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것이 세상을 강하게 하듯이- 팽목기억순례
김예원
2014년 4월 16일, 12살의 나는 학교를 마치고 신발주머니에서 신발을 꺼내 갈아신으며 찾아보았다. 배가 침몰했다는 뉴스를.
그리고 전원 구조되었다는 뉴스를. 전원 구조라는 소식에 쉽게 안도한 것을 기만하듯 뉴스가 자꾸 번복되었을 때,
늘어가던 희생과 실종 옆에 적힌 숫자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당혹감과 좌절감, 뒤따른 무력감은 어린 나에게도 생생했다.
2025년 3월 29일, 23살의 나는 세월호 참사 11주기를 기리며 팽목항으로 향했다.
목포 신항에서 세월호 선체를 보았다.
처음 본 세월호는 녹이 슬어 참사 후의 11년, 어쩌면 더 오랜 세월이 그대로 묻어났다. 왜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아직 마무리되지 못한 일이 있을까.
후회와 두려움, 답답함, 분노 같은 감정들은 맹렬한 원망으로 바뀌어 눈앞에 있는 진도의 깊은 바다와 녹슨 세월호로 향했다.
무서울 정도로 거대한 너에게 476명이 갇혀, 너무 깊고 차가운 너에게 잠겨버렸다고. 그리고 너는 304명을 집어삼켰다고. 그런데 너는 왜 다시 바다 밖으로 나올 수 있었고, 너는 얼마나 많은 삶과 시간을 꾹꾹 씹어 삼켰길래 그렇게 파랗고 깊냐고.
맹렬했던 원망은 우스울 정도로 금세 사라졌다.
신항에 묶여 펄럭대는 노란 리본들, 팽목항에 붙어있는 수백 개의 타일을 보고서는 도저히 원망이라는 마음을 품을 수 없었다.
리본과 타일에는 각기 다른 약속과 다짐, 사과와 아쉬움, 애정과 소망 그러니까 결국 사랑이 담겨있었다. 304명을 향한 사랑은 여전히 살아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다.
팽목항에서 노란 두부를 먹었다. 진도군민들은 궂은 날씨에도 장작을 패 불을 때고, 커다란 가마솥에 넣은 콩을 오랜 시간 저으며 두부를 만들어 주었다. 아마 그 두부에는 다정함과 굳은 마음이 생겨난 것 같았다. 부드러운 두부는 따뜻하고 단단한 맛이 났으니까.
가수 이상은의 노래 <둥글게>를 떠올린다.
“작은 빗방울이 세상을 푸르게 하듯이
부드러운 것이 세상을 강하게 하듯이
작은 꿈을 꾸는 사람들을 지켜주는 사람이 필요해”
내가 지금 무탈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지켜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팽목항까지 같은 버스를 타고 함께 간 사람들, 순례길을 같이 걸은 사람들, 4.16연대, 3월 29일 광화문을 채운 사람들… 많은 사람이 나를, 내 삶을, 내 세상을 지켜주고 있다.
그것도 부드러운 방법으로.
그래서 나도 나 혼자만의 몫보다 조금 더 커다란 몫을 가지고 살기로 다짐했다.
나도 우리를, 우리의 삶을, 우리의 세상을 지킬 수 있는 용기가 생겼으므로.
결국엔 부드러운 것이 세상을 강하게 한다는 확신이 생겼으므로.
20140416. 8자리의 숫자를 기억하는 일은 참사를 기억하는 일뿐만이 아니다.
내 삶에서 중요한 것을 잊지 않기 위한 일이다.
모두에게 안전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품는 일이다.
다시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덕을 보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의지를 태우는 일이다.
그리고 노란 팔찌를 한 내 오른쪽 손목은 꺾이지 않을 것이다, 결코.
부서진 마음이 지닌 온도
김하빈
사람은 참으로 유약하다. 우울할 때 들었던 노래를 다시 듣는 일을, 체하고 나면 그 음식을 다시 먹는 일을, 헤어진 연인이준 물을 다시 쓰는 일을 모두 주저하게 된다. 모든 기억에 감각이 덧씌워지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곳으로 다시 향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할까. 어쩌면 다시는 들여다보고 싶지 않을 곳으로 어김없이 발걸음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 팽목으로 향했다. 이제는 진도항이 된, 그러나 여전히 팽목항이라는 이름이 익숙한 곳으로.
