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닮은 사람[16일의 편지-2026년 3월]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 나상민을 만나다

2026-03-13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 나상민 회원을 만나다

김우


나상민 회원은 세월호참사 1주기 때 집회라는 것에 처음 참석했다. ‘국화꽃 한 송이 들고 세월호 희생자분들을 애도하려는 마음’이었다. 시청에서 집회하고 광화문으로 가서 헌화하는 일정이었는데 경찰들이 막는 것을 보고 너무 의아했다. 호기심이 들고 오기가 생겼다.

“도대체 광화문에 뭐가 있길래 막는지 의문이 들었어요. 너무 궁금해서 광화문 앞으로 가봤죠.”

경찰은 무리로 이동하는 이들은 막아섰지만, 혼자였던 나 회원이 ‘집으로 간다’라고 둘러대니 보내 주었다. 돌고 돌아 광화문 현판 밑 또 하나의 차벽 밑을 기어서 들어가, 밖에서는 보이지도 않게 고립돼 있던 세월호 가족들을 만났다.

“화장실이라도 갔다 오고 나면 못 들어오게 해서 유가족들은 생리현상에 힘든 상황이었어요.”

“잠시 참석하고 귀가하려고 했다가 집에 가지 못하고 날을 새게 됐죠.”

남자들이 뒤돌아서 담요를 펴서 가려주고, 세월호 어머니들이 그 안에서 소변을 보는 상황까지 펼쳐졌다. 담요를 들고 뒤돌아 있던 나 회원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인권 유린의 충격적인 장면, ‘누구나 사는 동안에 한 번’ 삶을 변화시키는 계기를 만난다면, 나 회원에게는 바로 그날 그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 이후에 노동절 큰 집회가 있다고 들었어요. 노동절 집회보다 유가족이 걱정되더라고요.” ‘자식을 잃은 슬픔에 가슴이 찢어질’ 피해자들이 2차 3차 피해를 겪고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여성으로서의 수치심보다 엄마로서 진상 규명 의지가 더 강했던 세월호 어머니들이 떠올랐다. 노동절에 광화문 현판 밑으로 다시 갔다. 태어나서 두 번째로 집회에 참석한 날이었다. 

세월호 가족들은 여전히 차벽에 막혀 있었고, 일부 시민들은 경찰과 몸싸움하고 있었다. 많은 시민이 차벽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차벽 밖에서 응원하고 있었다. 나 회원은 캡사이신에 맞은 눈을 생수로 씻어내고, 군 복무 시절 전투 복장을 챙기듯 생수, 마스크, 안경, 손수건 등을 정비했다.

“영화처럼, 5‧18 민주화운동 같은 그런 상황처럼 느껴졌어요. 제가 경찰들에게 붙잡혀 가더라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자식들에게도 부끄러운 행동이 아니라고 느꼈죠.”

바리케이드를 비집고 들어가고, 전경 차 밑으로 기어들어 간 끝에 세월호 가족들과 만날 수 있었다. 나 회원은 전경 차 위에도 올라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열성적으로 깃발까지 흔들던 것이 생생하다. 집회가 낯설었던 나 회원이었는데, 정권의 탄압이 나 회원의 연대를 부추겼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유가족들은 항상 거리에서 자고 거리에서 집회하고. ‘국가가 유가족에게 어떻게 저렇게 대우하지?’ 싶었어요.”

“사업적으로는 창업 초기여서 힘든 상황이었지만, 옷 한 벌씩 해드리고 싶다는 마음이었어요.” 

2015년 의류업을 창업한 나 회원은 2016년에 세월호 가족들에게 노란 점퍼를 후원했다. 노란색이되 각기 다른 옷을 입던 세월호 가족들 모두가 집회에서 함께 입을 노란 점퍼를 선물할 수 있어 기쁘면서도 350벌이라는 그 적지 않은 숫자에 슬프기도 했던 나 회원. 그이는 김종도 화백의 세월호 작품을 넣은 티셔츠를 만들어 세월호 가족뿐만 아니라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이하 특조위)와 연대 시민들에게 후원하기도 했다.


세월호참사 관련해 여러 활동 하나하나가 소중하지만 광화문 광장 야간 당직도 여러모로 의미 깊다. 우연찮게 만난 군대 후임이 야간 당직 당번이었고, 후임이랑 얘기하려고 당직을 같이 서게 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야간 당직을 돌아가며 한다는, 후임이 속한 단체에 좋은 인상을 받아서 회원 가입까지 했다. 4.16 연대의 당직 관계자도 알게 되어 4.16연대에 가입해 4.16 진실 모니터단 활동도 했다. 

세월호참사 전까지만 해도 나 회원은 언론을 신뢰하는 사람이었다. 전원 구조가 오보였다는 걸 알고 놀랐고, 나 회원이 본 놀라운 현장 역시 다음 날 신문에서 찾아보기 힘든 경험을 했다. 집회 현장의 한 참석자에게서 언론 관련 비판의 이야기를 접한 나 회원은 내친김에 ‘그분 따라서’ 국민 TV에 가입해 활동하며, 국민 TV 시민 기자로 청문회 참관도 했다. 또한 국민 TV 이름으로 매주 금요일 야간 당직을 조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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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당직으로 4.16가족협의회에서 받은 감사장과 선물을 다시 국민TV에 전달


이렇듯 나 회원은 세월호참사로 거리에 나왔고, 그렇게 연줄연줄 여러 단체의 회원이 됐다. 세월호참사가 모든 시민 활동의 계기였던 것이다. ‘세월호 하나만 가지고 활동을 시작했는데’ 세상을 보는 지평이 넓어지게 됐다. 민주주의를 유지해 가는, 세상의 숨은 힘이 시민과 시민단체라고 인식한 나 회원은 박근혜, 윤석열 탄핵 광장에서도 촛불 시민으로 당당히 거리에 섰다. 

“세월호참사 외에도 데자뷔처럼 비슷한 상황이 된 이태원 참사와 무안공항 참사까지 사회적 참사에 관심이 가요. 모태가 된 것은 세월호참사인 거고요.” 

“제가 세월호 초반에 활동할 때 ‘언제까지 할 거냐’라고 애들이 물었어요. ‘진상 규명 될 때까지 그때까지만 할게’라고 답했는데, 이제 큰애가 20살, 막내는 고등학교 1학년이 됐어요.”

“대통령이 관심을 가지고 강하게 지시를 내려서 진실에 근접해 갔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이렇게 길어질지 몰랐던’ 진상 규명의 길, 안전 사회를 만들어가는 길. 그래도 한눈팔고 싶지는 않은 나 회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죠. 홍대에서 피케팅 하려고 하는 건 세월호참사든 이태원 참사든 또래 친구들이 홍대 쪽에서 놀 나이인데 그 친구들이 젊음의 거리에서 공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예요.”

홍대 입구 전철역 피케팅 계획이 있는데 아직 실천을 못 하고 있다. ‘하나는 외로워 둘이랍니다~’, 누구라도 함께 하자고 손을 잡아 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한 나 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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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공간 앞 피케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