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리본의 명장 둘리
박태환 님 인터뷰
김 우
박태환 회원의 별칭은 둘리다. 63빌딩 뷔페에서 일할 때 실습 나온 조리과 한 학생이 둘리 아저씨라고 불렀다. “재밌어서 제 맘에도 든다는 거죠.” 40살이던 그때부터 쭉 둘리다. 둘리는 56년생이다. 얼굴의 주름은 사람 좋은 웃음의 하회탈 주름 정도로 느껴지는데 생각보다 이르게 태어났다. “어르신 이쪽으로 앉으세요.” 본인도 버스에서 자리 양보 받는 게 아직은 낯설다. 아무려나 나이보다 동안이다.
“열정적으로 사셔서 그럴까요?”
“철없이 살아서 그렇죠.”
둘리는 ‘집안이 좀 어려워서’ 진학이 어려웠고, 검정고시로 중졸 학력을 인정받았다. 가방끈이 짧은 만큼 일한 경력은 길고도 탄탄하다. 공장 다니다 이웃인 주방장의 소개로 ‘명동 로즈가든’이란 경양식집에 취직하며 요리의 세계로 입문했다. 물론 처음엔 설거지하고 커피 타다가 칼을 잡게 됐다. 일하는 시간엔 시키는 일을 하고, 쉬는 시간엔 버리는 양배추 겉껍질 등을 쌓아놓고 부단히 칼질 연습을 했다.
“분발해서 기술을 연마하신 거네요?”
“사귐성으로 버티고 나갔어요. 노래할 때는 표정으로 때우고 가는 것처럼요.”
표정으로 때우는 게 아니라 사실 둘리는 노래도 잘한다. 고양시 석양음악회에서 카우보이모자 쓰고 ‘아리조나 카우보이’ 노래 부르던 예전 영상도 본 적 있어 하는 말이다. 둘리의 첫 합창단은 2013년에 입단한 ‘평화의나무합창단(이하 평화의나무)’이다.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좋아서’ 지원한 곳이다. 연습하면 베이스만 22명인 ‘어마어마’한 규모의 합창단에서 14명 정도라서 합창단이라고 하기 어려운 규모의 ‘416합창단’으로 옮겼다. 2015년의 창단 멤버인 셈이다. “반드시 해야 되는 거였거든요. 꼭 하고 싶었고요.” 416합창단에 가면 서로 챙겨주려고 하고, 항상 따듯한 게 너무 좋았다. “어떤 때는 (각자 싸 오는 먹거리가) 두 가지 세 가지 겹칠 때도 있어서 미리 얘기해서 조정 좀 하자고 그랬죠.” 둘리도 텃밭의 쌈채소며 고구마 줄기 데친 걸 가져가 나누곤 했다.
둘리네 텃밭은 ‘닐리리 농장’이라는 어엿한 이름이 있는데 날라리 농장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다. 일산의 집과 농장은 버스로 25분, 걸어서 1시간 반이 걸린다. ‘요즘은 집회도 가야 하고 해서’ 일주일에 2번 정도만 오갈 수 있다. 평화의나무 지인에게 빌려 경작하는 땅이 좀 넓어서 반은 농사짓고, 반은 예초기만 돌려주며 고사리도 꺾고 그런다. 둘리의 삶을 돌아보면 주말농장으로 맺은 연이 깊다. 25년 전 고양시민회에 가입하게 된 것도 주말농장을 하다가였다.
“판매는 안 하셔요?”
“판매할 정도의 양은 되는데 영리를 하게 되면 피곤해질 거 같아서요. 판매며 결산이며 그런 게 싫어서요. 416합창단도 주고, 꿀잠도 갖다주고 그래요.”
머리가 나빠서 몸 쓰는 일을 좋아하고 또 계산하는 걸 싫어한다는데 셈할 줄 모르는 건 그이의 머리가 아니라 그이의 마음인 듯하다. 월 60만 원의 연금만으로도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는 둘리다.

