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품고 조응하다, 강인한 생명력의 버드나무처럼
4.16연대 회원 유희
김 우
유희 회원은 배우다. 원래는 음악을 전공하려고 준비하다가 고3 봄 지나면서 극단에 합류하게 됐다. 점심시간에 멍때리며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같은 반 친구가 다가와서 “연극 안 해볼래?” 권유해서 친구 따라 강남 아니 극단에 간 경우였다. 세월호참사 이후엔 개인 공연을 중단하고, 사회예술행동단 버드나무라는 공연팀을 만들어 사회적 참사 공연에 집중했다. 집회의 큰 무대와는 다르게 작은 무대로 열어갔다. ‘함께’, ‘세월호, 이제 시작이다!’, ‘공감’, ‘스텔라데이지호’ ‘기억하자’ ‘함께 살자’ 등의 제목으로 작은 문화 공간에서 공연하거나 광화문 기억공간 앞 416연대 문화제에 참여했다. 시민단체 쪽과 연합해서 안산, 종로, 성남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열 명이 넘는, 프로와 아마추어들이 모여 공연만이 아니라 침묵행동, 기억물품 나눔도 하며 복합적으로 활동했다.
“햇수로 3년이었어요. 알음알음 소개 소개로 보는 이들이 많아지고 활동 기반도 잡혀갈 때 서로 힘든 일들이 쌓이면서 쉬어가자고 쉼표 찍고는 재개를 못 했네요.”
지금은 혼자 위플 공방을 운영하고 있다. 지금은 혼자지만 ‘예술인들이 사이드잡을 같이 하는 플랫폼’이란 꿈을 꾸는 공간이기도 하다. 정식 이름은 위플레스트, Willow Play Forest(버드나무 놀이 공연 숲)라는 뜻을 담았다. 유희라는 활동명 역시도 버드나무 유에 놀이연극 희다.
“처음부터는 아니었어요. 무지했죠.”
유희 님은 참사 초기엔 ‘정부가, 나라가 당연히 해결해 주겠지’ 하는 단순하고 순진한 생각만 했다고 한다. 후배가 하는 연극 ‘김정욱들’ 공연을 보러 가서 생각의 변화가 생겼다.
“그전까지는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면 러블리한 거 좋아하고, 고전극에 관심이 있고 그랬어요. 후배 공연이라 갔는데 한 대 맞은 느낌으로 가슴 속이 복잡하더라고요. 자극을 받았죠.”
“띵한 느낌이었어요. 한 노동자의 이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우리 모두가 김정욱들이라는 이야기였는데, 이런 사회적인 이야기들을 전해주는 공연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공연을 계기로 사회적 참사 관련 공연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주변의 세월호 리본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전에도 있었고 보았던 것이지만 이제는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다. 내가 해야 하는 뭔가가 있지 않을까, 나 같은 국민들에게 이야기를 전하면 좋지 않을까 고민했다. 2016년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희 님에게 활동하며 가장 인상에 남은 시간을 물었다. 경빈 엄마랑 생존자 김성묵 님이랑 전국을 돌며 활동 지역을 찾아가는 길에 동행한 시간이었다고 답했다. 1주일에 5~6일씩 몇 달을 돌았다.
“고속도로는 시끄러워서 둘이 나누는 대화가 다 들리지 않지만 불쑥 들리는, 살짝 들리는 이야기들에 혼자 눈물을 머금곤 했어요.”
“유가족과 생존자, 두 분의 뒷모습을 보고 둘의 대화를 들으며 너무 힘들고 무겁고 아픈 감정이 사그라지지 않았죠. 아프기도 했지만, 이 자리에 내가 함께할 수 있어서 고맙기도 한 감정이 교차했어요.”
매일 몇 시간씩 길게는 10시간 가까이 차 뒷자리에 앉아 있으며 운전석 김성묵 님과 조수석의 경빈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본 시간이었다.
