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다니고 숨 쉬는 거 빼고 제일 오래 한 일인 거 같아요
-박찬수 회원 인터뷰
김 우
“전 기억관 기억지기가 아니에요.”
세월호 제주기억관(이하 기억관) 기억지기로 소개받았는데 자신은 한사코 기억지기가 아니라는 박찬수 회원이다. 물론 가장 많이 기억관을 지키는 이는 바로 옆 공간인 제주평화쉼터에 기거하며 기억관을 돌보는 박은영 님이다. 하지만 365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방문객을 받는 기억관이 단 한 명으로 운영될 수는 없는 일이다. 박찬수 회원 말대로 ‘왔다갔다하면서 수시로 대신할 사람’, ‘급박한 상황에 대타가 돼 줄 사람’, 주말 등에 정기적으로 함께 지켜갈 사람은 필수다. 볍씨학교, 동백작은학교, 보물섬학교 등 대안학교의 학생들 포함해서 30명 정도가 모오두~ 기억관의 기억지기인 셈이다. ‘직장인이기 때문에 현재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라며 단지 ‘기억지기 대리일 뿐’이라는 박 회원이지만 말이다.
기억관에선 세월호참사 관련 여러 설명도 하고 416공방 제품 구매 안내도 돕는다. 공방 제품이 ‘어머님 아버님이 10년 넘게 만들어 온 거라 달인과 장인의 경지’로 만든 작품이라는 박 회원의 말에 마음이 먹먹해졌다. 나도 기억관에서 한 올 한 올 짱짱하게 매듭지은 노란리본 나비브로치며 노란리본 동백브로치를 구매한 적이 있고, 물집이 생겼다 터지며 굳은살 가득한 416공방 엄마들의 손가락을 마주한 시간도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 노래 듣고 있으면 감정이입이 많이 돼서 많이 슬퍼요.”
“세월호를 설명하다 제가 울었어요. 방문하신 분이 저를 안아주고 갔어요. 토닥토닥 해주고 가셨어요.”
“설명 듣다가 눈물 흘리는 분도 계셔요. 제가 설명을 잘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기억하면서 사람의 마음, 부모의 마음을 가지고들 있으니.”
해서 기억관엔 노란리본, 노란팔찌, 스티커 등 나눔 용품 외에도 416가족협의회에서 지원한 휴지가 상시 비치돼 있기도 하다.
기억관은 카페며 식당이며 책방이며 세월호 리본 나눔터 160군데 정도와 연계한 활동도 한다. 박 회원은 리본을 만들어서 그곳에 세월호 관련 책자와 같이 가져다 놓는 일도 맡고 있다. 세월호참사 10주기 때는 리본 나눔터 중 다섯 군데를 선정해서 ‘작은 기억관’을 마련했다. 정성을 들여 큼직한 진열장을 꾸미고 스탬프 투어를 진행해 방문자에게 선물로 세월호 손수건을 나누기도 했다. 박 회원은 작은 기억관은 기억관의 분점 혹은 지소 느낌이라며 기억관이 출장이라도 나간 듯 기억의 거점이 확대된 거 같다고 뿌듯해했다. 자원 활동의 품 외에 비용이 들어가는 사업은 어떻게 진행하는지 물었더니 바로 답이 돌아온다.
“신 대표가 그런 걸 잘해요. 후원이나 사업 선정을 받거나 지원을 받아서 기가 막히게 잘합니다. 지금은 세월호 컵을 만드는 사업을 기획하고 있고요.”
“제주는 박은영 선생님, 진도는 김나나 선생님이 담당하고 있어요. 진도에서도 리본 나눔터를 만들고 있는데 현재 2곳이에요.”
자신의 역할은 낮추고, 신동훈 대표며 다른 운영위원의 활약을 칭찬하기 바쁜 박 회원이다.
박 회원과 인터뷰 중 가장 인상 깊은 이야기가 있다. 세월호 활동 중엔 술을 아예 안 마신다는 거였다. 성인병으로 각종 약을 달고 사는 건 사실이지만, 회사 일로 영업하는 때 등 다른 자리에서는 잘 마신다는 거였다.