77년에 입대한 군에서도 둘리는 취사병이었다. 라면 끓일 줄 아는 사람? 저요! 그렇게 취사병이 됐고, 선임의 술안주 요구를 거절했다. “안 해줬어요. 때리면 헌병대에 가서 신고하려고 했죠.” 전역하고 취업해서 리비아로 나갔을 때도 취사 담당이었다. “못된 놈이 아버지뻘인 분에게 ‘박 십장 이거 해’ 돌아버리겠더라고요.” 자신이 정규직이라는 이유로 계약직을 하대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침마다 배식 시간을 30분이나 넘겨서 오는 사람이기도 했다. 둘리는 그 사람에게 밥을 안 줬다가 현장으로 쫓겨가기도 했다. 현장 기능공들이 편들어줘서 복귀하기까지는 두어달이 걸렸다. 둘리 안의 기본 인성인 저항 정신을 느낄 수 있는 일화들이다. “고집쟁이였죠. 제가 어렸을 때부터 잘 따진다는 게 어머님 말씀이었어요.”
둘리는 요즘 416합창단 활동을 안 하고 있다.
“2년 인가 3년 됐어요. ‘형, 반음만 올려주면 안 될까?’하는데 안 되더라고요.”
“아쉽긴 해요. 행복하게 했던 합창단인데...”
나이가 있으니까 호흡도 짧아지고 음도 떨어지고, 잘 하는 사람도 많이 들어오니까, ‘나이를 인정하고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놔야지’ 했다는 둘리.
“내가 노래하는데 책임져야 하지 않을까, 그거 땜에 박근혜 때 담배까지 끊었는데 좋아지지 않더라고요. 건강은 해졌겠죠.”
단단하고 철저한 둘리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이다.
지금 부드러운 인상은 많이 웃어서 생긴 거란다. 필요 없는 이야기는 안 하고 할 얘기만 하는 스타일이었는데 특유의 사귐성은 사회생활 하며 노력해서 만든 거란다. 농담도 자주 하는데 이런 식이란다.
“여보, 장 보고 가요”라는 옆지기의 카톡에 “장보고가 온다는데 집 청소를 안 해서 어쩌지?” 답톡을 날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힙니다’ 녹음 음성이 나오면 엘리베이터가 다쳐서 아프겠다고 호응하는 식이다. 상대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두고, 혼자서 하회탈 웃음을 짓는 둘리. 딸아이는 둘리의 표정을 보고 농담할 거 같으면 얼른 제 방으로 들어간다는데 그러면 둘리는 딸에게까지 들리도록 크게 말한다고 한다.

<전국에서 '제일 이쁜' 노란리본>
둘리의 시민의식은 고양시민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고양됐다. “혼자였다가 조직과 단체를 알게 된 거죠.” 세월호참사 때는 슬프고, 당황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화가 났었다. 기울어진 배에서 계속 나오던, ‘안전한 선내에서 기다리라’는 선내 방송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딸이 보여준 동영상에서 세월호 유리창 안 아이들이 살려달라고 절규하는데 해경이 철수하는 장면은 잊을 수가 없다. “어찌됐든, 시간이 지나면서 화가 점점 더 많아졌어요. ‘태극기 모독 부대’ 때문에 더 화가 났고요.” 납득할 수 없어 화가 많아지는 만큼 ‘이거는 해야 되는 일’이라는 결심도 커졌다.
내가 젊은 시절 단무지라는 말이 있었다. 단순 무식 과격의 약자로 칭해지는 말이었다. 둘리는 그런 뜻의 단무지도 아니고, 짜장면 짝꿍 단무지도 아닌 다른 단무지의 일인자다. 바로 노란 에바폼을 잘라 노란리본을 만드는 작업의 명인이요 장인이다. 세월호를기억하는일산시민모임에서 꾸준히 수행한 실력이다. 요즘은 왕복 3시간 거리인 416연대 4층 사무실에서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 2시~6시에 노란리본을 만든다. 열려있는 시공간으로는 아무나 올 수 있고, 누구나 환영이다.
