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가 체질
-이석현 회원을 만나다-
김우
얼마 전 국회 앞에서 이석현 회원을 처음 만났다. 생명안전기본법 통과를 촉구하는 피케팅을 나란히 하면서였다. 난 점심시간에 참여한 것이었는데, 이 회원은 오전에도 한 차례 했고, 저녁 시간에도 참여하고 귀가할 예정이라고 했다. 회사 창립 기념일이라 쉬는 날인데, 이렇게 연대를 나올 수 있어 기쁘다고 했다. AI 엔지니어로 일하면서 ‘누군가의 일자리를 뺏고 있진 않을까?’ 도덕적인 고민을 하는데, 반반차를 쓰고 연대를 다닐 수 있는 게 이 회사의 장점이라고도 했다. 급여나 복지가 아니라 연대를 다닐 수 있도록 시간을 쓸 수 있는 걸 최대의 장점으로 꼽는 이야길 들으며 ‘이 사람이 궁금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석현 회원은 유년기부터 책을 ‘디게’ 좋아했다. ‘집이 가난해서 장난감은 못 사주고, 책만 사준 거 같다’라고 했다. 초등학교 때 우연히 만난 책이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였고, 지금도 제일 좋아하는 책이다. ‘이런 세상도 있구나’하는 깨달음을 선사해 주었다.
‘모범상 받으며 평범하게 자랐’다는 이 회원. 초등학교 때 홍세화 씨 책을 읽고, 모범상을 줄곧 받는 게 평범한 거냐고 물었더니, 규칙에 매어서도 잘 살았기에 그리 답했다고 했다. 중학교 때는 또 공부가 재밌었다는 이 회원. 한층 어려운 걸 배우고, 풀기 어려운 과제에 도전하는 과정을 즐겼다. 한데 고등학교 때 만난 논술반 선생님은 범상치 않았다. 한미FTA, 인터넷 실명제, 국가보안법, 시시티브이와 개인 정보, 당시 선생님이 던져 준 주제가 그러했다. 관련한 이 회원의 글은 교사들이 보는 신문에도 실리고, 학교 문집에도 올랐다. 공부도 잘하는데 글까지 잘 쓰는 ‘평범한’ 학생이었던 이 회원이었다.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해선 정말 글 잘 쓰는 사람은 따로 있구나, 느꼈다. ‘글로 싸우는 사람들도 많은데 난 행동하는 게 맞는 거 같다’고 판단했다. 새내기 시절부터 광장으로 나왔다. 패션은 한여름에도 비니를 쓰는 거였다. 주장을 담은 핀버튼 배지를 여기저기 달기 위해서였다.
“광우병 때나 용산참사, 그때부터 많이 다녔어요. 사람들 많은 데가 좋아서 광장으로 나갔어요. 나와 같은 사람이 많구나, 느낄 수 있어서요.”
학과 노래패에서 왕성한 활동을 했다. 줄곧 반장을 고사하며 지내 온 이 회원이 회장을 맡기도 했다. 기타도 잘 치고 작곡도 잘하는, 08학번 이 회원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의외로 하안~참을 거슬러 올라가는 묵은 노래, ‘광야에서’다. 이 회원은 어린 날에도, 젊은 날에도 가슴 한켠에 진중함을 지니고 살아온 사람만 같다. 책과 사람이 준 영향이 그이를 더 단련시켜 온 듯도 했다. 세상을 차가운 눈으로 냉철하게만 바라보려던 이 회원에게 ‘세상엔 슬픈 이야기가 많다’라며 뜨거운 가슴으로 세상을 감싸안는 모습을 보이던 선배의 모습도 큰 영향을 주었다.
학생 운동이 거의 사라진 시기 입학한 이 회원은 자신을 ‘행운아’라고 했다. 그 이유가 학교에 한대련(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 의장이 있어서 그나마 학생 운동을 접할 수 있어서라니, ‘노동운동하고 나서부터 참삶이 무엇인지 알았네’하는 노랫말이 떠올랐다. 규칙에 매어 지내면서도 매어 지낸다는 인식을 하지 못하다가 자유로움을 알게 된 이의 저항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사회 운동도 열심히, 학과 공부도 열심히 하는 데다 문학도 좋아했다니 다 잘했다는 얘기냐고 물었다.
“‘중간만 하자’는 느낌이에요. 너무 열심히 하지도 않고, 안 하지도 않는 선을 가려고 한 거죠.”
“즐거운 아웃사이더이고 싶어요. 주가 되지 않고 참여하는 사람, 눈에 띄지 않게 연대하는 사람이요.”
그이의 ‘중간’은 참으로 치열하지만, 잠시 반짝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꾸준하고 끈질기게 이어지는, 고갈됨 없는 중간이었다.

최근 광화문광장 집중 피케팅
이 회원이 프리랜서 강사이던 시절. 나주에 가서 수업 마치고 숙소 앞에서 해 지는 모습을 보다가 건너편에서 노란 행렬이 다가오는 걸 본적이 있었다.
“1주기 넘은 시점이었죠. 어떻게 응원해야 할지, 손도 못 흔들고 사진만 찍으며 가는 모습을 보기만 했어요.”