차가 막히지 않는 이른 새벽, 서울을 떠나 정오가 되어서야 닿을 만큼 먼 길이었다. 그 긴 시간을 견뎠을 이들의 심정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렸다. 점심식사 후에는 기억순례길을 함께 걸었다. 아주 커다란 깃발의 뒤를 따라 걸었다. 비가 떨어지고 바람이 거세게 불었지만 아무래도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어떤 것들은 물리적 시간과 관계없이 같은 시간에 머문다. 선체 앞에 있는 많은 목소리가 그랬고, 팽목항에 묶여있는 노란리본들이 그랬다. 닳고 녹슬었지만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요즘은 좋은 어른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골몰한다. 일정 나이를 지났고, 매운 음식을 즐기고, 멋지게 후방주차를 하며, 사고 싶은 책들을 망설임 없이 결제하는 것이 어른이 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제 그런 것은 기준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곳에서 많은 어른들을 만났다. 함께 순례길을 걸은 여러 이름의 사람들, 정성껏 노란 두부를 만들어 주시는 진도군민들, 팽목기억관을 둘러보는 청소년들.
우리는 모두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마음. 누군가의 고통이 내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아는 마음. 그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이야말로 어른이지 않을까.
이따금씩 황정은 작가의 <디디의 우산> 한 구절이 스친다. ‘각각의 두개골은 각각의 패턴으로 맞물려 있지. 열명의 사람이 있다면 열가지, 백명의 사람이 있다면 백가지 패턴으로. 백만이라면 백만의 패턴으로. 각각은 오로지 그것 하나뿐이니까 한 개의 두개골.’
사람은 너무나도 고유하고 유일해서, 고유하고 유일한 존재에 대해 하염없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고유성과 유일성을 상실한 사람들의 마음을. 입에 담기도 힘든 슬픔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아름다움에 대해 묻게 된다. 내가 겪은 고통을 타인이 겪지를 않기를 바라는 마음. 그래서 끊임없이 안전사회에 대해 말하는 마음. 그들이 광장에서 건네주는 주먹밥의 온도를, 매 안부인사 끝에 붙여주는 안전한 하루를 보내라는 인사말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내가 흘린 눈물을 또 다른 누군가가 흘리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으로 하는 투쟁만큼 아름답고 숭고한 일이 있을까? 진상규명과 안전사회에 대한 목소리가 나를 지켜주는 것이라는 자각이 들었다. 내가 모르는 새에 수많은 이들에게 빚지고 있었다.

사람은 유약하다. 그렇지만 모두가 개별적으로 고유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 그것을 알기에 숭고한 삶을 추구할 수 있는 사람.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이러한 사람은 필히 강하게 존재한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는 새삼 내가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감각했고, 우리 모두가 마음 속에 노란 리본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곱씹었다.
열한 번째 봄. 여전히 멈춰 선 시간 속에서 우리는 기억하고 연결된다.


부드러운 것이 세상을 강하게 하듯이- 팽목기억순례
김예원
2014년 4월 16일, 12살의 나는 학교를 마치고 신발주머니에서 신발을 꺼내 갈아신으며 찾아보았다. 배가 침몰했다는 뉴스를.
그리고 전원 구조되었다는 뉴스를. 전원 구조라는 소식에 쉽게 안도한 것을 기만하듯 뉴스가 자꾸 번복되었을 때,
늘어가던 희생과 실종 옆에 적힌 숫자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당혹감과 좌절감, 뒤따른 무력감은 어린 나에게도 생생했다.
2025년 3월 29일, 23살의 나는 세월호 참사 11주기를 기리며 팽목항으로 향했다.
목포 신항에서 세월호 선체를 보았다.
처음 본 세월호는 녹이 슬어 참사 후의 11년, 어쩌면 더 오랜 세월이 그대로 묻어났다. 왜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아직 마무리되지 못한 일이 있을까.
후회와 두려움, 답답함, 분노 같은 감정들은 맹렬한 원망으로 바뀌어 눈앞에 있는 진도의 깊은 바다와 녹슨 세월호로 향했다.
무서울 정도로 거대한 너에게 476명이 갇혀, 너무 깊고 차가운 너에게 잠겨버렸다고. 그리고 너는 304명을 집어삼켰다고. 그런데 너는 왜 다시 바다 밖으로 나올 수 있었고, 너는 얼마나 많은 삶과 시간을 꾹꾹 씹어 삼켰길래 그렇게 파랗고 깊냐고.
맹렬했던 원망은 우스울 정도로 금세 사라졌다.
신항에 묶여 펄럭대는 노란 리본들, 팽목항에 붙어있는 수백 개의 타일을 보고서는 도저히 원망이라는 마음을 품을 수 없었다.
리본과 타일에는 각기 다른 약속과 다짐, 사과와 아쉬움, 애정과 소망 그러니까 결국 사랑이 담겨있었다. 304명을 향한 사랑은 여전히 살아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다.
팽목항에서 노란 두부를 먹었다. 진도군민들은 궂은 날씨에도 장작을 패 불을 때고, 커다란 가마솥에 넣은 콩을 오랜 시간 저으며 두부를 만들어 주었다. 아마 그 두부에는 다정함과 굳은 마음이 생겨난 것 같았다. 부드러운 두부는 따뜻하고 단단한 맛이 났으니까.
