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닮은 사람[16일의 편지-2025년 4월] 사람은 나의 힘-4.16가족협의회 사무처장 윤희 어머니

2025-04-15


 

사람나의 힘

4.16가족협의회 사무처장 윤희 어머니 인터뷰

김 우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4월이라 행사며 간담회로 여기저기 바쁘게 다니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바빠도 너무 바쁠, 416세월호참사 가족협의회 사무처장 윤희 엄마와 심야 통화로 만났다. 최근 숱한 만남 중에서도 인상적인 만남을 물었더니 제주 청소년들이 준비하는 11주기 준비위원회에 갔던 걸 첫손으로 꼽는다. 벌써 3년째 청소년들이 주도적으로 기억식을 준비하고 있는 게 감동이란다.
“아이들이 잘 몰랐던 세월호(참사)를 알아가고, 안전한 사회를 위해서 본인이 무엇을 할지 알아가는 과정이 좋아요.”
청소년뿐만 아니라 기억지기며 청소년의 부모들까지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자리가 많이도 좋았다고.
며칠 전 동국대 사진 동아리에서 안산으로 기억 순례를 와서 세월호 가족들과 간담회까지 하고 간 일도 떠올렸다.
“해마다 오더라고요.”
역시. 꾸준함은 큰. 감동이다. 

윤희 엄마 역시 꾸준히 쉼 없는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초창기 때는 반대표를 맡았고, 사무처장은 3번째 연임 중으로 5년 차다. 사무처장을 맡고 있는 외에도 416공방이며 416가족나눔 봉사단 등의 활동에도 빠짐없이 걸쳐 있다. 공방의 청소년 수업이며 봉사단의 초등생 안전교육까지 맡고 있다.
“퀼트로 하는 거, 천연화장품, 비누, 향수 다 해요. 뜨개질도 하고 만능이에요.”
스스로를 내세우는 일 없이 늘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는 윤희 엄마 별명이 ‘멀티’라는 걸 처음 알았다.
“윤희 엄마도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 있어요?”
“있죠. 중간중간 몸은 힘들어도 되는데 가장 힘든 게 사람에게 상처받는 거예요. 사람에 대한 것들 때문에 힘들 때는 그만하고 싶다 생각도 하죠.”
“극복의 힘은요?”
“또 다른 사람이겠죠.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다면 상처를 치유해 주는 사람도 있잖아요.”

바로 함께하는 사람이 주는 힘이 윤희 엄마의 힘이었다. MBTI로 보면 내향형인데도 윤희 엄마는 혼자 있으면서 힘을 충전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만나면서 힘을 받는다.
“쉬면 더 아픈 사람이에요. 움직여야 덜 하고 체력이 보충되는 듯해요. 쉬면 가라앉고요. 웬만하면 아파도 움직이려 해요.”
‘곁에 계신, 함께해준 분들이 동력’이라는 윤희 엄마 동력의 다른 하나는 지켜주지 못한 윤희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저는 시민사회단체나 활동했던 사람이 아니어서 처음엔 엄청 두렵고 무섭기도 했고. 근데 또 안 나가면 안 되더라고요. 앞에서 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해서요. 또 내가 안 움직이면 윤희가 잊혀지는 거 같고. 윤희라는 존재는 더 사라질 거 같고. 같이 희생된 아이 중에서도 더 소외될 거 같고.”  

“윤희는 차분하고 지 할 일 똑 부러지게 하는 너무 모범인 아이였어요.”
“아빠도 든든해 했어요.”
브랜드 옷 사달라는 말도 한 적 없어서 ‘안 사줘도 되나 보다’ 했었다. 집안 형편도 사줄 여건이 못 됐다. 일 년 내내 같은 운동화 하나를 신고 다녀도 불만이 없던 아이였다.
“윤희가 그러고 나서 다른 아이들 보니까 구두도 있고, 단화도 있고, 신발이 엄청 많은 거예요.”
윤희 엄마가 공방에서 만든 퀼트 작품에 종류별로 신발을 담은 이유다. 이런 거 사줘야 했는데, 이런 거 신겨줘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을 담은 신발들이다.
“애가 너무 성실해서 다 화장하고 다닐 때 얘는 화장품도 없었어요. 립글로스 한 번 못 사줬던 게 걸리고. 머리도 딱 한 번 ‘파마하고 싶어’ 미용실 가서 파마하고 와서 사진 찍어 보내주고.”
한창 꾸미고 싶었을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 게 미안해서 한이 된다는 윤희 엄마 말에 마음이 젖어와서 윤희 엄마가 대신 꾸미고 다니라고 말을 돌렸다. 그랬더니 꾸민다는 답이 바로 돌아와서 의아했다. 거의 ‘생얼’ 느낌인 윤희 엄마인데 나름 ‘비비도 바르고 선크림도 바르고 립글로스도 바른다’는 얘기였다. 윤희 엄마 꾸밈의 최상 치다.

