 듯한 진도 농협은행 여성회 오카리나연주와 노래, 안산에서 예술활동을 하시는 내외분 오늘 팽목항을 지켜주시고 캠프를 준비해주신 유가족분들 우리는 그렇게  한 마음으로 공연을 지켜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알아가고 같은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온전한 진실 생명존중 안전한 나라를 향해. 

다음날 아침, 따뜻한 아침을 마치고 서둘러 세월호 선체가 인양되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준비했다. 

서울로 올라가는 시간만 최소 5시간이기에 여유가 없었다. 좀 더 이야기 나누고 함께 시간을 나누었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괜시리 민폐만 끼치고 가는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도 가족분들은 떠나는 우리에게 '기억해줘서 고맙다'며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해 하시는거 같았다. 돌아오는 버스에 오르기 전에 여러 말 대신 긴시간 포옹을 했다. 말을 꺼내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렇게 고향을 떠나는 가족을 보내는 것처럼 끝까지 배웅을 해주셨다. 내년에 또 오겠다는 말을 뒤로하고 그렇게 헤어졌다

버스를 타고 30분쯤 달렸을까 세월호가 보였다. 버스에 내려서 신분증 검사를 하고 안전모를 받아 쓰고 세월호 앞으로 갔다. 세월호를 둘러보며 지금까지 여기 있는 이유와 사고 당시 선체 모습이 왜 그런 모습이 되었는지 여러가지 실험들을 한 이야기를 자세히 안내해주셨다. 안전상의 문제로 지금은 내부 출입을 막고 있어서 아이들이 있었던 내부는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화면으로 대신 해야 했지만 차후 보수 작업을 통해 일부라도 공개 예정이라고 하셨다. 바다에 있어 부식도 있고 바람으로 인한 선체 손상도 있었고 초기 대처의 미흡으로 중요한 증거 물품이 보존되지 못하는 아쉬움이 이었지만 세월호는 우리 후손들에게 꼭 알리고 기억해야 하는 참사이므로 하루 빨리 복원되어 공개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바라보고 있자니 답답하고 아픈 마음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응어리들이 올라왔다... 단 하나의 질문. 그들은 왜 구하지 않았는지..... 우리가 잊지 않고 안전과 생명존중에 대한 진실을 계속해서 외쳐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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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시는 이런 상처들을 반복하면 안 된다고 외치지만 아직 그들은 진실조차 밝히고 사과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채 또 다시 참사는 반복됐고, 세월호 가족분들은 그분들과 손을 잡고 다시 이겨내는 싸움을 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익숙해지는 아픔도 익숙해지는 그리움이란 없다. 참아내는거다. 그만큼 상처는 깊어지고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 지쳐가는 마음들을 함께 나누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더 힘을 내야겠다. 

유가족분들은 그 아픔과 고통으로 생명안전과 진실규명을 위한 처절한 싸움으로 대한민국의 안전과 생명이라는 근본적인 바탕을 만드는데 모든 힘을 쏟아내셨다.  그래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는 오히려 내가 치유를 받고 배우고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한번 이런 자리를 기획하고 지켜내주시는 모든 분들께 두손 모아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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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지금까지 유가족 몇 분 그리고 친한 사람 몇 명에게만 털어 놓은 꿈 이야기가 있다. 이상하게 생각하는 분들고 계실 것 같아서...  울고 계시거나 눈물을 참고 계시는 유가족분들을 느껴질 때 아이들은 분명 잘 지내고 있을 것이라며 그날 내가 꾸었던 꿈 이야기를 해드린다. 안전교육센터에서 한 분, 집회장소에서 한 분, 그리고 팽목항에서 한 분, 이렇게 세 분이었다. 

세월호참사 발생 당일 나는 집에서 자고 있었는데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가라앉은 배가 머리쪽 갑판판 내놓은 채 불꽃놀이 같은 것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 그 배에 있던 사람들은 너무도 평온해 보였고 불꽃들은 힘차게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 '신기하네 가라앉는 배인데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두려움없이 평온하게 불꽃을 바라보고 있지' 참 희안한 꿈이라고 생각하며 방문을 열었는데 뉴스에서 세월호참사 소식을 전하고 있었고, 그때는 당연히 대부분의 사람들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당연히...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기에... 그래서 큰 걱정 없이 일상을 이어갔던 생각이 난다. 그러나 이어지는 소식들은 대한민국 국민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점점 꿈 생각이 났고 나는 다시 뉴스를 접했을 때 배 안에 창문을 바라보고 있던 아이들의 모습을 보았고 각인되었다.

세월호를 이야기 할 때 우리 아이들에 관한 희생자분들에 관한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말들은 목에 잠겨 나오지 않았고 왜 구하지 않았나? 그들은 인간으로써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가에 대한 질문이 모든 말을 대신했다. 왜? 도대체 왜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이다지도 긴 세월 아픔 속에 잠겨 그리움에 지치게 하는지 ...

그리고 11월8일 진도로 내려가던 중 버스에서 핸드폰을 보고 있던 중에 갑자기 마음이 아파서 고개를 들어보니 바다가 보였다. 그때 나는 한번 더 믿었다. 아이들이 잘 지내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