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날 옆에서 함께 떨어주는 사람들과_문규옥 회원 인터뷰
김 우
<2015년 첫 피켓팅>
문규옥 회원은 군산에 산다. 살맛나는 민생실현연대(이하 민실연)라는 단체의 상근자이고, 세월호군산기억모임(이하 군산기억모임) 활동도 한다.
문 회원은 모태신앙을 가졌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은, 목회자의 사모가 되거나 선교사가 됐어야 마땅한 문 회원이 시민사회단체에서 일하고 있다고 하면 ‘백퍼’ 놀란다. 남편은 종교도 없거니와 운동권이었다. 총학생회장에 나가려 한 걸 알고 일방적으로 휴학계를 낸 부친에 반발해서 바로 공장에 위장 취업한 이력이 있었다. 고무 공장 유독가스에 중독돼서 영안실까지 다녀왔고, 큰 형이며 작은 형이며 유치장 한 번씩은 다녀온 가족력도 있었다.
가족은 물론 이모와 삼촌까지 목회자인 기독교 집안 줄리엣과 운동권 가족 로미오의 로맨스는 문 회원 대학 2학년 때 소개팅으로 시작해서 8년을 이어갔고 결혼에까지 이르렀다. 집안의 교제 반대를 무릅쓰려는 노력도 많이 했을 문 회원이 결혼을 앞두고 상대에게 요구한 건 ‘교회 다니고 담배 끊는 거’였다. 얘기를 듣자마자 바로 담배를 끊고 교회에도 다녔던 남편은 신혼여행을 가자마자 담배를 피웠다. 결혼 전에는 뒤에서 폈던 걸 결혼한 마당엔 앞에서 핀 거였다는 얘기를 웃으며 담담하게 회고하는 문 회원이었다.
“제가 얘기를 잘 못해서요”라고 했지만, 문 회원은 얘기를 재미나게 잘했다. 광고를 보고 도전했던 한 기독교 신문사 기자 생활 얘기도 그랬다. 어렵고 힘든 목회자를 소개하는 문 회원의 기사를 보고 전국은 물론 외국에서까지 답지하는 후원으로 당사자에게 도움이 되는 걸 보며 힘이 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편집장이 지정한 곳으로 가서 겉으로 보여주는 것만 보고, 들려주는 것만 들으며 썼던 기사도 있었음을 성찰하게 됐다.
‘뉴스앤조이’로 옮겨 가면서 “그동안 마음 따듯한 기사만 썼는데 비판 기사 쓰는 곳이니 가지 마라”는 만류에 “가면 얼굴 안 본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래도 갔다. 큰 교회 홍보 역할에 그치거나 교회의 비리와 부패에 제 목소리 내지 못하는 신문사와는 다른 곳이기 때문이었다. ‘목사 죽이는 기자’라며 취재를 막는 대접을 받게 됐지만 후회는 없었다. 새만금 개발 반대 행진이든 미군기지 반대 평화 대행진이든 같이 걸으며 취재하고, 기독교에만 국한하지 않고 4대 종단 종교인과 시민단체의 이야기를 고루 담는 문 기자였다.
이어서 남편의 권유로 민주노동당 군산지역 상근 활동도 했다. 첫 회의에서 위원장이 시지부에 전화해서 한미 에프티에이(FTA) 반대 촛불집회에 쓸 깔판을 빌려달라고 요청했을 때 문 회원은 영화관에 전화했다. 민주노총 군산 ‘시지부’를 ‘시지브이’로 알아들은 거였다. “아무것도 모르던, 학생운동이나 그런 거는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늘 열린 마음으로 스스로를 성찰하는 유형이란 건 짧은 인터뷰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 오늘날 그이의 행보 역시 이질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호군산기억모임의 최근 피켓팅>
문 회원이 상근하는 민실연은 사회적 약자의 불법 금융 피해나 파산면책 등 민생 상담을 하고, 서민의 주거권 확립을 위해 노력하는 단체다. 월 5,000원 약정한 회원이 전체 회원의 80%라니 곳간에서 인심 나는 이들의 모임은 아닌 듯하다. 회원 조직인 달팽이 봉사단은 어려운 이웃에게 100인분이나 되는 반찬과 간식을 만들어 전하는 일을 한다.
“시민이 함께하면서 사회에 관심 가지고 정치에 관심 기울이도록 만들어가는 게 시민단체의 역할이 아닐까요?”
“순수하게 봉사하러 왔다가 세월호 피켓을 들고 그런 사람으로 바뀌셨어요. 저는 가장 자랑하고 싶은 게 그런 거예요. 너무나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서 그분들이 조금씩 조금씩 바뀌면서 지역의 투사가 되고, 활동가가 됐어요.”
