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렁이’로 살았지만, 잊지도 잃지도 않을 결심-정세경 회원 인터뷰
김 우
정세경 회원은 12월에 진보당 국회의원 예비후보 등록을 하고 열심히 뛰고 있다. 언제부터 진보당 당원이 된 건지 물었다.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 민중당, 진보당 당원으로 ‘진보정당 당원이 아닌 적이 없었다’고 한다. 민중당 시의원 후보로 나서며 본격적인 정치 행보를 시작했다.
“굳건하게 시민안전공원을 방어하고 (추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어.”
세월호 참사 촛불이 횃불이 돼서 박근혜 탄핵을 가져왔지만, 지역 양당의 행태는 여전했다. ‘납골당’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혐오 정치를 펼치는 정당과 분명한 포지션을 취하지 않으며 몸을 사리는 정당의 ‘후진’ 모습에 분연히 나섰다고나 할까.
“선거라는 열린 공간에서 누군가는 이런 얘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던 거지. (세월호) 가족의 목소리, 시민의 목소리를 내고 싶었어. 아이들이었지. 아이들에게 한 약속을 지키려고 겁도 없이 나간 거였지.”
정 회원은 ‘안산이라는 첨예한 곳에서 화랑 유원지를 품고 있는 동네’에서 세월호의 진실과 생명안전공원의 진실을 밝히고 싶어서 출마한 것이었다. ‘납골당에 찬성하냐?’며 공격하는 주민 앞에서도 당당한 정 회원에게 오히려 세월호 가족들이 세월호 배지를 떼고 선거 운동하라고 조심스레 권할 정도였다.
사실 정 회원은 ‘운동권’이었다. 20대 때부터 학교 졸업 대신 현장을 선택해 노동 운동을 시작했다. 지금도 ‘꿈꾸는 세상’을 위해 살아가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노동 조합만으로는 바뀌지 않는 세상을 절감했기에 노동자 직접 정치로 진보 집권을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수 양당 정권 교체가 아닌 정치 교체, 체제 교체로 민중의 삶이 나아져야 한다는 진심이 입법부인 국회 안에서 살아 숨쉬기를 희망한다.
“공장 노동자로, 기름밥 인생으로 살아왔는데 현실에 벽들이 많잖아. (다른 정당 후보들은) 가방끈도 길고, 재산도 많고, 경력이며 양력도 쭈~욱 있다면 말이지.”
빵빵하게 받쳐주는 양당과는 다른 소수 정당의 후보로 당선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래도 정 회원은 언제나 희망을 놓지 않고 미래를 꿈꾸고 싶다. 아니 미래를 창조하고 싶다. ‘올해 안되더라도’ 다른 후보들이 이어져서 언젠가 혐오와 배제의 정치를 바꾸는 날이 올 거라 믿는다. 해서 그런 미래를 이야기하는, 그런 미래를 연결하는, 귀와 입이 민중의 가슴에 닿아있는 후보자가 되고 싶다.
정 회원은 어릴 때부터 겁이 없었다. 언제나 밝고 신의를 중요시해서 친구들에게 인기도 많았다. 친구를 떼거리로 몰고 다녔다. 남자애들이 고무줄 놀이하는데 고무줄을 끊으면 친구를 대신해 응징하고, 힘을 믿고 함부로 행동하면 팀을 꾸려 대항했다. 중학교 때도 오락 부장을 하며 사회를 도맡아 했다. ‘남들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고 남들이 웃어주는 걸 좋아하는’, 남도 웃기고 자신도 즐거운 아이였다. 책상 안에는 쪽지가 가득한 인기 학생으로 꿈은 개그맨.
정 회원은 어머니가 41세에 낳은 늦둥이 막내였다. “임신이라고 생각지도 않았는데 배가 불러와서 살인 줄 알았는데... 망측스러워서 안 낳으려고 했다가 (뱃속에서) 잘 놀고 하니까 사내 새끼인 줄 알고 낳은 거지. 징글 징글하게 또 딸을 낳겠냐 했는데 또 딸이었던 거지”라며 웃는 정 회원. 1남 4녀의 서사를 자신도 웃어가며 술술 풀어놓으니 따라 웃게 되는 묘미가 있다.