저녁 식사하러 간 곰탕집에서도 세월호 가족들과 마주쳤지만 ‘어떤 말씀을 전달할지 몰라서’ 마음을 전할 수 없었다. 깜깜한 시간에 그들이 걸었던 길을 왔다갔다하며 ‘당부’라는 민중가요를 불렀다. ‘우리 어디에 있든 다시 만날 것을’ 가사를 부르다 혼자서 울었다. 세월호참사 때도 워킹홀리데이로 호주에 있어서 당장 광장으로 달려가지 못해 안타깝기만 했던 그 마음과도 같았다.
“연대를 통해 가족들을 다시 만나게 돼서 좋아요. 그때 죄송스러운 마음을 갚기 위해서 휴가를 써요. 퇴근하고는 피켓 시위에 늦으니까 반차 쓰고, 종일 연차도 쓰고요.”
특이하다거나 괴짜라는 말을 ‘디게’ 많이 들었다는 이 회원은 기도 역시 남다르다. 평안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100마디의 기도를 한다면 80마디는 세월호다.
“외면하고 싶은 세상을 직시하고 싶어요. 12년 넘게 계속 기도하고 있어요. 제게 평안을 주지 마시고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힘들어도 다 보게 해달라고, 그래야 내가 움직일 수 있다고요.”
이 회원은 월급의 7.5%를 기부하는데, 5%는 적은 것 같고 10%는 많은 것 같아서다. 뭘 구매하는 일도 없고 충동구매를 하는 유일한 경우가 책을 사는 것이다.
“휴가 안 쓰며 돈으로 받는 것보다 저와 같은 꿈을 꾸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좋아요. 성과급도 기부하는 것이 마음이 더 편하고요. 세월호 유가족분들과 사람들 위해서 돈이나 시간을 쓰는 게 아깝지 않은 삶이에요. 계속 그렇게 살고 싶어요. 결혼도 하고 싶지 않아요. 내가 지켜야 할 게 많이 없었으면 좋겠어서요. 저울질하고 싶지 않거든요.”
평안을 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불편함과 힘겨움을 기구하는 이 회원. 무언가를 뒤로 쌓고 불리며 불안함을 달래는 대신 오히려 지킬 것을 만들지 않고 비워내는 이 회원. 스스로 ‘특별하다고 포장하고 싶지만 평범하다’라는 이 회원이지만 까도 까도, 파도 파도 특별한 사람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투비 연대자, 이석현. 그이는 연대가 체질이다.

2016년 세월호광장에서 첫 공연
연대가 체질
-이석현 회원을 만나다-
김우
얼마 전 국회 앞에서 이석현 회원을 처음 만났다. 생명안전기본법 통과를 촉구하는 피케팅을 나란히 하면서였다. 난 점심시간에 참여한 것이었는데, 이 회원은 오전에도 한 차례 했고, 저녁 시간에도 참여하고 귀가할 예정이라고 했다. 회사 창립 기념일이라 쉬는 날인데, 이렇게 연대를 나올 수 있어 기쁘다고 했다. AI 엔지니어로 일하면서 ‘누군가의 일자리를 뺏고 있진 않을까?’ 도덕적인 고민을 하는데, 반반차를 쓰고 연대를 다닐 수 있는 게 이 회사의 장점이라고도 했다. 급여나 복지가 아니라 연대를 다닐 수 있도록 시간을 쓸 수 있는 걸 최대의 장점으로 꼽는 이야길 들으며 ‘이 사람이 궁금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석현 회원은 유년기부터 책을 ‘디게’ 좋아했다. ‘집이 가난해서 장난감은 못 사주고, 책만 사준 거 같다’라고 했다. 초등학교 때 우연히 만난 책이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였고, 지금도 제일 좋아하는 책이다. ‘이런 세상도 있구나’하는 깨달음을 선사해 주었다.
‘모범상 받으며 평범하게 자랐’다는 이 회원. 초등학교 때 홍세화 씨 책을 읽고, 모범상을 줄곧 받는 게 평범한 거냐고 물었더니, 규칙에 매어서도 잘 살았기에 그리 답했다고 했다. 중학교 때는 또 공부가 재밌었다는 이 회원. 한층 어려운 걸 배우고, 풀기 어려운 과제에 도전하는 과정을 즐겼다. 한데 고등학교 때 만난 논술반 선생님은 범상치 않았다. 한미FTA, 인터넷 실명제, 국가보안법, 시시티브이와 개인 정보, 당시 선생님이 던져 준 주제가 그러했다. 관련한 이 회원의 글은 교사들이 보는 신문에도 실리고, 학교 문집에도 올랐다. 공부도 잘하는데 글까지 잘 쓰는 ‘평범한’ 학생이었던 이 회원이었다.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해선 정말 글 잘 쓰는 사람은 따로 있구나, 느꼈다. ‘글로 싸우는 사람들도 많은데 난 행동하는 게 맞는 거 같다’고 판단했다. 새내기 시절부터 광장으로 나왔다. 패션은 한여름에도 비니를 쓰는 거였다. 주장을 담은 핀버튼 배지를 여기저기 달기 위해서였다.