20명 남짓 활동하지만, 단톡방엔 100여 명 넘는 이들이 함께하는 달팽이 봉사단의 단장과 간사도 운동을 전혀 모르고 지내던 주부였다. 맨 처음 세월호 피켓팅을 할 때 ‘우리도 부모이기에 잊을 수 없습니다’라는 문구도 모두가 거부감 느끼지 않고 함께 할 수 있을 내용을 고민하면서 내왔다.
문 회원은 민실연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청소년을 모아서 노란 리본을 만드는 시간도 기획했다. 1365 자원봉사 포털에 수요처로 등록하고 자원봉사 점수가 필요한 학생 60~70여 명을 모으곤 했다. 리본 만들기 전엔 세월호 관련 영상을 틀고, 416연대 리플릿을 나누고, 관련 서명을 받았다. 세월호 가족을 초대해서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 듣는 시간도 마련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한번 왔다가 계속 오는 아이들이 많았어요.” 대전에 사는 학생이 군산까지 와서 리본을 만들어 가고, 리본을 만든 학생들은 학교에 가지고 가서 친구들과 선생님들께 나눔하고, 또 학교에서도 만들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진상규명은 아직도 제대로 안 됐잖아요. 누군가는 기억하고, 계속 알려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에요. 세월호참사 당시 6~7세로 모르는 아이도 많거든요. 파헤치고 싸워야 할 사람이 우리 젊은 아이들, 학생들일 수도 있잖아요.”
“아이하고 리본 만들러 왔다가 민실연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분도 많아요. 세월호를 통해서 소중한 분들을 많이 만나고 얻었어요. 물론 (세월호) 부모님들도 그렇지만 일반 시민인데 세월호 활동하면서 만나게 된 거죠.”
조금은 외롭기도 했었다. 다른 시민사회단체들이 3주기 기억식까지만 같이 하겠다고 했을 때가 그랬다. 4주기와 5주기 때는 전교조 선생님과 군산청소년학생연합회가 중심이 돼주었다. 외로움이나 서운함은 꾸준한 활동 뒤 감동으로 바뀌었다. 문 회원이 민실연에서 8주기 기억식을 오롯이 준비해서 다른 시민사회단체를 청했을 때였다.
“많은 현안으로 집중은 못 하지만 마음은 늘 빚진 것처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구나. 저희만 하는 줄 알았는데 정말 많은 분이 와주셨고, ‘다음엔 우리 같이해요’라고 얘기해 주셨어요.”
“9주기, 10주기 때는 함께할 분들을 모아서 같이 진행했고, 그게 세월호군산기억모임이 된 거예요.”
‘민실연이 세월호연대냐’며 세월호참사 연대활동만 한다는 지적질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이제는 지역에서 오래 활동 해온 어르신들부터 ‘민실연’하면 세월호 관련 활동에서는 무조건 인정해 준다.
매주 하던 세월호 피켓팅을 이젠 매달 하고 있지만 거르지 않은 10년이었다. 민실연과 군산기억모임 두 단체 그 가운데에 문 회원이 있다.
“정말 감사해요. 상근자가 혼자인데도 불구하고 정말 행복하게 일을 할 수 있는 게 추운 날 옆에 와서 함께 떨어준 사람이 있어서예요.”
“가장 중요한 게 사람인 거 같아요. 함께 해주는 사람이요.”
버팀목이 돼주는 사람들로 포기하지 않고 계속할 수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란 얘기였다.
“누군가 한 얘긴데요. 이길 거 같아서 싸우는 게 아니고 이길 거 같지 않아도 싸운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함께 기다리고 함께 싸우다 보면 그 싸움을 통해 세상이 조금은 바뀌기 때문이에요. 함께하는 그 힘을 믿어요.”
단단하다, 꾸준하다, 겸손하다, 다양한 회원들의 인터뷰를 하면서 발견하는 교집합이다. 그중 제일은 진정성이다.
“세월호 가족분들한테 미안해요. 타지역의 세월호 활동하는 분들에게도요. 제가 세월호에만 집중할 수 없어서요. 늘 진짜 너무 미안하고 죄송해요. 이번에 ‘바람의 세월’ 상영회를 했는데, 그렇게라도, 조금씩이라도 함께하고 싶어요.”
상영회에선 민실연 회원이 직접 만든 150개의 노란 비누를 참가자들과 나눴다. 비누 포장 안에 같이 담은 건 비단 노란 리본과 세월호 스티커만이 아니었다. 평범한 이들의 마음을 모으고, 서로를 지탱하게 하는 ‘세월호의 힘’이었다.