“공연 시간 빼고 다 쫓아다녔는데 활동하는 시민들의 꾸준함과 열정에 놀란 시간이기도 했어요.”
“충격적이었다고 할까.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는지 생각 못 했다가 그 열정에 놀랐어요. 곳곳에, 생각지도 못한 곳곳에 이렇게 열심히 움직이고 있구나, 감동한 것도 있고 배우기도 많이 배우고요.”
“문재인 때 국민 청원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던 때예요.”
“지역에 갔을 때 흔들림 없어 보인다는 느낌이 강했어요. 오랜 시간 해온 것도 중요하지만 계속 한길만 가고 계시다는 느낌이었죠.”
형식적으론 기다려달라는 것이었지만 실제론 공소시효 지나도록 아무것도 안 할 것 같은 느낌에 실망스럽고 혼란스럽고 답답했던 유희 님을 맞아주는, 흔들림 없는 활동가들의 눈빛. 새벽 첫차를 타고 안산으로 가고, 다시 집에 오면 다음 날 새벽인 날들, 대부분 하루를 전부 쓰는 일정이었지만 피곤함보다 힘을 받는 시간이었다. 지역의 시민 활동가를 알게 되고, 꾸준히 소통하는 관계가 형성되고, 지역과 연결돼서 같이 손잡고 가는 끈끈한 동력을 느끼는, 충만한 시간이었다.
당시 유희 님이 혼란스러워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성격이 급해서, 당장 움직임이 안보이고 답답해서 나갔어요.”
까만 옷을 입고, 까만 모자를 쓰고, 까만 마스크를 끼고, 문구 없이 세월호리본 모양만 인쇄된 노란 스카프를 들고 기억 공간에 서 있었다. 처음엔 답답함에 무작정 나갔지만, 시민들에게 ‘왜 저러지?’하는 물음표를 주고 싶어졌다. 횡단보도를 등지고 청와대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선 건은 그쪽에도 이런 작은 움직임이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우리공화당 집회에 마주 서서 수백 대 일로 서 있던 적도 있어요.”
영화 <비트>에서 16대 1로 싸우던 임창정을 능가하는 눈빛 대결이다. 물어보는 사람보다 시비 거는 사람이 많은 날도 많아서 혼자일 때는 조금 힘들기도 했다는 유희 님의 곁에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사람 한 사람 같이 서는 사람들이 생겼다. 스스로 연대하고, 연대자를 곁에 느끼며 성장해 온 우리의 이야기다.
요즘 416연대🎗리본공방에서 활동하는 태환 님, 지수 님, 재문 님, 용춘 님, 세환 님과 매주 화요일 오후 2시~6시에 🎗노란리본을 만든다. 경빈 엄마와 승묵 엄마도 법원 앞 피케팅(세월호참사 희생자 임경빈 군에 대한 구조 방기 항소심 관련 해경과 국가의 책임 판결을 촉구하는 1인 시위) 사이에 들러 손을 보탠다.
🎗노란리본 만들기에 있어 장인의 경지 아니냐고 말하니, 남들보다 수월하게 빠르게 만드는 정도라고 답하는 유희 님. 난도 높은 단계를 물으니, 팝콘이라고 일러주는 유희 님이다. 팝콘은 뭘까?
“광화문 노리공 시절 단식 중인 세월호가족과 🎗리본을 만들며 노란색 에바지 긴 건 칼국수, 자르면 단무지, 리본 모양은 팝콘이라 불렀어요. 이 명칭이 전해 내려오는 거죠.”
“어떤 분은 못생겨도 리본 모양이면 되지, 하시는데요. 또 어떤 분은 시민 한 분이 리본 하나를 달고 다니실 건데 이왕이면 예쁘게 만들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왕이면 최대한 최선을 다해서 깔끔하고 이쁘게 만들려고 해요.”