“광우병 때나 용산참사, 그때부터 많이 다녔어요. 사람들 많은 데가 좋아서 광장으로 나갔어요. 나와 같은 사람이 많구나, 느낄 수 있어서요.”
학과 노래패에서 왕성한 활동을 했다. 줄곧 반장을 고사하며 지내 온 이 회원이 회장을 맡기도 했다. 기타도 잘 치고 작곡도 잘하는, 08학번 이 회원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의외로 하안~참을 거슬러 올라가는 묵은 노래, ‘광야에서’다. 이 회원은 어린 날에도, 젊은 날에도 가슴 한켠에 진중함을 지니고 살아온 사람만 같다. 책과 사람이 준 영향이 그이를 더 단련시켜 온 듯도 했다. 세상을 차가운 눈으로 냉철하게만 바라보려던 이 회원에게 ‘세상엔 슬픈 이야기가 많다’라며 뜨거운 가슴으로 세상을 감싸안는 모습을 보이던 선배의 모습도 큰 영향을 주었다.
학생 운동이 거의 사라진 시기 입학한 이 회원은 자신을 ‘행운아’라고 했다. 그 이유가 학교에 한대련(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 의장이 있어서 그나마 학생 운동을 접할 수 있어서라니, ‘노동운동하고 나서부터 참삶이 무엇인지 알았네’하는 노랫말이 떠올랐다. 규칙에 매어 지내면서도 매어 지낸다는 인식을 하지 못하다가 자유로움을 알게 된 이의 저항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사회 운동도 열심히, 학과 공부도 열심히 하는 데다 문학도 좋아했다니 다 잘했다는 얘기냐고 물었다.
“‘중간만 하자’는 느낌이에요. 너무 열심히 하지도 않고, 안 하지도 않는 선을 가려고 한 거죠.”
“즐거운 아웃사이더이고 싶어요. 주가 되지 않고 참여하는 사람, 눈에 띄지 않게 연대하는 사람이요.”
그이의 ‘중간’은 참으로 치열하지만, 잠시 반짝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꾸준하고 끈질기게 이어지는, 고갈됨 없는 중간이었다.
최근 광화문광장 집중 피케팅
이 회원이 프리랜서 강사이던 시절. 나주에 가서 수업 마치고 숙소 앞에서 해 지는 모습을 보다가 건너편에서 노란 행렬이 다가오는 걸 본적이 있었다.
“1주기 넘은 시점이었죠. 어떻게 응원해야 할지, 손도 못 흔들고 사진만 찍으며 가는 모습을 보기만 했어요.”
저녁 식사하러 간 곰탕집에서도 세월호 가족들과 마주쳤지만 ‘어떤 말씀을 전달할지 몰라서’ 마음을 전할 수 없었다. 깜깜한 시간에 그들이 걸었던 길을 왔다갔다하며 ‘당부’라는 민중가요를 불렀다. ‘우리 어디에 있든 다시 만날 것을’ 가사를 부르다 혼자서 울었다. 세월호참사 때도 워킹홀리데이로 호주에 있어서 당장 광장으로 달려가지 못해 안타깝기만 했던 그 마음과도 같았다.
“연대를 통해 가족들을 다시 만나게 돼서 좋아요. 그때 죄송스러운 마음을 갚기 위해서 휴가를 써요. 퇴근하고는 피켓 시위에 늦으니까 반차 쓰고, 종일 연차도 쓰고요.”
특이하다거나 괴짜라는 말을 ‘디게’ 많이 들었다는 이 회원은 기도 역시 남다르다. 평안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100마디의 기도를 한다면 80마디는 세월호다.
“외면하고 싶은 세상을 직시하고 싶어요. 12년 넘게 계속 기도하고 있어요. 제게 평안을 주지 마시고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힘들어도 다 보게 해달라고, 그래야 내가 움직일 수 있다고요.”
이 회원은 월급의 7.5%를 기부하는데, 5%는 적은 것 같고 10%는 많은 것 같아서다. 뭘 구매하는 일도 없고 충동구매를 하는 유일한 경우가 책을 사는 것이다.
“휴가 안 쓰며 돈으로 받는 것보다 저와 같은 꿈을 꾸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좋아요. 성과급도 기부하는 것이 마음이 더 편하고요. 세월호 유가족분들과 사람들 위해서 돈이나 시간을 쓰는 게 아깝지 않은 삶이에요. 계속 그렇게 살고 싶어요. 결혼도 하고 싶지 않아요. 내가 지켜야 할 게 많이 없었으면 좋겠어서요. 저울질하고 싶지 않거든요.”
평안을 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불편함과 힘겨움을 기구하는 이 회원. 무언가를 뒤로 쌓고 불리며 불안함을 달래는 대신 오히려 지킬 것을 만들지 않고 비워내는 이 회원. 스스로 ‘특별하다고 포장하고 싶지만 평범하다’라는 이 회원이지만 까도 까도, 파도 파도 특별한 사람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투비 연대자, 이석현. 그이는 연대가 체질이다.
2016년 세월호광장에서 첫 공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