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가 서로에게 - 4.16가족협의회 창현 엄마를 만나다
김우
“창현이는 그냥 뭐 사춘기 고등학교 2학년의 전형적인 남학생이었어요.”
“공부에는 별로 관심 없었고, 친구들이랑 노는 거에 관심 많았죠.”
“엄마랑 얘기하는 거 싫어하고 잔소리로 알아들었어요.”
창현 엄마는 창현이의 누나와는 소통이 됐지만, 창현이와는 불통이었다. 엄마랑 잘 얘기하려 들지 않고, 대화가 안 되는 사이였다고 했다. 창현이는 아빠와도 돈독하게 지내지 못했다고 했다.
“서로의 마음을 모른 채 영영 헤어져 버린 게, 그렇게 떠나버린 게,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 있는 게 아쉬워요.”
몰랐던 창현이를, 창현이가 떠난 후 더 알게 된 게 있다면 무엇일까. 친구를 좋아하고, 친구를 소중히 여기던 창현이. 친구랑 있는 걸 제일 좋아하고, 야간 자율학습 대신 친구들과 밖에서 노는 걸 택하던 창현이. 그냥 ‘노는 친구’들과 어울리는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창현이는 속이 깊은 아이였다.
“좀 모범생은 아닌 친구들이지만 그런 친구들을 많이 챙겼던 거 같아요. 그땐 몰랐는데, 같이 학교에 다니게 하려고 노력도 많이 하고요. 몰랐던 부분이라 대개 미안하고. 그렇게 갈 줄 누가 알았겠어요. 창현이가 친구에 대해서 나쁘게 말한 거 사과하라고 대들었던 때가 있는데, 지금은 충분히 사과하고 싶어요. 창현이 얘기도 잘 들어주고 싶고요. 미안하다고, 이해 못 해줘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창현 엄마는 창현이에게 ‘있는 그대로 이해받고, 강요받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대신 ‘학교 잘 다니고, 공부 열심히 하고, 좋은 친구 만나고, 생산적인 미래를 고민’하길 바랐다. 어쩌면 평범한 엄마의 바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창현이를 잃은 뒤 그런 바람과 기대까지 미안해졌다.
“그 순간이 제일 소중한데, 내일 무슨 일 있을지 모르고, 언제 무슨 일 당할지 모르는 건데. 모르는 미래를 준비하라고 하고, 현재 누릴 수 있는 거 포기하라고 하고. 사는 게 별거 아닌데, 그날그날 행복하게 살면 되는데, 얼마나 잘 살겠다고 다그치고 몰아붙이고 했는지.”
“우리는 그렇게 배워가지고 자녀한테도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거죠. 엄마도 많이 배울 걸, 많이 배워서 잘 했어야 했는데 후회가 돼요.”

2017년 분향소 옆 노란방에서
창현이가 창현 엄마에게 ‘먼저 말을 걸어준’ 날이 있었다. 어떤 할아버지가 리어카에 폐지를 싣고 힘겹게 끌고 가는데, 뒤에서 밀어드린 일을 이야기한 거였다. 당시 창현 엄마는 그저 “그랬구나”하고 말았다. 칭찬받고 싶던 마음, 엄마랑 잘 지내고 싶던 마음도 있었겠구나, 뒤늦게 깨달았다.
“꼭 지나간 다음에 진실을 알게 되는 게 사람이 어리석은 거 같아요. 그날 참사를 당하고 자녀를 잃고 나니까 뭐가 소중한지, 근본적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진짜로 알게 되는 거 같고.”
“부모들은 아이 잃고 난 다음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듯, 사회도 그런 희생을 치르고 나서야 무언가 변화하는 게 다르지 않은 듯해요. 사건을 겪고 나야 깨닫게 되는 게 안타깝죠.”
창현 엄마에게는 참사가 ‘큰 스승’이었다. 세월호참사는 창현 엄마가 가졌던 ‘이전의 모든 생각들, 가치관, 세계관’을 무너지게 했다.
