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
4.16연대 방형민 회원 인터뷰
김 우
방형민 회원은 세월호참사 당시에도 밤에 일하고, 낮에는 자는 대리운전기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참사 당일날도 전원 구조했다, 아니다 하는 애매한 시점에 상황을 접했다. 처음에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했던 일은 컴퓨터를 켜서 아프리카TV에 접속하는 거였다. 이거 조금 이상하다 싶고 정확한 내용을 알고 싶어서였다. 화면을 보며 망연자실했다. 제일 처음에 느낀 거는 무력감 같은 거였다. 거리로 따져도 너무 멀리 있는 상황이었고, 개인이 도움을 주기에는 너무나도 엄청난 일로 다가왔다. 온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그때부터 소위 말하는 일상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거기서 눈을 떼지 못하겠더라고요.”
밥을 먹는지 잠을 자는지도 모르게 화면 앞에서만 앉아 있었다. 지쳐서 쓰러져 잠들고, 일어나면 새 소식이 있는지 쳐다보았다. 팩트TV 채팅 상에서 성토하다가 ‘키보드 두들기는 게 무슨 소용인가 행동해야 한다’고 조금씩 각성했다.
“아무것도 못 하고 철철 울기만 하는 나 자신이 한심하더라고요.”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 무렵 집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우리 여기 나가자' 독려하며 사람들을 모아 집회에 참석했다. 거리에 나온 것의 처음이었다.
“답답하고 그래서 거기를 가보고 싶더라고요. 진도를.”
팩트TV 실시간 채팅방에서 누가 간다고 하길래 댓글 달고 연락해서 차를 얻어 타고 갔다 오기도 했다.
"닥치는 대로 이거 쫓아가고 저거 했어요. ‘계획 속에 차근차근’은 아니었어요.”

사진 1. 11년 전 5월 10일
형민 님은 세월호 활동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사회 부조리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조금씩 깨어났다. 침묵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성격 내지는 삶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다.
“‘이러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구나.’ 세월호참사에서 수많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겪었잖아요.”
“점점 문제 제기하고 파이팅 하며 파이터로 살아가게 된 그런 느낌이에요.”
잘못된 거 보면 잘 안 넘어가는 성격으로 변했다. 원래는 내성적이고 남들 앞에서 자기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는 편이 아니었다. 한쪽 눈의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 위축되고 주눅 든 성장기를 보냈다. 학창 시절 대부분의 급우는 형민 님을 투명 인간 혹은 그림자 취급했다.
“시선이 나 자신에게 갇히고. 남을 돌아볼 여유는 없었어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한 계기는 대학에 입학해서 교정에 걸린 광주 희생자들의 처참한 사진을 보면서 받은 충격이었다.
“내가 왜 이거를 20살이 되도록 전혀 모를 수가 있었지. 속은 느낌이었어요. 세상이 날 속이고 있었구나.”
그렇다고 학생운동을 열심히 하진 못했다. 삶의 패턴은 학교, 집, 교회였다. 착실함과 치열함이라는 의외의 만남은 세월호참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세월호 활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착실한 기독교도인 형민 님이, 반대로 신앙 활동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치열하게 416운동을 하는 형민 님이 낯설고 생경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진 2. 부평 서명대 활동
“전에 사회운동을 해본 적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일머리 없이 나와서 좌충우돌했죠.”
“내 삶보다는 활동이 전부였던 기간이 짧지는 않아요. 하지만 후회되지도 않아요.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지만, 몸을 대고 마음을 쏟아부었던 것이요.”
자신을 ‘내던진’ 이유는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어서, 뭐라도 하고 싶어서였다. 안 했으면 더 괴로웠을 테니 후회는 없다. 대신 ‘좀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아쉬움은 크다.
“앞으로 더 잘하면 되는 거 아녜요?”
“활동과 관련해서 적극적으로 일을 안 한 지 몇 년 됐어요.”
지금은 세월호참사 진상규명과 관련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지는 못하다. 하지만 활동의 흐름만큼은 지켜보고 있다.

사진 3. 광화문 서명대 활동
4.16연대가 여러 가지 내홍을 거치며 비대위를 구성한 시기에 ‘조금 더 정당한 지위에서 발언하고 싶어서’ 회원으로 가입한 형민 님이 꼬박꼬박 회비를 내는 이유를 물었다.