또 어릴 적부터 덜렁이였다는데 노는 것에 정신 팔려서 신발주머니, 옷, 필통을 수십 번 잃어버렸다고. “잃어버리는 것도 있지만 남도 엄청 잘 줬어. (누가 갖고 싶어 하면) ‘그럼, 가져~’”하는 식이었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나 보다. 물건 욕심 없이 남에게 내어주는 게 여전한 정 회원이니 말이다.
그랬다. 2014년 첫 만남에서 10년이 흐른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모습의 정 회원이다. 내가 사는 마을의 한 여성단체에서 세월호 참사 관련 안산의 몇몇을 초대한 자리였다. 내 소개 순서에, 팽목항에 갔던 경험을 이야기하는데 팔뚝으로 눈물을 닦으며 밖으로 뛰쳐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소개 순서를 거치고 나서야 희생자의 엄마가 아니라 ‘엄마의 노란 손수건’ 대표인 걸 알았다. 사회의 아픔을 내 일로 받아 안아 내 일처럼 슬퍼하는 사람이 바로 정 회원이었다. 당시 들고 왔던 세월호 목걸이가 기억나서 물었더니 초등 동창이 디자인해서 동대문 시장에서 재료 사서 만들어줬던 거란다. 400여 개를 팔아 기금에 보탰다는데 그걸 모두 일일이 손으로 만들어 준 친구의 정성에 감동했다.
“인복이 많은 것 같아.”
“당근이지. 그게 (내가 가진 것 중) 제일 많은 거야.”
한결같은 진심으로 변함없는 진짜배기인 사람. 정 회원이 가진 것 하나 없어도 사람 부자인 건 확실하다.
정 회원은 찬호 아빠, 박래군 회원과 더불어 4.16연대 공동대표를 맡은 적이 있다.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박근혜 탄핵의 100만 촛불 앞에서 발언을 맡았던 때다. 10분 안에 무대로 오라는 연락을 받고도 인파를 뚫지 못해 난감한 상황이었다. “발언하셔야 한대요”라는 말에 모세의 기적처럼 인파가 양편으로 갈라져 길이 열리던 순간이 생생하다. 나 역시 사람의 힘, 민중의 강력한 군집력을 강렬하게 경험한 당시의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참으로 소중하다는 생각이다.
“연대체가 중요하지. 전국 각지의 시민과 해외 동포를 연결하는 조직체. 그런 조직체가 없거나 운영이 안 되면 잊힌다고 생각해. 역사 속 참사를 끝까지 기억하고 피해자가 됐다고 할 때까지 같이 해야지. 사회를 바꾸어내야 진상규명이고 책임자 처벌이라고 생각해. 깃발 움켜쥐고 심지 단단히 세우고 가는 조직체가 중요하지.”
“탄핵 투쟁은 태블릿 피시로 분출된 게 아니라 누적된 억울함, 원통함과 근본적 모순이 폭발한 거잖아. (세월호) 아이들 손가락이 가리키는 건 ‘제발 이 사회를 바꿔 주세요’하는 거였고. 피해자의 곁에 조직체와 기구가 있어야 하지. 그게 4.16연대여야 하고.”
역시 4.16연대 전 공동대표다운 말이다.
정 회원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지만 결국 안 해주고 싶은’ 게 진심인 정권과 국민의 힘 시장에 맞서 생명안전공원의 첫 삽을 뜨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아 역량을 집중하려 한다.
“250명이라고 하는 하나하나의 우주가 안산이라는 조그만 동네에서 한꺼번에 사라졌잖아. 죽을 때까지 (세월호 참사를) 잊지 말고 생명안전의 도시 안산으로 만들어 가야지.”