<코로나 시기에도 쉼이 없던 문규옥 회원>
추운 날 옆에서 함께 떨어주는 사람들과_문규옥 회원 인터뷰
김 우
<2015년 첫 피켓팅>
문규옥 회원은 군산에 산다. 살맛나는 민생실현연대(이하 민실연)라는 단체의 상근자이고, 세월호군산기억모임(이하 군산기억모임) 활동도 한다.
문 회원은 모태신앙을 가졌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은, 목회자의 사모가 되거나 선교사가 됐어야 마땅한 문 회원이 시민사회단체에서 일하고 있다고 하면 ‘백퍼’ 놀란다. 남편은 종교도 없거니와 운동권이었다. 총학생회장에 나가려 한 걸 알고 일방적으로 휴학계를 낸 부친에 반발해서 바로 공장에 위장 취업한 이력이 있었다. 고무 공장 유독가스에 중독돼서 영안실까지 다녀왔고, 큰 형이며 작은 형이며 유치장 한 번씩은 다녀온 가족력도 있었다.
가족은 물론 이모와 삼촌까지 목회자인 기독교 집안 줄리엣과 운동권 가족 로미오의 로맨스는 문 회원 대학 2학년 때 소개팅으로 시작해서 8년을 이어갔고 결혼에까지 이르렀다. 집안의 교제 반대를 무릅쓰려는 노력도 많이 했을 문 회원이 결혼을 앞두고 상대에게 요구한 건 ‘교회 다니고 담배 끊는 거’였다. 얘기를 듣자마자 바로 담배를 끊고 교회에도 다녔던 남편은 신혼여행을 가자마자 담배를 피웠다. 결혼 전에는 뒤에서 폈던 걸 결혼한 마당엔 앞에서 핀 거였다는 얘기를 웃으며 담담하게 회고하는 문 회원이었다.
“제가 얘기를 잘 못해서요”라고 했지만, 문 회원은 얘기를 재미나게 잘했다. 광고를 보고 도전했던 한 기독교 신문사 기자 생활 얘기도 그랬다. 어렵고 힘든 목회자를 소개하는 문 회원의 기사를 보고 전국은 물론 외국에서까지 답지하는 후원으로 당사자에게 도움이 되는 걸 보며 힘이 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편집장이 지정한 곳으로 가서 겉으로 보여주는 것만 보고, 들려주는 것만 들으며 썼던 기사도 있었음을 성찰하게 됐다.
‘뉴스앤조이’로 옮겨 가면서 “그동안 마음 따듯한 기사만 썼는데 비판 기사 쓰는 곳이니 가지 마라”는 만류에 “가면 얼굴 안 본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래도 갔다. 큰 교회 홍보 역할에 그치거나 교회의 비리와 부패에 제 목소리 내지 못하는 신문사와는 다른 곳이기 때문이었다. ‘목사 죽이는 기자’라며 취재를 막는 대접을 받게 됐지만 후회는 없었다. 새만금 개발 반대 행진이든 미군기지 반대 평화 대행진이든 같이 걸으며 취재하고, 기독교에만 국한하지 않고 4대 종단 종교인과 시민단체의 이야기를 고루 담는 문 기자였다.
이어서 남편의 권유로 민주노동당 군산지역 상근 활동도 했다. 첫 회의에서 위원장이 시지부에 전화해서 한미 에프티에이(FTA) 반대 촛불집회에 쓸 깔판을 빌려달라고 요청했을 때 문 회원은 영화관에 전화했다. 민주노총 군산 ‘시지부’를 ‘시지브이’로 알아들은 거였다. “아무것도 모르던, 학생운동이나 그런 거는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늘 열린 마음으로 스스로를 성찰하는 유형이란 건 짧은 인터뷰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 오늘날 그이의 행보 역시 이질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호군산기억모임의 최근 피켓팅>
문 회원이 상근하는 민실연은 사회적 약자의 불법 금융 피해나 파산면책 등 민생 상담을 하고, 서민의 주거권 확립을 위해 노력하는 단체다. 월 5,000원 약정한 회원이 전체 회원의 80%라니 곳간에서 인심 나는 이들의 모임은 아닌 듯하다. 회원 조직인 달팽이 봉사단은 어려운 이웃에게 100인분이나 되는 반찬과 간식을 만들어 전하는 일을 한다.
“시민이 함께하면서 사회에 관심 가지고 정치에 관심 기울이도록 만들어가는 게 시민단체의 역할이 아닐까요?”
“순수하게 봉사하러 왔다가 세월호 피켓을 들고 그런 사람으로 바뀌셨어요. 저는 가장 자랑하고 싶은 게 그런 거예요. 너무나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서 그분들이 조금씩 조금씩 바뀌면서 지역의 투사가 되고, 활동가가 됐어요.”