“군번줄 끼우는 사람이 제일 초보예요. 가위질할 때 45도는 날카롭고, 30도 정도가 적당해요. 기술자는 본드로 붙이는 사람이죠.”
“다른 사람이 3개 만들 때 난 2개예요. 제가 생각하는 각도로 딱 붙여야 하거든요. 내 성격이 참 못됐다는 생각이 드네요.”
자신이 만든 노란리본이 제일 예쁘다는 자부심의 둘리는 ‘짬짬이 틈틈이 시간 나는 대로’ 매듭 리본도 만든다. 한 개 만드는 데 20분씩 걸리는 정자매듭의 리본이다. “누가 저한테 매듭 리본 만들라고 하지 않잖아요.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둘리의 말을 들으며 꽃다지가 부른,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 노래가 떠올랐다.
‘언제까지’라는 나의 질문에 ‘계속’이라고 답하는 둘리. 리본은 노래와 다르게, 나이를 먹어도 손이 느려져서 그렇지 계속 만들 자신이 있기 때문이란다.
“내가 만약 그런 일을 당했을 때 옆에 아무도 없다고 그러면 얼마나 힘들까. 내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만둘 수 없는 거죠.”
“윤석열 파면 집회에 2030 나오잖아요. 그동안 표현이 안 됐을 뿐이죠. 나오잖아요. 세월호 활동도 마찬가지죠. 여건이 안 될 뿐 맘에는 다 있을 거예요.”
일상으로 돌아간 듯 보이는 사람들 마음속에도 공감과 호응의 세월호가 있을 거란다. 둘리는 세월호 활동을 하면서 다른 사회적 참사에도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려고 한다. “세월호 부모님들도 다른 피해자들과 연대하며 잘 끌고 나가 주시길 바라요. 그래야 서로 힘이 될 테니까요.” 나이 칠십. 연대하며 더 커지는 둘리를 느꼈다.
“하여튼 리본은 계속 만들 거예요. 내가 만든 게 제일 이쁘니까요.”

<'하고 싶어서' 하는 매듭 리본>
노란리본의 명장 둘리
박태환 님 인터뷰
김 우
박태환 회원의 별칭은 둘리다. 63빌딩 뷔페에서 일할 때 실습 나온 조리과 한 학생이 둘리 아저씨라고 불렀다. “재밌어서 제 맘에도 든다는 거죠.” 40살이던 그때부터 쭉 둘리다. 둘리는 56년생이다. 얼굴의 주름은 사람 좋은 웃음의 하회탈 주름 정도로 느껴지는데 생각보다 이르게 태어났다. “어르신 이쪽으로 앉으세요.” 본인도 버스에서 자리 양보 받는 게 아직은 낯설다. 아무려나 나이보다 동안이다.
“열정적으로 사셔서 그럴까요?”
“철없이 살아서 그렇죠.”
둘리는 ‘집안이 좀 어려워서’ 진학이 어려웠고, 검정고시로 중졸 학력을 인정받았다. 가방끈이 짧은 만큼 일한 경력은 길고도 탄탄하다. 공장 다니다 이웃인 주방장의 소개로 ‘명동 로즈가든’이란 경양식집에 취직하며 요리의 세계로 입문했다. 물론 처음엔 설거지하고 커피 타다가 칼을 잡게 됐다. 일하는 시간엔 시키는 일을 하고, 쉬는 시간엔 버리는 양배추 겉껍질 등을 쌓아놓고 부단히 칼질 연습을 했다.
“분발해서 기술을 연마하신 거네요?”
“사귐성으로 버티고 나갔어요. 노래할 때는 표정으로 때우고 가는 것처럼요.”
