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닮은 사람[16일의 편지-2024년 5월] 희망은 인간의 불완전함에 뿌리를 둔다-강 곤 회원 인터뷰

2024-05-16

희망은 인간의 불완전함에 뿌리를 둔다-강 곤 회원 인터뷰


김 우

강곤 회원은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이하 작가기록단) 활동을 한다. 국가보안법 관련자 인터뷰어 활동을 하기도 하니, 그런 전문 인터뷰어를 초보 인터뷰어가 제대로 만난 셈이다. 내가 일본에 와 있는 터라 바다 건너 그이를 무료 통화 서비스로 만났다. 비가 종일 내리던 날이라 영화 ‘세븐’의 배경 같은 도쿄의 날씨를 전했더니, 서울은 가을 날씨처럼 맑다고 했다. 영화 ‘세븐’을 말한 결에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지 물었다. 고레에다 감독의 초기작인 ‘환상의 빛’이나 ‘원더풀 라이프’를 좋아한다고 답했다. 최근작은 꼰대스러워지는 거 같아서 그렇다고 했다.
그랬다. 강 회원은 꼰대스러워지는 걸 경계하는 사람이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권위적이지 않고, 경력이 쌓이면서도 억압적이지 않으려면 충분한 자기 경계가 필요한 법이다. 겸손하면서도 솔직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두루 듣다 보니 강 회원의 삶에 3이라는 숫자가 몇 차례 유의미하게 등장했다. 달리기며 축구며 운동을 잘했지만, 천식이 오면서 호흡곤란으로 응급실에 가는 경험을 하고, 그 전후로 사춘기가 오면서 담배도 피고 술도 마시며 책 읽고 글 쓰는 쪽으로 관심이 옮겨 갔던 게 중3 때다. ‘백일장 나가면 상 타고 책 많이 읽었다는 얘기를 듣는 정도’였지만 학교 성적은 좋지 않아서 ‘밑으로 한두 명 있을 정도’였다는 건 끝에서 3번째였다는 것이다. 턱걸이로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서 문예반 활동을 활발히 했지만, 역시 성적은 좋지 않아서 3수를 했다.
그렇게 90년대 초반에 입학한 대학을 2000년대 초반에 졸업했다니 대학 생활을 참으로 오래도 한 셈이다.
“90년대가 전체적으로 학생운동의 쇠락기였죠. 우울하고 쓸쓸했던 시기고요.”
‘학생운동이 어려워졌고’ ‘할 사람이 없으니’ 학생회장도 하고, 수배도 당하고, 구치소도 다녀왔다.
“구치소에 들어가니까 신병교육대보다 더 편했어요. 때리지도 않고,”
“국보법 사범으로 독방에 있어서 괴롭히는 고참도 없었고요.”
감옥은 이미 경험한 군대와 흡사해서 아니 오히려 나아서 편하게 지내다 나왔다고 했다. 지난 일을 떠벌떠벌하는 일 없는, 간결한 회고였다.
“당시 한총련 탈퇴서 쓰면 불구속이었다는데 탈퇴서를 안 쓴 이유는요?”
“그전엔 집회에서 후배들이 잡혀가서 구속당하고 그랬는데... 탈퇴서 안 쓴다고 실형 사는 것도 아니고. 몇 개월 수감생활 안 하려고 차마 그걸 쓸 수는 없었던 거죠.”
거창하지 않은 ‘차마’라는 낱말은 강 회원의 삶을 이끌어온 단어 중 하나가 아닐까. 차마 외면할 수 없는 사람의 마음 말이다. 