“사람들 만나고 모이고 밤늦게 움직이는데 누군가 운전을 해야 하잖아요. 몸 아프단 핑계로 안 먹고 사람들 얘기 들어주는 편이에요. 의견을 들어주는 것으로도 상대방하고는 인연이 생기는 거죠. 술 먹으려고 만나 건 아니잖아요?”
술을 좋아하고 잘 마시면서도 술자리에서 술 한 방울 입에 대지 않고, 모두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모두를 다 태워다 주고서야 집에 가는 시간이 힘들지 않다며 ‘원칙 같은 거’라는 박 회원. 쉽지 않은 일을, 짧지 않은 시간, 끈질기게 하고 있는, 세월호 활동가의 특징을 보여주었다.
“학생운동은 안 했어요. 운동이라고 생각하고 하는 게 아니에요. 관심이 있어서 하다 보니까, 사람들 만나고 얘기 듣고 공감하는 부분 생기고 하게 되면, 돕는 거죠.”
지인의 자녀가 단원고 학생이었고 희생자였다. 지인을 가끔 보게 돼도 심정을 물을 수조차 없었다.
“하다 보니 세월호 관련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러저러 엮인 거예요. 발만 담그고 멀리서 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깊게 오래 할 줄 몰랐어요. 직장 다니고 숨 쉬고 빼고 가장 오래 한 거 같아요. 마음이 그쪽으로 가니까 행동이 나오는 게 아닌가 싶어요.”
기억공간이라 불리는 곳에서 리본을 만들어 130군데 돌면서 리본 나눔을 했다. 다른 지역으로 전근했다가 4년 만에 돌아왔는데 기억공간이 사라진 대신 기억관이 생겨나 있었다. 박 회원은 소통과 추모와 기억을 위해 사람들 모이는 장소가 중요하다는 생각인데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아지트가, 구심점이 있는 게 고마울 뿐이었다. ‘다른 사람이 이어서 하는구나’ 여전한 리본나눔 활동 역시 고마울 따름이었다. 당시 300여 곳에 이르던 작은 기억관의 관리를 맡았다. 전부터 했던 활동이기에 중요하게 생각하고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업무가 끝나면 도는 식으로 리본을 배부하고 있다. ‘근처에 살면서 자주 만나야 어떤 일을 같이할 수 있는’ 것인데 같이 활동하던 이들이 많이도 떠났다. 결혼하거나 이사하거나 하면서 떠나기도 했지만 아프거나 이른 나이에 사망하며 먼저 떠나기도 했다. 박 회원은 ‘갈 길은 이렇게 멀고도 험한데 사람들이 이렇게 없어지는구나’ 세월이 슬프고 세상이 야속하기만 하다.
“사람들이 많이 떠나니까, 누군가는 해야 하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하는 거죠.”
“사람이 중요한 거 같아요. 사람들이 의견이 다른 경우라든가 어떤 일을 할 때 갈등이 많이 생기거든요. 잘 푸는 것도 중요하죠.”
“제 생각은 이야기하지 않아요. 생각하는 사람은 많이 있거든요.”
돕는다, 따라간다, 보조한다, 대리한다 등의 말이 박 회원이 자신의 활동을 설명하는 표현이었다. 모든 걸 제가 다 알지는 못 해요, 깊숙이 알지 못해요, 라며 말을 아끼는데 거푸 물으니 ‘깊숙이 알면 더 힘들어지니까 시키는 것만 하자’는 마음이기도 하다며 웃는 박 회원. 박 회원은 회사에서 내년까지 일하고 후년에 명예퇴직할 예정이다. 어떤 일을 할 것인지 결론 내린 것이 없다는 그이가 이후 어떤 일을 할 것인지는 나 역시 모르지만 어떤 활동을 이어갈 지는 짐작이 됐다.
“많은 사람이 생각해야 진실이 빛을 발할 수 있어요. 진실은 많은 사람의 공유로 비롯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아이들 희생을 오래오래 기억해야 세월호의 진실이 드러난다고 생각해요. 알리는 게 중요하죠.”
오래도록 기억하며 많은 이들에게 알리길 멈추지 않는, 지금도 수시로 기억관을 오가는 그이의 퇴직 후 활동이 기대된다.