공정이 가내수공업 과정인데 416연대 리본공방 벽면에 가훈 아닌 사훈처럼 걸어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최대한 최선을 다해서, 깔끔하고 이쁘게’
사실 유희 님은 몇 해 전 스트레스로 인한 결핵성 늑막염을 앓았다. 그 후유증으로 무리하면 호흡이 힘들어진다.
“피케팅을 오래 하거나 많이 걷거나 야외 활동을 하는 것에 조심하게 되더라고요. 부끄러운 말이죠. 인터뷰조차도 할 자격이 있나 싶어요. 너무 하는 게 없어서 어디 가서 세월호 활동한다고 말하는 것도 부끄럽고요.”
“더운 날 추운 날 밖에서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런 자리에서 함께 못 하니 부끄럽고 죄송스럽죠.”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많이 하고 있어요. 자꾸 뭐라도 스스로 만들어서 하든 따라가서 하든 했는데. 그런 에너지를 많이 잃은 건 아닌가. 한 번 아팠었기 때문에 몸을 사리는 거 아닌가. 딜레마에 빠져서 자꾸 시간이 가는 게 답답하고 초조해요. 리본을 만들면서 (각 사회적 참사를 상징하는) 리본 색깔만 더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저절로 국가에서, 알아서 정부에서 해줄 거로 생각했던 자신을 돌아보는 유희 님.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라는 사실을 일반 국민에게 전하고 싶다는 유희 님. 참사 속 한 사람 한 사람 희생자의 서사를 공연으로 가까이 전하고 싶었듯이 공감하고 함께하는 마음을 모아내는 방향을 찾고 싶다는 유희 님.
“부모님도 피해자도 아무도 외롭지 않게, 많은 분이 곁에 함께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시길 바라요.”
이렇게 말하고 나니 또 부끄럽다는 유희 님. 거창하지 않더라도 소소하게 뭘 할 수 있을까를 여전히 찾고 내내 행동하는 유희 님이다.
🔼사회적참사 관련 공연 리허설 때
◀광화문에서 침묵행동 때
바람을 품고 조응하다, 강인한 생명력의 버드나무처럼
4.16연대 회원 유희
김 우
유희 회원은 배우다. 원래는 음악을 전공하려고 준비하다가 고3 봄 지나면서 극단에 합류하게 됐다. 점심시간에 멍때리며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같은 반 친구가 다가와서 “연극 안 해볼래?” 권유해서 친구 따라 강남 아니 극단에 간 경우였다. 세월호참사 이후엔 개인 공연을 중단하고, 사회예술행동단 버드나무라는 공연팀을 만들어 사회적 참사 공연에 집중했다. 집회의 큰 무대와는 다르게 작은 무대로 열어갔다. ‘함께’, ‘세월호, 이제 시작이다!’, ‘공감’, ‘스텔라데이지호’ ‘기억하자’ ‘함께 살자’ 등의 제목으로 작은 문화 공간에서 공연하거나 광화문 기억공간 앞 416연대 문화제에 참여했다. 시민단체 쪽과 연합해서 안산, 종로, 성남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열 명이 넘는, 프로와 아마추어들이 모여 공연만이 아니라 침묵행동, 기억물품 나눔도 하며 복합적으로 활동했다.
“햇수로 3년이었어요. 알음알음 소개 소개로 보는 이들이 많아지고 활동 기반도 잡혀갈 때 서로 힘든 일들이 쌓이면서 쉬어가자고 쉼표 찍고는 재개를 못 했네요.”
지금은 혼자 위플 공방을 운영하고 있다. 지금은 혼자지만 ‘예술인들이 사이드잡을 같이 하는 플랫폼’이란 꿈을 꾸는 공간이기도 하다. 정식 이름은 위플레스트, Willow Play Forest(버드나무 놀이 공연 숲)라는 뜻을 담았다. 유희라는 활동명 역시도 버드나무 유에 놀이연극 희다.
“처음부터는 아니었어요. 무지했죠.”