가수 이상은의 노래 <둥글게>를 떠올린다.
“작은 빗방울이 세상을 푸르게 하듯이
부드러운 것이 세상을 강하게 하듯이
작은 꿈을 꾸는 사람들을 지켜주는 사람이 필요해”
내가 지금 무탈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지켜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팽목항까지 같은 버스를 타고 함께 간 사람들, 순례길을 같이 걸은 사람들, 4.16연대, 3월 29일 광화문을 채운 사람들… 많은 사람이 나를, 내 삶을, 내 세상을 지켜주고 있다.
그것도 부드러운 방법으로.
그래서 나도 나 혼자만의 몫보다 조금 더 커다란 몫을 가지고 살기로 다짐했다.
나도 우리를, 우리의 삶을, 우리의 세상을 지킬 수 있는 용기가 생겼으므로.
결국엔 부드러운 것이 세상을 강하게 한다는 확신이 생겼으므로.
20140416. 8자리의 숫자를 기억하는 일은 참사를 기억하는 일뿐만이 아니다.
내 삶에서 중요한 것을 잊지 않기 위한 일이다.
모두에게 안전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품는 일이다.
다시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덕을 보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의지를 태우는 일이다.
그리고 노란 팔찌를 한 내 오른쪽 손목은 꺾이지 않을 것이다, 결코.
부서진 마음이 지닌 온도
김하빈
사람은 참으로 유약하다. 우울할 때 들었던 노래를 다시 듣는 일을, 체하고 나면 그 음식을 다시 먹는 일을, 헤어진 연인이준 물을 다시 쓰는 일을 모두 주저하게 된다. 모든 기억에 감각이 덧씌워지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곳으로 다시 향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할까. 어쩌면 다시는 들여다보고 싶지 않을 곳으로 어김없이 발걸음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 팽목으로 향했다. 이제는 진도항이 된, 그러나 여전히 팽목항이라는 이름이 익숙한 곳으로.
차가 막히지 않는 이른 새벽, 서울을 떠나 정오가 되어서야 닿을 만큼 먼 길이었다. 그 긴 시간을 견뎠을 이들의 심정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렸다. 점심식사 후에는 기억순례길을 함께 걸었다. 아주 커다란 깃발의 뒤를 따라 걸었다. 비가 떨어지고 바람이 거세게 불었지만 아무래도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어떤 것들은 물리적 시간과 관계없이 같은 시간에 머문다. 선체 앞에 있는 많은 목소리가 그랬고, 팽목항에 묶여있는 노란리본들이 그랬다. 닳고 녹슬었지만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요즘은 좋은 어른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골몰한다. 일정 나이를 지났고, 매운 음식을 즐기고, 멋지게 후방주차를 하며, 사고 싶은 책들을 망설임 없이 결제하는 것이 어른이 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제 그런 것은 기준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곳에서 많은 어른들을 만났다. 함께 순례길을 걸은 여러 이름의 사람들, 정성껏 노란 두부를 만들어 주시는 진도군민들, 팽목기억관을 둘러보는 청소년들.
우리는 모두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마음. 누군가의 고통이 내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아는 마음. 그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이야말로 어른이지 않을까.
이따금씩 황정은 작가의 <디디의 우산> 한 구절이 스친다. ‘각각의 두개골은 각각의 패턴으로 맞물려 있지. 열명의 사람이 있다면 열가지, 백명의 사람이 있다면 백가지 패턴으로. 백만이라면 백만의 패턴으로. 각각은 오로지 그것 하나뿐이니까 한 개의 두개골.’
사람은 너무나도 고유하고 유일해서, 고유하고 유일한 존재에 대해 하염없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고유성과 유일성을 상실한 사람들의 마음을. 입에 담기도 힘든 슬픔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아름다움에 대해 묻게 된다. 내가 겪은 고통을 타인이 겪지를 않기를 바라는 마음. 그래서 끊임없이 안전사회에 대해 말하는 마음. 그들이 광장에서 건네주는 주먹밥의 온도를, 매 안부인사 끝에 붙여주는 안전한 하루를 보내라는 인사말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내가 흘린 눈물을 또 다른 누군가가 흘리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으로 하는 투쟁만큼 아름답고 숭고한 일이 있을까? 진상규명과 안전사회에 대한 목소리가 나를 지켜주는 것이라는 자각이 들었다. 내가 모르는 새에 수많은 이들에게 빚지고 있었다.
사람은 유약하다. 그렇지만 모두가 개별적으로 고유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 그것을 알기에 숭고한 삶을 추구할 수 있는 사람.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이러한 사람은 필히 강하게 존재한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는 새삼 내가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감각했고, 우리 모두가 마음 속에 노란 리본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곱씹었다.
열한 번째 봄. 여전히 멈춰 선 시간 속에서 우리는 기억하고 연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