“진짜 그렇더라고요. 자녀를 잃는 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니까요. 나는 이것(진상 규명)밖에 할 게 없다는 생각이에요. 앞장서서 하는 건 아니지만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한다는 생각이죠. 이거 외에 할 게 있나요?”
“나의 정체성이, 세월호 유가족 창현 엄마라는 새로운 신분이 생긴 거죠. 국가적 참사를 겪은 유가족으로 참사 진실을 밝히고, 조금이라도 그전과는 다른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해요.”
계속 활동하는 동인을 물었더니, 세월호참사의 진실을 밝히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일 외에 내게 다른 일이 있겠냐고 되묻는 창현 엄마였다.
“세월호가 사회에 던진 충격은 큰데, 시간이 지나며 잊혀 가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있어요. 그때의 다짐들이, 안전한 사회를 위해 내 몫을 하겠다는 생각들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희망적인 건 여전히 그 마음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죠. 새로운 사람이 활동가로 나서기도 해서 신기하고요.”
“아이들 희생이 헛되지 않길 바라요. 이 사회가 변하려면 사람이, 구성원이 변해야 하잖아요. 우리가 변치 않고 실행하는 사람들이 됐으면 좋겠어요.”
창현 엄마는 4.16가족협의회 대외협력부서장, 4.16합창단, 생명안전공원 예배팀 활동 등으로 꾸준히, 쉬지 않고, 한결같이 12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2020년 팽목항에서
“함께하는 분이 있어 감사하죠. 서로를 보면서 힘을 얻고 힘을 주고. 서로가 서로에게 아주 특별한 관계, 가족 이상의 사이죠. 세월호를 통해 만난 사람들인데 그분들 덕분에 계속 할 힘도 생기는 거죠.”
“안산의 합동 분향소가 없어진 뒤 그 부지에서 예배드리고 있어요. 진상 규명될 때까지, 안전한 나라 될 때까지 기독인으로 할 수 있는 투쟁이고 행동이죠.”
4.16가족협의회의 부모들, 합창단의 단원들, 예배팀의 기독인들. 모두가 특별하고 더없이 소중한 관계요, 서로서로 힘인 사이다. 지난 12주기 기억예배 때도 400명이 넘는 이들이 함께했다.
세월호참사 이후 무너져 내리고 다시 세운, 창현 엄마의 변화한 세계 중 하나가 신앙 관련한 영역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나이 오십이 될 때까지 창현 엄마의 삶을 이끌어준 ‘가장 큰 길잡이’가 교회였다. 사실 창현이와의 갈등의 씨앗도 “교회 가라, 빠지면 안 된다”라는 강요였다.
“신앙은 그 사람의 말, 행동, 삶이 일치돼야 하는 건데 겉으로 보이는 형식에 치중했던 거 같아요. 분향소를 찾아오고, 계속 예배드려 주고, 무조건 우리 얘기 들어주고, 울분 다 받아 안아 주고. 그분들을 보면서 진짜 신앙인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어떤 것인지, 국가는 어떠해야 하는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깨닫고 알게 되는 거 같아요. 나도 변해가고 닮아가는 중이죠.”
창현 엄마는 신앙에서도 다른 갈래 길을 찾았다.
최근 창현 엄마는 화성시의 시골로 이사했다. 정원 있는 집에서 같이 살자던 창현이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어서다. 집안을 ‘창현이가 주인’인 모양새로 꾸며서 마음이 안정된다고 했다. 같이 살고 있다는 느낌이 주는 위안이었다. 창현이는 나무라던 엄마, 잔소리하던 엄마 대신 창현이를 잃고서야 많은 것을 알게 돼 미안한 엄마를 이미 많이 느끼고 있을 듯하다. 창현 엄마가 이사한 화성 집의 정원에 봄볕이 많이 내렸으면 좋겠다.