표정으로 때우는 게 아니라 사실 둘리는 노래도 잘한다. 고양시 석양음악회에서 카우보이모자 쓰고 ‘아리조나 카우보이’ 노래 부르던 예전 영상도 본 적 있어 하는 말이다. 둘리의 첫 합창단은 2013년에 입단한 ‘평화의나무합창단(이하 평화의나무)’이다.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좋아서’ 지원한 곳이다. 연습하면 베이스만 22명인 ‘어마어마’한 규모의 합창단에서 14명 정도라서 합창단이라고 하기 어려운 규모의 ‘416합창단’으로 옮겼다. 2015년의 창단 멤버인 셈이다. “반드시 해야 되는 거였거든요. 꼭 하고 싶었고요.” 416합창단에 가면 서로 챙겨주려고 하고, 항상 따듯한 게 너무 좋았다. “어떤 때는 (각자 싸 오는 먹거리가) 두 가지 세 가지 겹칠 때도 있어서 미리 얘기해서 조정 좀 하자고 그랬죠.” 둘리도 텃밭의 쌈채소며 고구마 줄기 데친 걸 가져가 나누곤 했다.
둘리네 텃밭은 ‘닐리리 농장’이라는 어엿한 이름이 있는데 날라리 농장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다. 일산의 집과 농장은 버스로 25분, 걸어서 1시간 반이 걸린다. ‘요즘은 집회도 가야 하고 해서’ 일주일에 2번 정도만 오갈 수 있다. 평화의나무 지인에게 빌려 경작하는 땅이 좀 넓어서 반은 농사짓고, 반은 예초기만 돌려주며 고사리도 꺾고 그런다. 둘리의 삶을 돌아보면 주말농장으로 맺은 연이 깊다. 25년 전 고양시민회에 가입하게 된 것도 주말농장을 하다가였다.
“판매는 안 하셔요?”
“판매할 정도의 양은 되는데 영리를 하게 되면 피곤해질 거 같아서요. 판매며 결산이며 그런 게 싫어서요. 416합창단도 주고, 꿀잠도 갖다주고 그래요.”
머리가 나빠서 몸 쓰는 일을 좋아하고 또 계산하는 걸 싫어한다는데 셈할 줄 모르는 건 그이의 머리가 아니라 그이의 마음인 듯하다. 월 60만 원의 연금만으로도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는 둘리다.
77년에 입대한 군에서도 둘리는 취사병이었다. 라면 끓일 줄 아는 사람? 저요! 그렇게 취사병이 됐고, 선임의 술안주 요구를 거절했다. “안 해줬어요. 때리면 헌병대에 가서 신고하려고 했죠.” 전역하고 취업해서 리비아로 나갔을 때도 취사 담당이었다. “못된 놈이 아버지뻘인 분에게 ‘박 십장 이거 해’ 돌아버리겠더라고요.” 자신이 정규직이라는 이유로 계약직을 하대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침마다 배식 시간을 30분이나 넘겨서 오는 사람이기도 했다. 둘리는 그 사람에게 밥을 안 줬다가 현장으로 쫓겨가기도 했다. 현장 기능공들이 편들어줘서 복귀하기까지는 두어달이 걸렸다. 둘리 안의 기본 인성인 저항 정신을 느낄 수 있는 일화들이다. “고집쟁이였죠. 제가 어렸을 때부터 잘 따진다는 게 어머님 말씀이었어요.”
둘리는 요즘 416합창단 활동을 안 하고 있다.
“2년 인가 3년 됐어요. ‘형, 반음만 올려주면 안 될까?’하는데 안 되더라고요.”
“아쉽긴 해요. 행복하게 했던 합창단인데...”
나이가 있으니까 호흡도 짧아지고 음도 떨어지고, 잘 하는 사람도 많이 들어오니까, ‘나이를 인정하고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놔야지’ 했다는 둘리.
“내가 노래하는데 책임져야 하지 않을까, 그거 땜에 박근혜 때 담배까지 끊었는데 좋아지지 않더라고요. 건강은 해졌겠죠.”
단단하고 철저한 둘리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이다.
지금 부드러운 인상은 많이 웃어서 생긴 거란다. 필요 없는 이야기는 안 하고 할 얘기만 하는 스타일이었는데 특유의 사귐성은 사회생활 하며 노력해서 만든 거란다. 농담도 자주 하는데 이런 식이란다.