“글쎄요. 세월호 싸움을 내가 안 하더라도 누군가는 해야 하는 것이고, 4.16연대가 그 주체 중 하나니까요. 내가 안 한다고 남이 못 하게 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생각해서예요.”
연대의 손을 잡고 가는 이들과 나누고픈 한마디를 물었다.
“‘왜’라는 질문을 우리는 계속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 침몰했는지, 왜 구조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답을 단기간에 얻을 순 없겠지만요. 쉽진 않지만, 포기하는 순간 4.16연대의 존재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예단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은 경계해야 하고요. 침몰 원인도 내인설과 외력설 어느 하나로 예단하는 일 없이 가야죠. 우리는 아직 진실을 알지 못하니까요.”
형민 님이 활동할 때 견지했던 것 중 하나는 불가근불가원 입장이었다. 세월호 가족과는 페이스북에서 친구맺기조차 하지 않았다. 소원하다 느낄 수 있음을 감수하면서도 그리했던 것은 과도하게 끈끈한 관계를 맺기보다 진상 규명이라는 한 방향을 바라보면 족하다고 생각해서였다. 반가움이나 공감은 필수지만 말이다. 함께 바라봐야 하는 것을 가리는 왜곡의 관계를 경계하느라 그랬다는 형민 님의 말에서 ‘사랑은 서로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라는 문구를 떠올렸다. 같은 꿈을 꾸고 함께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동반자로 다시 함께 설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형민 님 활동의 시작에 계기가 있었고, 중단에도 계기가 있었듯이 활동 재개 계기 역시 주어질 거라 믿는 마음이 들어서였다. 형민 님이 따르는 교리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을 너무 귀하게 여기셔서 그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하나뿐인 아들을 인간에게 보내셨다. 그런 생명이 304개나 사라진 사건에 그 이유를 묻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형민 님에게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의 간절함이 있으니, 형민 님은 포기보다 명확한 목표 의식 속에 끈기를 선택하는 사람이니 분명 그리할 것만 같다.

사진 4. 진상규명이 없다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
4.16연대 방형민 회원 인터뷰
김 우
방형민 회원은 세월호참사 당시에도 밤에 일하고, 낮에는 자는 대리운전기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참사 당일날도 전원 구조했다, 아니다 하는 애매한 시점에 상황을 접했다. 처음에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했던 일은 컴퓨터를 켜서 아프리카TV에 접속하는 거였다. 이거 조금 이상하다 싶고 정확한 내용을 알고 싶어서였다. 화면을 보며 망연자실했다. 제일 처음에 느낀 거는 무력감 같은 거였다. 거리로 따져도 너무 멀리 있는 상황이었고, 개인이 도움을 주기에는 너무나도 엄청난 일로 다가왔다. 온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그때부터 소위 말하는 일상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거기서 눈을 떼지 못하겠더라고요.”
밥을 먹는지 잠을 자는지도 모르게 화면 앞에서만 앉아 있었다. 지쳐서 쓰러져 잠들고, 일어나면 새 소식이 있는지 쳐다보았다. 팩트TV 채팅 상에서 성토하다가 ‘키보드 두들기는 게 무슨 소용인가 행동해야 한다’고 조금씩 각성했다.
“아무것도 못 하고 철철 울기만 하는 나 자신이 한심하더라고요.”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 무렵 집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우리 여기 나가자' 독려하며 사람들을 모아 집회에 참석했다. 거리에 나온 것의 처음이었다.
“답답하고 그래서 거기를 가보고 싶더라고요. 진도를.”
팩트TV 실시간 채팅방에서 누가 간다고 하길래 댓글 달고 연락해서 차를 얻어 타고 갔다 오기도 했다.
"닥치는 대로 이거 쫓아가고 저거 했어요. ‘계획 속에 차근차근’은 아니었어요.”
사진 1. 11년 전 5월 10일
형민 님은 세월호 활동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사회 부조리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조금씩 깨어났다. 침묵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성격 내지는 삶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다.
“‘이러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구나.’ 세월호참사에서 수많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겪었잖아요.”
“점점 문제 제기하고 파이팅 하며 파이터로 살아가게 된 그런 느낌이에요.”