서로가 서로에게 - 4.16가족협의회 창현 엄마를 만나다
김우
“창현이는 그냥 뭐 사춘기 고등학교 2학년의 전형적인 남학생이었어요.”
“공부에는 별로 관심 없었고, 친구들이랑 노는 거에 관심 많았죠.”
“엄마랑 얘기하는 거 싫어하고 잔소리로 알아들었어요.”
창현 엄마는 창현이의 누나와는 소통이 됐지만, 창현이와는 불통이었다. 엄마랑 잘 얘기하려 들지 않고, 대화가 안 되는 사이였다고 했다. 창현이는 아빠와도 돈독하게 지내지 못했다고 했다.
“서로의 마음을 모른 채 영영 헤어져 버린 게, 그렇게 떠나버린 게,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 있는 게 아쉬워요.”
몰랐던 창현이를, 창현이가 떠난 후 더 알게 된 게 있다면 무엇일까. 친구를 좋아하고, 친구를 소중히 여기던 창현이. 친구랑 있는 걸 제일 좋아하고, 야간 자율학습 대신 친구들과 밖에서 노는 걸 택하던 창현이. 그냥 ‘노는 친구’들과 어울리는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창현이는 속이 깊은 아이였다.
“좀 모범생은 아닌 친구들이지만 그런 친구들을 많이 챙겼던 거 같아요. 그땐 몰랐는데, 같이 학교에 다니게 하려고 노력도 많이 하고요. 몰랐던 부분이라 대개 미안하고. 그렇게 갈 줄 누가 알았겠어요. 창현이가 친구에 대해서 나쁘게 말한 거 사과하라고 대들었던 때가 있는데, 지금은 충분히 사과하고 싶어요. 창현이 얘기도 잘 들어주고 싶고요. 미안하다고, 이해 못 해줘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창현 엄마는 창현이에게 ‘있는 그대로 이해받고, 강요받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대신 ‘학교 잘 다니고, 공부 열심히 하고, 좋은 친구 만나고, 생산적인 미래를 고민’하길 바랐다. 어쩌면 평범한 엄마의 바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창현이를 잃은 뒤 그런 바람과 기대까지 미안해졌다.
“그 순간이 제일 소중한데, 내일 무슨 일 있을지 모르고, 언제 무슨 일 당할지 모르는 건데. 모르는 미래를 준비하라고 하고, 현재 누릴 수 있는 거 포기하라고 하고. 사는 게 별거 아닌데, 그날그날 행복하게 살면 되는데, 얼마나 잘 살겠다고 다그치고 몰아붙이고 했는지.”
“우리는 그렇게 배워가지고 자녀한테도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거죠. 엄마도 많이 배울 걸, 많이 배워서 잘 했어야 했는데 후회가 돼요.”
2017년 분향소 옆 노란방에서
창현이가 창현 엄마에게 ‘먼저 말을 걸어준’ 날이 있었다. 어떤 할아버지가 리어카에 폐지를 싣고 힘겹게 끌고 가는데, 뒤에서 밀어드린 일을 이야기한 거였다. 당시 창현 엄마는 그저 “그랬구나”하고 말았다. 칭찬받고 싶던 마음, 엄마랑 잘 지내고 싶던 마음도 있었겠구나, 뒤늦게 깨달았다.
“꼭 지나간 다음에 진실을 알게 되는 게 사람이 어리석은 거 같아요. 그날 참사를 당하고 자녀를 잃고 나니까 뭐가 소중한지, 근본적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진짜로 알게 되는 거 같고.”
“부모들은 아이 잃고 난 다음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듯, 사회도 그런 희생을 치르고 나서야 무언가 변화하는 게 다르지 않은 듯해요. 사건을 겪고 나야 깨닫게 되는 게 안타깝죠.”
창현 엄마에게는 참사가 ‘큰 스승’이었다. 세월호참사는 창현 엄마가 가졌던 ‘이전의 모든 생각들, 가치관, 세계관’을 무너지게 했다.