유희 님은 참사 초기엔 ‘정부가, 나라가 당연히 해결해 주겠지’ 하는 단순하고 순진한 생각만 했다고 한다. 후배가 하는 연극 ‘김정욱들’ 공연을 보러 가서 생각의 변화가 생겼다.
“그전까지는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면 러블리한 거 좋아하고, 고전극에 관심이 있고 그랬어요. 후배 공연이라 갔는데 한 대 맞은 느낌으로 가슴 속이 복잡하더라고요. 자극을 받았죠.”
“띵한 느낌이었어요. 한 노동자의 이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우리 모두가 김정욱들이라는 이야기였는데, 이런 사회적인 이야기들을 전해주는 공연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공연을 계기로 사회적 참사 관련 공연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주변의 세월호 리본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전에도 있었고 보았던 것이지만 이제는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다. 내가 해야 하는 뭔가가 있지 않을까, 나 같은 국민들에게 이야기를 전하면 좋지 않을까 고민했다. 2016년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희 님에게 활동하며 가장 인상에 남은 시간을 물었다. 경빈 엄마랑 생존자 김성묵 님이랑 전국을 돌며 활동 지역을 찾아가는 길에 동행한 시간이었다고 답했다. 1주일에 5~6일씩 몇 달을 돌았다.
“고속도로는 시끄러워서 둘이 나누는 대화가 다 들리지 않지만 불쑥 들리는, 살짝 들리는 이야기들에 혼자 눈물을 머금곤 했어요.”
“유가족과 생존자, 두 분의 뒷모습을 보고 둘의 대화를 들으며 너무 힘들고 무겁고 아픈 감정이 사그라지지 않았죠. 아프기도 했지만, 이 자리에 내가 함께할 수 있어서 고맙기도 한 감정이 교차했어요.”
매일 몇 시간씩 길게는 10시간 가까이 차 뒷자리에 앉아 있으며 운전석 김성묵 님과 조수석의 경빈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본 시간이었다.
“공연 시간 빼고 다 쫓아다녔는데 활동하는 시민들의 꾸준함과 열정에 놀란 시간이기도 했어요.”
“충격적이었다고 할까.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는지 생각 못 했다가 그 열정에 놀랐어요. 곳곳에, 생각지도 못한 곳곳에 이렇게 열심히 움직이고 있구나, 감동한 것도 있고 배우기도 많이 배우고요.”
“문재인 때 국민 청원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던 때예요.”
“지역에 갔을 때 흔들림 없어 보인다는 느낌이 강했어요. 오랜 시간 해온 것도 중요하지만 계속 한길만 가고 계시다는 느낌이었죠.”
형식적으론 기다려달라는 것이었지만 실제론 공소시효 지나도록 아무것도 안 할 것 같은 느낌에 실망스럽고 혼란스럽고 답답했던 유희 님을 맞아주는, 흔들림 없는 활동가들의 눈빛. 새벽 첫차를 타고 안산으로 가고, 다시 집에 오면 다음 날 새벽인 날들, 대부분 하루를 전부 쓰는 일정이었지만 피곤함보다 힘을 받는 시간이었다. 지역의 시민 활동가를 알게 되고, 꾸준히 소통하는 관계가 형성되고, 지역과 연결돼서 같이 손잡고 가는 끈끈한 동력을 느끼는, 충만한 시간이었다.
당시 유희 님이 혼란스러워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성격이 급해서, 당장 움직임이 안보이고 답답해서 나갔어요.”
까만 옷을 입고, 까만 모자를 쓰고, 까만 마스크를 끼고, 문구 없이 세월호리본 모양만 인쇄된 노란 스카프를 들고 기억 공간에 서 있었다. 처음엔 답답함에 무작정 나갔지만, 시민들에게 ‘왜 저러지?’하는 물음표를 주고 싶어졌다. 횡단보도를 등지고 청와대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선 건은 그쪽에도 이런 작은 움직임이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우리공화당 집회에 마주 서서 수백 대 일로 서 있던 적도 있어요.”
