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닮은 사람[16일의편지-2023년 12월]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사람을 만나다 -박래군 회원 인터뷰

2023-12-15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사람을 만나다 -박래군 회원 인터뷰


김 우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바빠요.” 

내년 4월이면 세월호 참사 10주기다. 올 5월부터 10주기 위원회를 만들어서 활동 중인 박래군 회원의 근황을 물으니 역시 예상대로였다. 박 회원은 4.16재단의 상임이사이기도 하다. 

“60이 되면 은퇴해서 소설을 쓰겠다고 하셨었잖아요?”

“책(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에까지 썼는데 결국 ‘그짓말’한 꼴이 됐어요.” 

호언장담했지만 자업자득이란다. 여기저기 조직을 만들며 발목이 잡혔다고. 하지만 소설을 쓰겠다는 꿈은 포기하지 않고 있다. 열심히 구상하고 조금씩 끄적이고 있다고. ‘소설은 꼭 낸다, 언제 낼지는 모르겠다’는 박 회원. 역시 소설을 쓰겠다고 생각하는 나와 누가 먼저 쓰게 될지, 난 내가 먼저 쓸 거 같다. 시간 면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2014년 4월 16일의 기억을 물었다. “생생하게 기억하죠. 박근혜 이런 사람들 권력자들만 기억 안 나고, 시민들은 다 기억하고 있죠.” 남영동 대공분실을 안내하던 날이었다. 모여서 점심을 먹고 대공분실을 돌아보는 일정. 사무실에서 나갈 때 세월호 침몰 소식을 듣고 걱정하며 나갔는데 식당에서 전원구조 소식을 접했다. ‘우리가 조선 강국인데 당연히 구해야지’ ‘다행이야’ 얘기를 나눴다. 2시간 남짓 안내를 마치고 이동전화기를 다시 켜니 모든 것이 오보였다. 다음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이어졌다. 에어포켓이니 뭐니, 희망 고문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 죽어 나올 텐데 어떻게 해야 하나’ 일이 손에 안 잡혔다. 

“며칠 동안 정말 남들 안 보는 데서 울고, 계속 걱정하고 그랬어요.” 1명이라도 살아 돌아오길 바라는 자발적 촛불 행렬에도 참가했지만 답답하긴 매한가지였다. 팽목항에도 가고, 진도 체육관에도 갔다. 무겁고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을 보면서 시민단체 활동하는 후배를 모았다. ‘그냥 둬선 안 되겠다. 대책위라도 만들자’ 4월 말부터 논의를 시작했고, 5월 22일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이하 대책회의)’를 만들었다. 


세월호 가족을 처음 만난 건 5월 8일이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 수가 많아 보이지만 연간 교통사고 사망자에 비하면 그리 많은 게 아니다”라는 케이비에스 보도국장의 발언에 항의하러 왔을 때였다. 5월이었지만 매우 추웠고, 케이비에스 노조에 방한용품을 요청해 전달했다. 케이비에스 사장 면담 불발 후 가족들은 청와대 인근으로 가서 밤샘 집회를 했다. 아이들 영정 들고 청와대까지 행진하는 모습은 유령이 행진하는 것 같은 슬픈 느낌이었다. 다음 날 아침엔 생존 학생들이 청운동 주민센터 앞으로 가족들에게 인사하러 왔다. 우리만 살아와서 죄송하다는 울먹임의 인사였다. 날은 추웠고 청와대 앞은 더욱 썰렁했고 정작 사과는 피해자가 희생자 부모에게 하는 현실이었다. 하지만 청운동에서 밤을 꼬박 새우는데 여러 단체에서 담요며 먹거리를 조달해 왔다. 도시락이 남을 정도로 주위에서 마음을 냈다. 


세월호 가족과 첫 만남에서 박래군 회원은 스스로를 시민 단체 활동가라고 말하지 못했다. 조선일보 등에서 기를 쓰고 유가족과 시민단체를 갈라놓으려고 ‘외부 단체’ 운운했고, 가족들도 거부감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대책회의를 만드는 과정에서 유가족 대책위를 여러 번 찾아갔지만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다. “그때마다 까였어. 안 만나주고, 당신들 누구인지도 모르겠고, 당신들하고 안 한다고. 찬밥 신세였지.” 밤까지 기다리다가 하릴없이 돌아오는 발걸음이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유가족들과 만나게 됐다. 가족들이 특별법 제정을 하려고 1,000만 서명 운동을 선언했을 때였다. 지역에서 자발적 서명 운동이 일어났다. 서명받은 것을 가지고 가서 유가족 대책위와 만났다. 전국적 서명 운동에 같이 나가기도 하고, 청계 광장에서 대회도 같이 했다. 

“유가족들과 정말 같이 지냈어요. 국회, 광화문, 안산. 밤새고 새벽까지 회의하고.” 

“진정성을 알아주신 거네요?”

“그렇죠. ‘저 사람들이 뭔가 바라는 것이 있을 거다’라고 생각했대요. 활동가를 만나본 적이 없으니까 그런 오해를 했던 거죠.” 


5월 하반기 1,000만 서명운동 선언 이후 7월 중순까지 두 달 만에 받은 서명은 350만에 달했다. 11월 7일 특별법 통과까지 650만 명의 서명을 받았다. 

“한국 역사에 없는 일이에요.”

“천만 서명도 받을 수 있었을까요?”

“특별법 제정이 목표였으니까. 만약 특별법 제정이 더 늦어졌으면 천만까지도 갔을 거예요.”

세월호 참사 이후 4.16 운동은 한국 사회의 ‘처음’을 많이 만들어 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만들어 낸 최초가 대개 많아요.” 대책회의는 600여 단체가 참여한 전국적인 대책기구였다. 다른 재난 참사 때는 몇몇 단체 정도가 결합하는 정도였는데, 숱한 단체가 다른 활동을 다 접고 ‘올인’하는 처음의 경험이었다. 4.16연대라는 상설적 활동 조직을 만든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특별법 제정을 요구해서 재난 참사 조사 기구를 꾸린 것도 최초였다. 박래군 회원은 광화문 광장이 이후 박근혜를 치는 베이스캠프 역할도 해냈다고 생각한다. 시민들과 만나는 것을 막고 고립시키려 한 정부에 맞서 아빠들 5명이 맨바닥에서 시작해서 광화문 광장을 장악한 것은 의미 깊은 일이었다. 


4.16연대 회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미완의 과정이고 진행 중인 거죠. 부족하지만 이룬 게 있고, 바꾼 게 있는 거죠.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만 보고 절망하거나 패배감을 가지지 않았으면 해요. 문재인 정권 때 대통령이 챙기며 독려하는 과정이 있었다면 달라졌겠지만... 한계 속에서도 성과가 있고, 요 정도까지밖에 못 왔지만 좌절하진 말아야죠.” 말단만 처벌하는 현 법체계는 법을 제정하든 개정하든 해서 윗선 불처벌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부족함은 오히려 일으켜 세움의 기제가 돼야 한다는 얘기였다. 

우리가 도달한 지점을 정확히 알고, 우리가 놓을 수 없는 진상규명 운동과 생명 안전 사회 운동을 이어가자는 당부도 했다. “이 형편없는 국가는 국민이 죽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는데 우리라도 나서서 계속 요구하고 끊임없이 주장해야죠.” 우리는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포기할 수 없는 주체이기에 4.16 운동을 놓을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한국 사회의 ‘처음’을 일구는 우리는, 약속하고 다짐하며 길을 만들어 가는 우리는 “지치지도 말고 포기하지도 말고 격려하며” 또 한 걸음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걸어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