“여보, 장 보고 가요”라는 옆지기의 카톡에 “장보고가 온다는데 집 청소를 안 해서 어쩌지?” 답톡을 날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힙니다’ 녹음 음성이 나오면 엘리베이터가 다쳐서 아프겠다고 호응하는 식이다. 상대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두고, 혼자서 하회탈 웃음을 짓는 둘리. 딸아이는 둘리의 표정을 보고 농담할 거 같으면 얼른 제 방으로 들어간다는데 그러면 둘리는 딸에게까지 들리도록 크게 말한다고 한다.
<전국에서 '제일 이쁜' 노란리본>
둘리의 시민의식은 고양시민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고양됐다. “혼자였다가 조직과 단체를 알게 된 거죠.” 세월호참사 때는 슬프고, 당황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화가 났었다. 기울어진 배에서 계속 나오던, ‘안전한 선내에서 기다리라’는 선내 방송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딸이 보여준 동영상에서 세월호 유리창 안 아이들이 살려달라고 절규하는데 해경이 철수하는 장면은 잊을 수가 없다. “어찌됐든, 시간이 지나면서 화가 점점 더 많아졌어요. ‘태극기 모독 부대’ 때문에 더 화가 났고요.” 납득할 수 없어 화가 많아지는 만큼 ‘이거는 해야 되는 일’이라는 결심도 커졌다.
내가 젊은 시절 단무지라는 말이 있었다. 단순 무식 과격의 약자로 칭해지는 말이었다. 둘리는 그런 뜻의 단무지도 아니고, 짜장면 짝꿍 단무지도 아닌 다른 단무지의 일인자다. 바로 노란 에바폼을 잘라 노란리본을 만드는 작업의 명인이요 장인이다. 세월호를기억하는일산시민모임에서 꾸준히 수행한 실력이다. 요즘은 왕복 3시간 거리인 416연대 4층 사무실에서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 2시~6시에 노란리본을 만든다. 열려있는 시공간으로는 아무나 올 수 있고, 누구나 환영이다.
“군번줄 끼우는 사람이 제일 초보예요. 가위질할 때 45도는 날카롭고, 30도 정도가 적당해요. 기술자는 본드로 붙이는 사람이죠.”
“다른 사람이 3개 만들 때 난 2개예요. 제가 생각하는 각도로 딱 붙여야 하거든요. 내 성격이 참 못됐다는 생각이 드네요.”
자신이 만든 노란리본이 제일 예쁘다는 자부심의 둘리는 ‘짬짬이 틈틈이 시간 나는 대로’ 매듭 리본도 만든다. 한 개 만드는 데 20분씩 걸리는 정자매듭의 리본이다. “누가 저한테 매듭 리본 만들라고 하지 않잖아요.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둘리의 말을 들으며 꽃다지가 부른,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 노래가 떠올랐다.
‘언제까지’라는 나의 질문에 ‘계속’이라고 답하는 둘리. 리본은 노래와 다르게, 나이를 먹어도 손이 느려져서 그렇지 계속 만들 자신이 있기 때문이란다.
“내가 만약 그런 일을 당했을 때 옆에 아무도 없다고 그러면 얼마나 힘들까. 내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만둘 수 없는 거죠.”
“윤석열 파면 집회에 2030 나오잖아요. 그동안 표현이 안 됐을 뿐이죠. 나오잖아요. 세월호 활동도 마찬가지죠. 여건이 안 될 뿐 맘에는 다 있을 거예요.”
일상으로 돌아간 듯 보이는 사람들 마음속에도 공감과 호응의 세월호가 있을 거란다. 둘리는 세월호 활동을 하면서 다른 사회적 참사에도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려고 한다. “세월호 부모님들도 다른 피해자들과 연대하며 잘 끌고 나가 주시길 바라요. 그래야 서로 힘이 될 테니까요.” 나이 칠십. 연대하며 더 커지는 둘리를 느꼈다.
“하여튼 리본은 계속 만들 거예요. 내가 만든 게 제일 이쁘니까요.”
<'하고 싶어서' 하는 매듭 리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