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닮은 사람[16일의 편지-2025년 11월] 맞는 친구를 구해주던 소년 - 최헌국 목사를 만나다

2025-11-16

맞는 친구를 구해주던 소년

최헌국 목사를 만나다

김우


세종호텔 노조 고공 농성장에 가면 최헌국 목사를 만날 수 있다. 민주 노조 조합원들이 해고된 4년 전부터 매주 목요 집회에 참석했고, 고진수 지부장이 고공에 오른 후부터는 거의 매일 같이 저녁 행사와 선전전에 참여하고 있다. 

‘해결되지 않은 현장’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는 최 목사. 농성자가 오른 도로 시설 구조물 위로 경찰과 마찰 없이 물품을 올리는 것도 최 목사의 몫이다. 경찰이 일정 부분 협조를 잘해주고 있대서, 경찰과 친하냐고 물었다.

“예전부터 나를 아니까. 얘네들도 (내가) 하면 한다는 양반이라고 아니까. 자기네도 인정한다고 할까.”

“잡아가도 겁 없이 하니까. 잡혀갈 때도 귀찮게 하니까. 유치장에 가도 불복종 운동을 하고.”

“세월호 때 청와대 정문도 올라가고 그랬거든. 합리적으로 얘기하는데도 안 들어주면 자기네들 당황하게 만드니까, 협조하는 게 낫다고 판단하는 거지.”

잡혀간 이력이 많아서 그 과정에서 경찰이 최 목사에 관해 파악했다는 얘기다. ‘안 들어주면 받아버리고’ 하니까, 재판받으면서도 ‘끝까지 당사자들에게 책임을 물리고’ 하니까 귀찮아서라도 최 목사가 현장에서 하는 요구를 들어준다는 것이다. 

“광우병, 용산, 쌍차 때까진 무조건 잡아갔지. 세월호 때부터 시간도 좀 지나고 얼마큼 또 알고 지네들 도와준 것도 있고.”

한편으론 경찰들이 최 목사에게 받은 도움도 있어서 ‘보은’의 차원으로 협조하는 것도 있다는 설명이었다. 집회에서 시민들에게 뺏긴 무전기나 카메라를 최 목사가 돌려준 일이 그것이다. 국민 세금으로 다시 사게 하느니 돌려주는 게 낫고, 우리가 싸울 대상은 일선보다는 윗선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최 목사는 고등학교 때부터 목사가 될 결심을 했다. 예전부터 사회사업가가 돼서 어려운 사람들 돕고 싶은 마음이 컸다. 맞고 있는 친구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보호해 주었다. 

“중3 말 때 교회에 열심히 다니다가 고2 때 소명을 받았어요. 계시받는다는 건 아니고, 마음속에 와 닿았다는 얘기죠.”

“어려운 친구를 돕는 측면에서, 의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 속에서, 그런 삶의 연장으로 선택한 거죠.”

최 목사는 보수적 신앙 기반의 신학대에서 따로 의식화 교육을 받은 적이 없지만 ‘성서의 가르침 속에서 자연스럽게’ ‘자발적인 운동권’이 됐다. 

“어릴 때부터 반동 기질이 있었어요.”

“데모가 성행할 땐 고등학교 때도 근처 대학생들과 가투(거리 투쟁)도 나가고, 역사 현장에 일찍 눈이 뜨였죠. 사회과학 공부하면서 광주에 대해서 신학적 관점으로 바라보게 됐고요.” 

“침례신학대에서 운동권 1호라는 얘기를 들었죠.”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라고 시켜도 발표하지 않았고, ‘국기에 대한 경례’도 하지 않았고, 군사 문화인 교련 시간도 좋아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광주민중항쟁을 알았고, 그 광주가 목회자의 길을 걸어가는데 기초가 됐다. 대학교 3학년 때 광주민중항쟁 추모 기도회를 열었고, 학생회 부활의 시기에는 학생회를 만들었다. 

 

89년부터 목회를 시작했다. 안양에서 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 활동을 하며 중앙보다는 지역에서 활동했다. 97년엔 공동체 복지 목회를 꿈꾸며 시골에서 5년간 농사지으며 노력하기도 했다. 

“실패 아닌 실패였어요. 자립형으로 하려다가 가지고 있는 돈 다 말아먹었죠.” 

서울의 일반 교회에서 목회하다가 ‘갖고 있는 생각의 목회를 못 해서’ 2007년 사임했다. 예수 살기 만들기에 실무자로 들어가 2008년에 ‘예수 살기’를 만들었다. ‘아닌 것은 아닌데 누구 하나 말하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에 편중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기독 운동의 정립이 필요해서였다.