직장 다니고 숨 쉬는 거 빼고 제일 오래 한 일인 거 같아요
-박찬수 회원 인터뷰
김 우
“전 기억관 기억지기가 아니에요.”
세월호 제주기억관(이하 기억관) 기억지기로 소개받았는데 자신은 한사코 기억지기가 아니라는 박찬수 회원이다. 물론 가장 많이 기억관을 지키는 이는 바로 옆 공간인 제주평화쉼터에 기거하며 기억관을 돌보는 박은영 님이다. 하지만 365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방문객을 받는 기억관이 단 한 명으로 운영될 수는 없는 일이다. 박찬수 회원 말대로 ‘왔다갔다하면서 수시로 대신할 사람’, ‘급박한 상황에 대타가 돼 줄 사람’, 주말 등에 정기적으로 함께 지켜갈 사람은 필수다. 볍씨학교, 동백작은학교, 보물섬학교 등 대안학교의 학생들 포함해서 30명 정도가 모오두~ 기억관의 기억지기인 셈이다. ‘직장인이기 때문에 현재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라며 단지 ‘기억지기 대리일 뿐’이라는 박 회원이지만 말이다.
기억관에선 세월호참사 관련 여러 설명도 하고 416공방 제품 구매 안내도 돕는다. 공방 제품이 ‘어머님 아버님이 10년 넘게 만들어 온 거라 달인과 장인의 경지’로 만든 작품이라는 박 회원의 말에 마음이 먹먹해졌다. 나도 기억관에서 한 올 한 올 짱짱하게 매듭지은 노란리본 나비브로치며 노란리본 동백브로치를 구매한 적이 있고, 물집이 생겼다 터지며 굳은살 가득한 416공방 엄마들의 손가락을 마주한 시간도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 노래 듣고 있으면 감정이입이 많이 돼서 많이 슬퍼요.”
“세월호를 설명하다 제가 울었어요. 방문하신 분이 저를 안아주고 갔어요. 토닥토닥 해주고 가셨어요.”
“설명 듣다가 눈물 흘리는 분도 계셔요. 제가 설명을 잘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기억하면서 사람의 마음, 부모의 마음을 가지고들 있으니.”
해서 기억관엔 노란리본, 노란팔찌, 스티커 등 나눔 용품 외에도 416가족협의회에서 지원한 휴지가 상시 비치돼 있기도 하다.
기억관은 카페며 식당이며 책방이며 세월호 리본 나눔터 160군데 정도와 연계한 활동도 한다. 박 회원은 리본을 만들어서 그곳에 세월호 관련 책자와 같이 가져다 놓는 일도 맡고 있다. 세월호참사 10주기 때는 리본 나눔터 중 다섯 군데를 선정해서 ‘작은 기억관’을 마련했다. 정성을 들여 큼직한 진열장을 꾸미고 스탬프 투어를 진행해 방문자에게 선물로 세월호 손수건을 나누기도 했다. 박 회원은 작은 기억관은 기억관의 분점 혹은 지소 느낌이라며 기억관이 출장이라도 나간 듯 기억의 거점이 확대된 거 같다고 뿌듯해했다. 자원 활동의 품 외에 비용이 들어가는 사업은 어떻게 진행하는지 물었더니 바로 답이 돌아온다.
“신 대표가 그런 걸 잘해요. 후원이나 사업 선정을 받거나 지원을 받아서 기가 막히게 잘합니다. 지금은 세월호 컵을 만드는 사업을 기획하고 있고요.”
“제주는 박은영 선생님, 진도는 김나나 선생님이 담당하고 있어요. 진도에서도 리본 나눔터를 만들고 있는데 현재 2곳이에요.”
자신의 역할은 낮추고, 신동훈 대표며 다른 운영위원의 활약을 칭찬하기 바쁜 박 회원이다.
박 회원과 인터뷰 중 가장 인상 깊은 이야기가 있다. 세월호 활동 중엔 술을 아예 안 마신다는 거였다. 성인병으로 각종 약을 달고 사는 건 사실이지만, 회사 일로 영업하는 때 등 다른 자리에서는 잘 마신다는 거였다.