잘못된 거 보면 잘 안 넘어가는 성격으로 변했다. 원래는 내성적이고 남들 앞에서 자기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는 편이 아니었다. 한쪽 눈의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 위축되고 주눅 든 성장기를 보냈다. 학창 시절 대부분의 급우는 형민 님을 투명 인간 혹은 그림자 취급했다.
“시선이 나 자신에게 갇히고. 남을 돌아볼 여유는 없었어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한 계기는 대학에 입학해서 교정에 걸린 광주 희생자들의 처참한 사진을 보면서 받은 충격이었다.
“내가 왜 이거를 20살이 되도록 전혀 모를 수가 있었지. 속은 느낌이었어요. 세상이 날 속이고 있었구나.”
그렇다고 학생운동을 열심히 하진 못했다. 삶의 패턴은 학교, 집, 교회였다. 착실함과 치열함이라는 의외의 만남은 세월호참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세월호 활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착실한 기독교도인 형민 님이, 반대로 신앙 활동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치열하게 416운동을 하는 형민 님이 낯설고 생경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진 2. 부평 서명대 활동
“전에 사회운동을 해본 적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일머리 없이 나와서 좌충우돌했죠.”
“내 삶보다는 활동이 전부였던 기간이 짧지는 않아요. 하지만 후회되지도 않아요.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지만, 몸을 대고 마음을 쏟아부었던 것이요.”
자신을 ‘내던진’ 이유는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어서, 뭐라도 하고 싶어서였다. 안 했으면 더 괴로웠을 테니 후회는 없다. 대신 ‘좀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아쉬움은 크다.
“앞으로 더 잘하면 되는 거 아녜요?”
“활동과 관련해서 적극적으로 일을 안 한 지 몇 년 됐어요.”
지금은 세월호참사 진상규명과 관련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지는 못하다. 하지만 활동의 흐름만큼은 지켜보고 있다.
사진 3. 광화문 서명대 활동
4.16연대가 여러 가지 내홍을 거치며 비대위를 구성한 시기에 ‘조금 더 정당한 지위에서 발언하고 싶어서’ 회원으로 가입한 형민 님이 꼬박꼬박 회비를 내는 이유를 물었다.
“글쎄요. 세월호 싸움을 내가 안 하더라도 누군가는 해야 하는 것이고, 4.16연대가 그 주체 중 하나니까요. 내가 안 한다고 남이 못 하게 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생각해서예요.”
연대의 손을 잡고 가는 이들과 나누고픈 한마디를 물었다.
“‘왜’라는 질문을 우리는 계속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 침몰했는지, 왜 구조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답을 단기간에 얻을 순 없겠지만요. 쉽진 않지만, 포기하는 순간 4.16연대의 존재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예단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은 경계해야 하고요. 침몰 원인도 내인설과 외력설 어느 하나로 예단하는 일 없이 가야죠. 우리는 아직 진실을 알지 못하니까요.”
형민 님이 활동할 때 견지했던 것 중 하나는 불가근불가원 입장이었다. 세월호 가족과는 페이스북에서 친구맺기조차 하지 않았다. 소원하다 느낄 수 있음을 감수하면서도 그리했던 것은 과도하게 끈끈한 관계를 맺기보다 진상 규명이라는 한 방향을 바라보면 족하다고 생각해서였다. 반가움이나 공감은 필수지만 말이다. 함께 바라봐야 하는 것을 가리는 왜곡의 관계를 경계하느라 그랬다는 형민 님의 말에서 ‘사랑은 서로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라는 문구를 떠올렸다. 같은 꿈을 꾸고 함께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동반자로 다시 함께 설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형민 님 활동의 시작에 계기가 있었고, 중단에도 계기가 있었듯이 활동 재개 계기 역시 주어질 거라 믿는 마음이 들어서였다. 형민 님이 따르는 교리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을 너무 귀하게 여기셔서 그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하나뿐인 아들을 인간에게 보내셨다. 그런 생명이 304개나 사라진 사건에 그 이유를 묻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형민 님에게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의 간절함이 있으니, 형민 님은 포기보다 명확한 목표 의식 속에 끈기를 선택하는 사람이니 분명 그리할 것만 같다.
사진 4. 진상규명이 없다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