“진짜 그렇더라고요. 자녀를 잃는 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니까요. 나는 이것(진상 규명)밖에 할 게 없다는 생각이에요. 앞장서서 하는 건 아니지만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한다는 생각이죠. 이거 외에 할 게 있나요?”
“나의 정체성이, 세월호 유가족 창현 엄마라는 새로운 신분이 생긴 거죠. 국가적 참사를 겪은 유가족으로 참사 진실을 밝히고, 조금이라도 그전과는 다른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해요.”
계속 활동하는 동인을 물었더니, 세월호참사의 진실을 밝히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일 외에 내게 다른 일이 있겠냐고 되묻는 창현 엄마였다.
“세월호가 사회에 던진 충격은 큰데, 시간이 지나며 잊혀 가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있어요. 그때의 다짐들이, 안전한 사회를 위해 내 몫을 하겠다는 생각들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희망적인 건 여전히 그 마음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죠. 새로운 사람이 활동가로 나서기도 해서 신기하고요.”
“아이들 희생이 헛되지 않길 바라요. 이 사회가 변하려면 사람이, 구성원이 변해야 하잖아요. 우리가 변치 않고 실행하는 사람들이 됐으면 좋겠어요.”
창현 엄마는 4.16가족협의회 대외협력부서장, 4.16합창단, 생명안전공원 예배팀 활동 등으로 꾸준히, 쉬지 않고, 한결같이 12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2020년 팽목항에서
“함께하는 분이 있어 감사하죠. 서로를 보면서 힘을 얻고 힘을 주고. 서로가 서로에게 아주 특별한 관계, 가족 이상의 사이죠. 세월호를 통해 만난 사람들인데 그분들 덕분에 계속 할 힘도 생기는 거죠.”
“안산의 합동 분향소가 없어진 뒤 그 부지에서 예배드리고 있어요. 진상 규명될 때까지, 안전한 나라 될 때까지 기독인으로 할 수 있는 투쟁이고 행동이죠.”
4.16가족협의회의 부모들, 합창단의 단원들, 예배팀의 기독인들. 모두가 특별하고 더없이 소중한 관계요, 서로서로 힘인 사이다. 지난 12주기 기억예배 때도 400명이 넘는 이들이 함께했다.
세월호참사 이후 무너져 내리고 다시 세운, 창현 엄마의 변화한 세계 중 하나가 신앙 관련한 영역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나이 오십이 될 때까지 창현 엄마의 삶을 이끌어준 ‘가장 큰 길잡이’가 교회였다. 사실 창현이와의 갈등의 씨앗도 “교회 가라, 빠지면 안 된다”라는 강요였다.
“신앙은 그 사람의 말, 행동, 삶이 일치돼야 하는 건데 겉으로 보이는 형식에 치중했던 거 같아요. 분향소를 찾아오고, 계속 예배드려 주고, 무조건 우리 얘기 들어주고, 울분 다 받아 안아 주고. 그분들을 보면서 진짜 신앙인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어떤 것인지, 국가는 어떠해야 하는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깨닫고 알게 되는 거 같아요. 나도 변해가고 닮아가는 중이죠.”
창현 엄마는 신앙에서도 다른 갈래 길을 찾았다.
최근 창현 엄마는 화성시의 시골로 이사했다. 정원 있는 집에서 같이 살자던 창현이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어서다. 집안을 ‘창현이가 주인’인 모양새로 꾸며서 마음이 안정된다고 했다. 같이 살고 있다는 느낌이 주는 위안이었다. 창현이는 나무라던 엄마, 잔소리하던 엄마 대신 창현이를 잃고서야 많은 것을 알게 돼 미안한 엄마를 이미 많이 느끼고 있을 듯하다. 창현 엄마가 이사한 화성 집의 정원에 봄볕이 많이 내렸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