“사람들 만나고 모이고 밤늦게 움직이는데 누군가 운전을 해야 하잖아요. 몸 아프단 핑계로 안 먹고 사람들 얘기 들어주는 편이에요. 의견을 들어주는 것으로도 상대방하고는 인연이 생기는 거죠. 술 먹으려고 만나 건 아니잖아요?”
술을 좋아하고 잘 마시면서도 술자리에서 술 한 방울 입에 대지 않고, 모두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모두를 다 태워다 주고서야 집에 가는 시간이 힘들지 않다며 ‘원칙 같은 거’라는 박 회원. 쉽지 않은 일을, 짧지 않은 시간, 끈질기게 하고 있는, 세월호 활동가의 특징을 보여주었다.
“학생운동은 안 했어요. 운동이라고 생각하고 하는 게 아니에요. 관심이 있어서 하다 보니까, 사람들 만나고 얘기 듣고 공감하는 부분 생기고 하게 되면, 돕는 거죠.”
지인의 자녀가 단원고 학생이었고 희생자였다. 지인을 가끔 보게 돼도 심정을 물을 수조차 없었다.
“하다 보니 세월호 관련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러저러 엮인 거예요. 발만 담그고 멀리서 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깊게 오래 할 줄 몰랐어요. 직장 다니고 숨 쉬고 빼고 가장 오래 한 거 같아요. 마음이 그쪽으로 가니까 행동이 나오는 게 아닌가 싶어요.”
기억공간이라 불리는 곳에서 리본을 만들어 130군데 돌면서 리본 나눔을 했다. 다른 지역으로 전근했다가 4년 만에 돌아왔는데 기억공간이 사라진 대신 기억관이 생겨나 있었다. 박 회원은 소통과 추모와 기억을 위해 사람들 모이는 장소가 중요하다는 생각인데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아지트가, 구심점이 있는 게 고마울 뿐이었다. ‘다른 사람이 이어서 하는구나’ 여전한 리본나눔 활동 역시 고마울 따름이었다. 당시 300여 곳에 이르던 작은 기억관의 관리를 맡았다. 전부터 했던 활동이기에 중요하게 생각하고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업무가 끝나면 도는 식으로 리본을 배부하고 있다. ‘근처에 살면서 자주 만나야 어떤 일을 같이할 수 있는’ 것인데 같이 활동하던 이들이 많이도 떠났다. 결혼하거나 이사하거나 하면서 떠나기도 했지만 아프거나 이른 나이에 사망하며 먼저 떠나기도 했다. 박 회원은 ‘갈 길은 이렇게 멀고도 험한데 사람들이 이렇게 없어지는구나’ 세월이 슬프고 세상이 야속하기만 하다.
“사람들이 많이 떠나니까, 누군가는 해야 하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하는 거죠.”
“사람이 중요한 거 같아요. 사람들이 의견이 다른 경우라든가 어떤 일을 할 때 갈등이 많이 생기거든요. 잘 푸는 것도 중요하죠.”
“제 생각은 이야기하지 않아요. 생각하는 사람은 많이 있거든요.”
돕는다, 따라간다, 보조한다, 대리한다 등의 말이 박 회원이 자신의 활동을 설명하는 표현이었다. 모든 걸 제가 다 알지는 못 해요, 깊숙이 알지 못해요, 라며 말을 아끼는데 거푸 물으니 ‘깊숙이 알면 더 힘들어지니까 시키는 것만 하자’는 마음이기도 하다며 웃는 박 회원. 박 회원은 회사에서 내년까지 일하고 후년에 명예퇴직할 예정이다. 어떤 일을 할 것인지 결론 내린 것이 없다는 그이가 이후 어떤 일을 할 것인지는 나 역시 모르지만 어떤 활동을 이어갈 지는 짐작이 됐다.
“많은 사람이 생각해야 진실이 빛을 발할 수 있어요. 진실은 많은 사람의 공유로 비롯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아이들 희생을 오래오래 기억해야 세월호의 진실이 드러난다고 생각해요. 알리는 게 중요하죠.”
오래도록 기억하며 많은 이들에게 알리길 멈추지 않는, 지금도 수시로 기억관을 오가는 그이의 퇴직 후 활동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