20명 남짓 활동하지만, 단톡방엔 100여 명 넘는 이들이 함께하는 달팽이 봉사단의 단장과 간사도 운동을 전혀 모르고 지내던 주부였다. 맨 처음 세월호 피켓팅을 할 때 ‘우리도 부모이기에 잊을 수 없습니다’라는 문구도 모두가 거부감 느끼지 않고 함께 할 수 있을 내용을 고민하면서 내왔다.
문 회원은 민실연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청소년을 모아서 노란 리본을 만드는 시간도 기획했다. 1365 자원봉사 포털에 수요처로 등록하고 자원봉사 점수가 필요한 학생 60~70여 명을 모으곤 했다. 리본 만들기 전엔 세월호 관련 영상을 틀고, 416연대 리플릿을 나누고, 관련 서명을 받았다. 세월호 가족을 초대해서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 듣는 시간도 마련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한번 왔다가 계속 오는 아이들이 많았어요.” 대전에 사는 학생이 군산까지 와서 리본을 만들어 가고, 리본을 만든 학생들은 학교에 가지고 가서 친구들과 선생님들께 나눔하고, 또 학교에서도 만들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진상규명은 아직도 제대로 안 됐잖아요. 누군가는 기억하고, 계속 알려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에요. 세월호참사 당시 6~7세로 모르는 아이도 많거든요. 파헤치고 싸워야 할 사람이 우리 젊은 아이들, 학생들일 수도 있잖아요.”
“아이하고 리본 만들러 왔다가 민실연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분도 많아요. 세월호를 통해서 소중한 분들을 많이 만나고 얻었어요. 물론 (세월호) 부모님들도 그렇지만 일반 시민인데 세월호 활동하면서 만나게 된 거죠.”
조금은 외롭기도 했었다. 다른 시민사회단체들이 3주기 기억식까지만 같이 하겠다고 했을 때가 그랬다. 4주기와 5주기 때는 전교조 선생님과 군산청소년학생연합회가 중심이 돼주었다. 외로움이나 서운함은 꾸준한 활동 뒤 감동으로 바뀌었다. 문 회원이 민실연에서 8주기 기억식을 오롯이 준비해서 다른 시민사회단체를 청했을 때였다.
“많은 현안으로 집중은 못 하지만 마음은 늘 빚진 것처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구나. 저희만 하는 줄 알았는데 정말 많은 분이 와주셨고, ‘다음엔 우리 같이해요’라고 얘기해 주셨어요.”
“9주기, 10주기 때는 함께할 분들을 모아서 같이 진행했고, 그게 세월호군산기억모임이 된 거예요.”
‘민실연이 세월호연대냐’며 세월호참사 연대활동만 한다는 지적질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이제는 지역에서 오래 활동 해온 어르신들부터 ‘민실연’하면 세월호 관련 활동에서는 무조건 인정해 준다.
매주 하던 세월호 피켓팅을 이젠 매달 하고 있지만 거르지 않은 10년이었다. 민실연과 군산기억모임 두 단체 그 가운데에 문 회원이 있다.
“정말 감사해요. 상근자가 혼자인데도 불구하고 정말 행복하게 일을 할 수 있는 게 추운 날 옆에 와서 함께 떨어준 사람이 있어서예요.”
“가장 중요한 게 사람인 거 같아요. 함께 해주는 사람이요.”
버팀목이 돼주는 사람들로 포기하지 않고 계속할 수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란 얘기였다.
“누군가 한 얘긴데요. 이길 거 같아서 싸우는 게 아니고 이길 거 같지 않아도 싸운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함께 기다리고 함께 싸우다 보면 그 싸움을 통해 세상이 조금은 바뀌기 때문이에요. 함께하는 그 힘을 믿어요.”
단단하다, 꾸준하다, 겸손하다, 다양한 회원들의 인터뷰를 하면서 발견하는 교집합이다. 그중 제일은 진정성이다.
“세월호 가족분들한테 미안해요. 타지역의 세월호 활동하는 분들에게도요. 제가 세월호에만 집중할 수 없어서요. 늘 진짜 너무 미안하고 죄송해요. 이번에 ‘바람의 세월’ 상영회를 했는데, 그렇게라도, 조금씩이라도 함께하고 싶어요.”
상영회에선 민실연 회원이 직접 만든 150개의 노란 비누를 참가자들과 나눴다. 비누 포장 안에 같이 담은 건 비단 노란 리본과 세월호 스티커만이 아니었다. 평범한 이들의 마음을 모으고, 서로를 지탱하게 하는 ‘세월호의 힘’이었다.
<코로나 시기에도 쉼이 없던 문규옥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