덜렁이로 살아온 정 회원이 숱한 것을 잃어버렸어도,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며 안전한 세상을 만들어 가겠다는 다짐만큼은 잊지도 잃지도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덜렁이’로 살았지만, 잊지도 잃지도 않을 결심-정세경 회원 인터뷰
김 우
정세경 회원은 12월에 진보당 국회의원 예비후보 등록을 하고 열심히 뛰고 있다. 언제부터 진보당 당원이 된 건지 물었다.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 민중당, 진보당 당원으로 ‘진보정당 당원이 아닌 적이 없었다’고 한다. 민중당 시의원 후보로 나서며 본격적인 정치 행보를 시작했다.
“굳건하게 시민안전공원을 방어하고 (추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어.”
세월호 참사 촛불이 횃불이 돼서 박근혜 탄핵을 가져왔지만, 지역 양당의 행태는 여전했다. ‘납골당’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혐오 정치를 펼치는 정당과 분명한 포지션을 취하지 않으며 몸을 사리는 정당의 ‘후진’ 모습에 분연히 나섰다고나 할까.
“선거라는 열린 공간에서 누군가는 이런 얘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던 거지. (세월호) 가족의 목소리, 시민의 목소리를 내고 싶었어. 아이들이었지. 아이들에게 한 약속을 지키려고 겁도 없이 나간 거였지.”
정 회원은 ‘안산이라는 첨예한 곳에서 화랑 유원지를 품고 있는 동네’에서 세월호의 진실과 생명안전공원의 진실을 밝히고 싶어서 출마한 것이었다. ‘납골당에 찬성하냐?’며 공격하는 주민 앞에서도 당당한 정 회원에게 오히려 세월호 가족들이 세월호 배지를 떼고 선거 운동하라고 조심스레 권할 정도였다.
사실 정 회원은 ‘운동권’이었다. 20대 때부터 학교 졸업 대신 현장을 선택해 노동 운동을 시작했다. 지금도 ‘꿈꾸는 세상’을 위해 살아가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노동 조합만으로는 바뀌지 않는 세상을 절감했기에 노동자 직접 정치로 진보 집권을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수 양당 정권 교체가 아닌 정치 교체, 체제 교체로 민중의 삶이 나아져야 한다는 진심이 입법부인 국회 안에서 살아 숨쉬기를 희망한다.
“공장 노동자로, 기름밥 인생으로 살아왔는데 현실에 벽들이 많잖아. (다른 정당 후보들은) 가방끈도 길고, 재산도 많고, 경력이며 양력도 쭈~욱 있다면 말이지.”
빵빵하게 받쳐주는 양당과는 다른 소수 정당의 후보로 당선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래도 정 회원은 언제나 희망을 놓지 않고 미래를 꿈꾸고 싶다. 아니 미래를 창조하고 싶다. ‘올해 안되더라도’ 다른 후보들이 이어져서 언젠가 혐오와 배제의 정치를 바꾸는 날이 올 거라 믿는다. 해서 그런 미래를 이야기하는, 그런 미래를 연결하는, 귀와 입이 민중의 가슴에 닿아있는 후보자가 되고 싶다.
정 회원은 어릴 때부터 겁이 없었다. 언제나 밝고 신의를 중요시해서 친구들에게 인기도 많았다. 친구를 떼거리로 몰고 다녔다. 남자애들이 고무줄 놀이하는데 고무줄을 끊으면 친구를 대신해 응징하고, 힘을 믿고 함부로 행동하면 팀을 꾸려 대항했다. 중학교 때도 오락 부장을 하며 사회를 도맡아 했다. ‘남들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고 남들이 웃어주는 걸 좋아하는’, 남도 웃기고 자신도 즐거운 아이였다. 책상 안에는 쪽지가 가득한 인기 학생으로 꿈은 개그맨.
정 회원은 어머니가 41세에 낳은 늦둥이 막내였다. “임신이라고 생각지도 않았는데 배가 불러와서 살인 줄 알았는데... 망측스러워서 안 낳으려고 했다가 (뱃속에서) 잘 놀고 하니까 사내 새끼인 줄 알고 낳은 거지. 징글 징글하게 또 딸을 낳겠냐 했는데 또 딸이었던 거지”라며 웃는 정 회원. 1남 4녀의 서사를 자신도 웃어가며 술술 풀어놓으니 따라 웃게 되는 묘미가 있다.