강 회원은 학교 선배 중에 의문사한 이가 있었기에 학생회 활동하면서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여했고, 졸업 후엔 학교 추모사업회 추천으로 국회 앞으로 가서 6개월여 의문사법 개정 농성 실무자가 됐다. 취업하면서는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상근자가 됐고, 이후 인권 잡지 만드는 활동과 출판사 쪽 일도 했다.
취업을 준비하며 돈이 되는 일에 대한 고민이나 갈등은 없었는지 물었다. 운동은 낙관적인 사람이 해야지 싶어서 자신은 운동권과 맞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하지만 서른이 넘은 졸업자의 이력서가 통과된 곳은 참여연대, 민변, 민주동문회 쪽이었다. 운동하려고 들어간 게 아니라 직장이라 생각하고 다녔다고 했다. 민변에선 변호사가 앞에 나서고 자신은 간사로 서포트하는 역할이었다고, 인권 잡지 만들면서는 전면의 활동가라기보다 활동을 기록하는 쪽이었다고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출판사에서 <밀양을 살다> 책을 편집하며 ‘이렇게 앉아서 편집하는 거 말고 현장에서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책의 보도 자료를 쓰는 때 세월호참사가 일어났다. 하고 싶은 일을 미루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의 구조적 폭력과 부조리함까지 확 다가오게 됐던 계기였어요.”
그동안은 국가보안법 폐지, 의문사 및 과거사 진상규명 운동을 하며 권위주의 정부와 공권력 같은 국가의 직접 폭력에 주목했다면, 관심을 두었던 폭력의 외연이 확장되는 순간이었다.
강 회원은 작가기록단의 지인들이 기록 작업에 참여한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사놓고도 한동안 읽지 못했다. 당시 강 회원의 아이들이 8살, 5살로 ‘부모로서의 정체성으로 감정이입이 확 돼서’였다.
“정면으로 응시하는 게 너무 두려웠어요. 나 말고 동료들이 기록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나는 회피하거나 거리를 좀 둬도 되지 않을까 하면서요.”
작가기록단에는 <다시 봄이 올 거예요> 작업 때 남성 청소년 인터뷰어가 필요하다는 제안을 받아 결합했다. 


작가기록단 활동을 하면서의 바람이자 방향은 이렇다.
“한국 사회 많은 노력들이 공평하게 평가받고 기록되고 했으면 좋겠어요.”
“소외를 피할 순 없지만 덜 되게 시행착오를 줄였으면 좋겠고요.”
“세월호참사 관련해서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부분, 미처 얘기되지 않았던 이야기나 드러나지 않았던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 빠뜨린 것은 없는가, 요런 것들에 계속 관심을 두고 싶어요.”
“중요한 담론과 담론 사이 어쨌든 빈구석이라고 할까. 다른 것들은 잘할 자신이 없으니까 그런 정도 살피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 해야 되는 일 아닐까 생각해요.”
5.18 민주화운동에서 여성은 10년 뒤에나 그 존재성이 드러났던 교훈을 새기겠다는 마음이다. 세월호참사 10주기 기록집인 <520번의 금요일> <봄을 마주하고 10년을 걸었다>에도 형제자매, 생존 학생, 민간인 희생자, 민간 잠수사 등등의 목소리도 같이 담고 더 조명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올해 남은 작업은 총회 자료집, 운영위 회의록 등의 자료를 정리한, 연구자용 백서다. 


“늘 그랬던 거 같아요. 세월호만이 아니라 제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인터뷰하면 알고 있는 것은 지엽적이고 부분적인 거라는 걸 재확인하죠. 알고 있는 게 전부가 아니고요. 겸손해져야겠다는 생각을 계속하게 돼요.”
강 회원은 조심스레 겸손하면서도 자연스레 솔직했다. 그이는 ‘희망은 인간의 불완전함에 뿌리를 둔다’는 <페다고지>의 구절에서 때때로 위로받는다고 했다. 잘하지 못하고 서툴고 실수도 많은 스스로에 대한 위로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승리보다는 후퇴나 실패와 좌절이 많은 사회 운동에 대한 위로이기도 하다. 불완전하고 부족하고 모자라지만 그러니까 무엇이라도 하려 하고, 패배하면서도 끈질기게 계속하는 그 속에 희망도 있는 거라는 믿음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