<윤희에게 한 켤레 한 켤레 신겨 주고 싶은 신발들을 한 땀 한 땀 바느질한 퀼트>


윤희 엄마에겐 윤희가 떠난 뒤 하나 남은 딸내미가 있다. 윤희의 두 살 터울 여동생으로 올해 27살이고 지금 ‘백수’다.
“대학 1년 다니다가 그만두고, 피자 가게 운영하다가 너무 힘들어해서 접고, 학원 다니면서 자격증 따다가 푹 쉬고 있어요.”
막내가 입에 달고 사는 말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열심히 살아서 뭐 해”이다. 사람들 있는 곳에 잘 안 가려고 하는데 그래도 조금씩 좋아지고 있어서 다행이다. 그래도 여전히 “엄마, 아빠 살 때까지만 살래”라고 한다. 윤희 엄마 마음도 가볍지 않다. 언니가 떠나고 막내가 힘들어할 때 ‘밖으로만 다니면서 그때 못 돌봤던 것’도 마음에 걸리고, ‘엄마, 아빠가 힘들다고 생각해서 자기 힘든 거 얘기 못 하고’ 지냈을 시간도 안타깝기만 하다. 떠난 윤희에게도, 남은 윤희의 동생에게도 이래저래 미안하기만 한 윤희 엄마다. 

윤희 아빠는 윤희를 보낸 뒤 어머니, 아버지, 동생까지 차례로 잃으며 많이도 우울해했다.
“외부에 나가서는 그게 잘 안되니까. 집에서 풀었던 거 같아요.”
윤희 엄마나 윤희 아빠나 서로 ‘가까운 사람에게 더 상처 주는 시간’을 거쳤다. ‘내가 왜 이러지? 이러면 안 되는데’ 반성하고 계속 노력하며 태도를 바꾸고 말을 고쳤다. 윤희 아빠도 이제 집안일을 도맡아 하며 간섭없이 외조를 한다. 물론 그럼에도 윤희 아빠에 대한 사소한 불만은 이어진다.
“빨래를 하더라도 분류를 하라고 하는데 몽땅 집어넣고 해요.”
“설거지를 고무장갑 끼면 찬물로 해도 괜찮은데 맨손으로 하니까 급탕비가 엄청 나오는 거예요. 기름기가 없는 그릇을 닦아도 뜨거운 물을 콸콸 쓰죠. 소독한다고 자기 딴에는.”
“고양이가 두 마리 있는데 애들이 베란다 왔다 갔다 노는 공간이 넓어야 하는데 안방 베란다 향하는 문을 조금 열어놓으래도 꼭 이거를 닫아놔요.”
윤희 아빠는 ‘쬐끔 열어놓지 않았냐?’고 항변한다고. 한다고 해도 야단만 맞는 윤희 아빠에게 윤희 엄마가 최근 칭찬을 딱 한 번 해준 적이 있다. 윤희 엄마는 윤희 또래 아이들이 결혼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어려운데 윤희와 한두 살 차이 나는, 윤희 아빠 조카 결혼식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신경을 쓰다 보니 먹으면 바로 체했다. 그렇게 힘들어하는 시간을 지켜보던 윤희 아빠가 혼자 갔다 오겠다고 했을 때 “고마워요”라는 말이 바로 나왔다는 윤희 엄마. 나를 헤아려주는 느낌이었을 듯싶다.

“마음은 여전하고 아직도 그리움은 그대로 남아있는데, 11년이 됐다고 세월이 지났다고 해서 아직 아이들의 억울한 진실도 밝히지 않았는데, 우리는 더 해야 되지 않나.”
‘그 정도 했으면 됐지’하는 이야기들에 답해주고 싶은 한마디다.
“계속적으로 생기고 있는 재난 참사들 증거가 없어지기 전에 빠르게 진상규명하고 바꿔나가야죠. 세월호참사가 너무 많이 보여준 거예요. 밑바탕이 돼서 우리가 원하는 안전 사회가 되면 좋겠어요.”
“윤석열 탄핵과 정권교체로 끝내면 안 되죠. 근본적인 거를 고쳐야죠.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자기 밥그릇 챙기기 바쁜 정치인이 아니라 우리가 달라졌으니, 우리가 바꿔야 하겠죠.”
파면이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세월호참사 11년이 끝이 아니라 여전한 현재형임을 힘주어 말하는 윤희 엄마.
세상은 짧지 않은 세월 세월호 가족을 헤아려주지 않고 무수히 상처 주고 있지만 곁에 있는 사람의 힘을 믿는 윤희 엄마를. 나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