또 어릴 적부터 덜렁이였다는데 노는 것에 정신 팔려서 신발주머니, 옷, 필통을 수십 번 잃어버렸다고. “잃어버리는 것도 있지만 남도 엄청 잘 줬어. (누가 갖고 싶어 하면) ‘그럼, 가져~’”하는 식이었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나 보다. 물건 욕심 없이 남에게 내어주는 게 여전한 정 회원이니 말이다.
그랬다. 2014년 첫 만남에서 10년이 흐른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모습의 정 회원이다. 내가 사는 마을의 한 여성단체에서 세월호 참사 관련 안산의 몇몇을 초대한 자리였다. 내 소개 순서에, 팽목항에 갔던 경험을 이야기하는데 팔뚝으로 눈물을 닦으며 밖으로 뛰쳐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소개 순서를 거치고 나서야 희생자의 엄마가 아니라 ‘엄마의 노란 손수건’ 대표인 걸 알았다. 사회의 아픔을 내 일로 받아 안아 내 일처럼 슬퍼하는 사람이 바로 정 회원이었다. 당시 들고 왔던 세월호 목걸이가 기억나서 물었더니 초등 동창이 디자인해서 동대문 시장에서 재료 사서 만들어줬던 거란다. 400여 개를 팔아 기금에 보탰다는데 그걸 모두 일일이 손으로 만들어 준 친구의 정성에 감동했다.
“인복이 많은 것 같아.”
“당근이지. 그게 (내가 가진 것 중) 제일 많은 거야.”
한결같은 진심으로 변함없는 진짜배기인 사람. 정 회원이 가진 것 하나 없어도 사람 부자인 건 확실하다.
정 회원은 찬호 아빠, 박래군 회원과 더불어 4.16연대 공동대표를 맡은 적이 있다.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박근혜 탄핵의 100만 촛불 앞에서 발언을 맡았던 때다. 10분 안에 무대로 오라는 연락을 받고도 인파를 뚫지 못해 난감한 상황이었다. “발언하셔야 한대요”라는 말에 모세의 기적처럼 인파가 양편으로 갈라져 길이 열리던 순간이 생생하다. 나 역시 사람의 힘, 민중의 강력한 군집력을 강렬하게 경험한 당시의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참으로 소중하다는 생각이다.
“연대체가 중요하지. 전국 각지의 시민과 해외 동포를 연결하는 조직체. 그런 조직체가 없거나 운영이 안 되면 잊힌다고 생각해. 역사 속 참사를 끝까지 기억하고 피해자가 됐다고 할 때까지 같이 해야지. 사회를 바꾸어내야 진상규명이고 책임자 처벌이라고 생각해. 깃발 움켜쥐고 심지 단단히 세우고 가는 조직체가 중요하지.”
“탄핵 투쟁은 태블릿 피시로 분출된 게 아니라 누적된 억울함, 원통함과 근본적 모순이 폭발한 거잖아. (세월호) 아이들 손가락이 가리키는 건 ‘제발 이 사회를 바꿔 주세요’하는 거였고. 피해자의 곁에 조직체와 기구가 있어야 하지. 그게 4.16연대여야 하고.”
역시 4.16연대 전 공동대표다운 말이다.
정 회원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지만 결국 안 해주고 싶은’ 게 진심인 정권과 국민의 힘 시장에 맞서 생명안전공원의 첫 삽을 뜨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아 역량을 집중하려 한다.
“250명이라고 하는 하나하나의 우주가 안산이라는 조그만 동네에서 한꺼번에 사라졌잖아. 죽을 때까지 (세월호 참사를) 잊지 말고 생명안전의 도시 안산으로 만들어 가야지.”
덜렁이로 살아온 정 회원이 숱한 것을 잃어버렸어도,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며 안전한 세상을 만들어 가겠다는 다짐만큼은 잊지도 잃지도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