영화 <비트>에서 16대 1로 싸우던 임창정을 능가하는 눈빛 대결이다. 물어보는 사람보다 시비 거는 사람이 많은 날도 많아서 혼자일 때는 조금 힘들기도 했다는 유희 님의 곁에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사람 한 사람 같이 서는 사람들이 생겼다. 스스로 연대하고, 연대자를 곁에 느끼며 성장해 온 우리의 이야기다.
요즘 416연대🎗리본공방에서 활동하는 태환 님, 지수 님, 재문 님, 용춘 님, 세환 님과 매주 화요일 오후 2시~6시에 🎗노란리본을 만든다. 경빈 엄마와 승묵 엄마도 법원 앞 피케팅(세월호참사 희생자 임경빈 군에 대한 구조 방기 항소심 관련 해경과 국가의 책임 판결을 촉구하는 1인 시위) 사이에 들러 손을 보탠다.
🎗노란리본 만들기에 있어 장인의 경지 아니냐고 말하니, 남들보다 수월하게 빠르게 만드는 정도라고 답하는 유희 님. 난도 높은 단계를 물으니, 팝콘이라고 일러주는 유희 님이다. 팝콘은 뭘까?
“광화문 노리공 시절 단식 중인 세월호가족과 🎗리본을 만들며 노란색 에바지 긴 건 칼국수, 자르면 단무지, 리본 모양은 팝콘이라 불렀어요. 이 명칭이 전해 내려오는 거죠.”
“어떤 분은 못생겨도 리본 모양이면 되지, 하시는데요. 또 어떤 분은 시민 한 분이 리본 하나를 달고 다니실 건데 이왕이면 예쁘게 만들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왕이면 최대한 최선을 다해서 깔끔하고 이쁘게 만들려고 해요.”
공정이 가내수공업 과정인데 416연대 리본공방 벽면에 가훈 아닌 사훈처럼 걸어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최대한 최선을 다해서, 깔끔하고 이쁘게’
사실 유희 님은 몇 해 전 스트레스로 인한 결핵성 늑막염을 앓았다. 그 후유증으로 무리하면 호흡이 힘들어진다.
“피케팅을 오래 하거나 많이 걷거나 야외 활동을 하는 것에 조심하게 되더라고요. 부끄러운 말이죠. 인터뷰조차도 할 자격이 있나 싶어요. 너무 하는 게 없어서 어디 가서 세월호 활동한다고 말하는 것도 부끄럽고요.”
“더운 날 추운 날 밖에서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런 자리에서 함께 못 하니 부끄럽고 죄송스럽죠.”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많이 하고 있어요. 자꾸 뭐라도 스스로 만들어서 하든 따라가서 하든 했는데. 그런 에너지를 많이 잃은 건 아닌가. 한 번 아팠었기 때문에 몸을 사리는 거 아닌가. 딜레마에 빠져서 자꾸 시간이 가는 게 답답하고 초조해요. 리본을 만들면서 (각 사회적 참사를 상징하는) 리본 색깔만 더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저절로 국가에서, 알아서 정부에서 해줄 거로 생각했던 자신을 돌아보는 유희 님.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라는 사실을 일반 국민에게 전하고 싶다는 유희 님. 참사 속 한 사람 한 사람 희생자의 서사를 공연으로 가까이 전하고 싶었듯이 공감하고 함께하는 마음을 모아내는 방향을 찾고 싶다는 유희 님.
“부모님도 피해자도 아무도 외롭지 않게, 많은 분이 곁에 함께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시길 바라요.”
이렇게 말하고 나니 또 부끄럽다는 유희 님. 거창하지 않더라도 소소하게 뭘 할 수 있을까를 여전히 찾고 내내 행동하는 유희 님이다.
🔼사회적참사 관련 공연 리허설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