이명박 정권이 국정을 파행적으로 운영하던 시기, 광우병 집회에서 여고생이 잡혀갔다는 소식에 화가 나서 서대문 경찰서를 찾아간 것이 시민사회단체 현안에 나서게 된 계기였다. 경찰서를 찾아가 학생들을 풀어낸 것에서 겹치는, 최 목사의 일화가 있다. 대학 시절 교칙을 어기고 담배를 피워 징계를 맞게 된 학우를 도운 일인데, 유명 목회자가 골초였던 비유를 들어 학교 측을 설파했다. 맞는 친구는 구해 주고, 궁지에 몰린 친구는 도와주던 모습이 내내 이어져서 잡힌 사람 풀어주는, 약자의 대변인, 예수의 대리인이 되어 살아가는 삶이다. 광우병, 용산참사, 쌍용자동차, 4대강, 제주 강정 해군기지, 밀양 송전탑, 한진중공업, 하이디스, 파인텍, 재능교육,... 크고 작은 현장과 현안에 늘 함께한 최 목사였다.


“백골단 패대기치고 도망가고. 용산 때까진 괜찮았어요. 기동대도 뛰어넘고, 몸으로 버티며 막고. 무슨 운동 했냐고 사람들이 물을 정도였거든요.”

“굶기도 잘하고 먹기도 잘하고 크게 아픈 적이나 쓰러진 적은 없어요. 용산 단식 이후 당뇨가 왔는데 불규칙한 생활에 그게 잡히지 않네요.”

여러 현장에 연대하며 단식을 한 기간을 합치면 총 120일 정도나 된다. 

“워낙 강골인데 아무래도 그 여파가 있겠죠.”

요즘은 갑상선 결절이 왔다. 가장 안타까운 건 4.16합창단에 결합하지 못하는 거다. 몇 개월 참여하지 못하다가 두어 달 합류했는데 최근 다시 안 좋아져서 지지난 주부터 내내 불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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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된 아이들을 그리워하며 노래로 함께

“(4.16)연대 큰 행사엔 빠지지 않고 참석해요.”

최 목사는 4.16연대 운영위원이기도 하다. 한 달에 한 번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피케팅을 하고, 기억문화제와 세월호 기도회에도 참여한다. 꾸준하고 한결같은 행보다. 다른 세상을 꿈꾸는 밥차 ‘밥통’에서 배식 연대를 하기도 하는데 ‘나도 밥차를 꾸려보고 싶다’라는 희망이 있다. 

“남의 돈 자꾸 당겨서 어려운 사람 도와달라고 해왔는데, 또 밥차 (만들도록) 도와달라고 계속하기도 어렵고. 모금하고 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래도 여력이 생기면, 기회가 생기면 밥차나 까페차 하면서 뒤에서 작으나마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요. 나이도 있고, 몸도 그렇고 하니까.”

옆지기는 ‘지금 밥도 제대로 못 먹으면서 여전히 어떻게 하면 남을 도울 수 있을지 이런 생각만 하고 있다’라며 웃으며 짚어주기도 한다. ‘나도 힘들어. 가까운 데 있는 힘든 사람부터 챙겨줘~’라고 말하면서도 곁에서 묵묵히 지원해 주는 사람도 바로 옆지기다.


길게 바라보고 한길을 걸어온 삶. 최 목사는 세월호참사의 진상규명도 길게 가져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놓지 않고 가면서 끊임없이 노력하면 언젠가는 풀어낼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최 목사는 생명안전에 대한 사회의 어젠다를 바꾼 것이 세월호참사이고 피해자와 연대 시민의 활동이었다고 진단한다. 광주 5.18에서 예수의 정신을 보았듯이, 개발과 성장에서 생명과 안전으로 한국 사회의 전환을 가져온 세월호참사를 십자가 정신의 틀로, 역사적 관점으로 바라본다. 이 문제의 해결이야말로 한국 사회 기독교에서 예수의 부활을 바라볼 수 있는 일이라고 여긴다.  

최 목사는 ‘암울한 역사가 반복되고 십자가의 사건들이 계속 일어나는 것에 빚진 자의 마음’이 들곤 한다. ‘내가 잘못한 건 아니지만 나도 책임을 못 해서 한국 사회에서 그런 일어난 거’라는 책임감, 공동체성의 죄성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세월호참사의 해결은 피해자 중심으로 바라보는 것이 핵심이며, 피해자들의 상처가 완전히 치유 될 수는 없다고 해도 같이하는 사람들이 옆에 있으므로 일정 부분 치유될 수 있다고 믿으며 곁을 지키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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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않겠다는 기억•약속•책임! 진상규명 그날까지

“우리 아들이 제가 쓴 글을 내주면 좋고, 안 내주면 말고.”

최 목사는 세월호 관련해서 회고록을 쓰려고 메모하고 있는데, 이러한 기록도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다. 밥차 혹은 밥차를 따라다니는 까페차도 ‘우리 아들의 후원’이 있으면 시도해 보겠다는 최 목사. 평생 내 곳간에 무언가를 채우는 일은 게을리하고, 퍼주고 끌어다 나눠주는 일에만 열심이었던 최 목사가 그래도 ‘우리 아들’은 조금은 돈을 벌었으면 하는 욕심이 있는 것인데 바로 후원의 정신을 실현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