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닮은 사람[16일의 편지-2024년 10월] 어디 익어가는 것이 사과뿐이랴 –오혜란 회원 인터뷰

2024-10-16

어디 익어가는 것이 사과뿐이랴 –오혜란 회원 인터뷰

김 우 

“선수 다 됐어?”

“그럼~”

오늘 무얼 했냐고 물으니, 단양 농장에서 요즘 제철인 시라노골드 품종의 사과를 따와선 꼭지를 짧게 다듬고 종이 상자에 포장하는 일을 했단다. 에스제이엠 안산공장에 다니는 옆지기가 상의 없이 땅을 지른 뒤 주거지인 시흥과 농장이 있는 단양을 오가며 과수 농사 8년 차인 오혜란 회원이다. 오 회원의 옆지기가 내년 12월 정년이니 사과 농사는 부부의 인생 이모작을 준비하는 셈이기도 하다.  


사실 오 회원은 민중가수다. 오 회원의 옆지기는 에스제이엠의 민주노조를 일군 투사다. 오 회원에게 숱한 연대 공연 중 가장 인상에 남는 장면을 꼽아달라고 하니, 2012년 에스제이엠 공장에서 한 공연을 떠올린다. 용역 깡패들의 공장 침탈 소식을 접하고 달려간 현장에서 급하게 규탄 집회가 꾸려지고, 오 회원은 집에서 급히 간 차림 그대로 반바지 입고 모자 쓰고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이 사람이 노동운동 하겠다고 안산에 와서 결혼 한 달 전 여기 취직했어. 민주노조 만들겠다고 회사에서 조직하고, 지역에서 학습모임하고.” ‘피곤할 정도로’ 성실하고 부지런한 옆지기가 꾸려낸 모임의 사람들은 ‘우리 집에 한 주에 대여섯 번 와서 내가 밥을 해주고 치다꺼리’하는 사이 ‘내 회사 사람’이 돼 있었다. 그런 조합원의 부상 소식까지 들리자, 새벽녘 한달음에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부부는 어떻게 만나게 됐을까. 스무 살 무렵 오 회원은 노래하고 노래극 만들어 공연하는 안양문화예술운동연합이라는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단체의 대표가 서울민요연구회 활동을 하던 ‘이 사람’을 문화운동 같이하자고 안양으로 불러들인 까닭에 서로 만날 수 있었다. 공연 같이 다니면서 친해지고, 노래를 가르쳐주고 배우면서 정이 들었다. ‘맛있는 거 먹자고 꼬셔/ 영화 보러 가자고 불러’ ‘꽃송이가 꽃송이가/ 그 꽃 한 송이가/ 그래그래 피어’났다. 하지만 비장한 시대였고 엄격한 단체인지라 같이 밥 먹고 영화 본 일로 자아비판서까지 써야 했는데 어쩌면 그런 ‘탄압’이 로미오와 줄리엣의 상황처럼 두 사람에게 사랑의 불을 당겨주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오 회원을 ‘엄마의 노란 손수건’ 공동대표로 처음 만났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던 해는 오 회원이 민예총(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 지부장을 내려놓고 독집 음반을 준비하려던 때였다. 만일 참사가 없었다면 나는 오 회원을 민중가수 오혜란으로 만나보았을 터이다. 오 회원은 단원고 바로 옆에서 살았고, 참사가 나던 해는 오 회원의 둘째 딸이 단원고를 졸업한 해이기도 했다. 

“굉장히 더 각별했지. 똑같이 수학여행 배 타고 갔다 왔었지. 상상도 못 했던 일이야.”

“금방 구조됐다고 얘기됐고. 알고 보니 그게 아니어서 너무 깜짝 놀랐지. 모두.”

누군들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수학여행 가던 그 큰 배가 침몰하고, 침몰하는데도 단 한 명도 구조하지 않는 상황은 예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오 회원은 참사 당일인 4월 16일부터 단원고로 갔고, 이후 대책위로 들어가서 활동했다.


초기엔 경건하고 조용한 분위기로 촛불 들고 기도만 하던 시간이었다. 

“발언 듣다가 너무 답답해서 내가 발언했어.” 

“후배 한 명이 언니들 말 너무 시원하게 잘했다고, 뭐라도 해야지 않겠냐고 우릴 카톡방에 불렀어.”

프로그램 준비팀이라 다른 사람이 발언하도록 진행을 도와야 하는 역할이었는데도 나설 수밖에 없었고, 후배는 사이다 발언을 한 오혜란, 정세경을 콕 집어 단톡방을 꾸렸다. 엄마의 노란 손수건의 시작점이었다.

“안산에서 큰 집회가 예정돼 있었어. 전국에서 안산으로 모이는. 우리가 뭐라도 하자, 우리가 엄마 아니냐, 엄마들 모아서 무슨 행동이라도 해보자.” 

“시간 많은 내가 안산에, 시장에 가서 노란 천 끊어서 가위로 쩍쩍 잘라서 머릿수건 만들고. 우리들 요구를 해야 할 거 아니냐, 네모나게 짝짝 잘라서 요구를 적은 거야. 이게 나라냐, 아이들 빨리 구해라, 국가가 무엇이냐, 요구를 적은 거지. 매직을 가져가서 직접 쓰도록 하고. 메모지 준비해서 무작위로 나눠주고. 맨 앞에 앉아서 손 피켓을 천 피켓으로 드니까 언론을 타고. 알려졌고.”

전화를 급히 돌려 모인 열 명 정도의 인원이었지만 노란 손수건을 머리에 쓰고 앉으니, 눈에 띄었다. 당시만 해도 배의 탑승객이 살아있을 걸 희망하며 구조하라는 목소리를 키울 때였고, 노란 손수건은 기다림의 상징이기도 해서 울림이 있었다. 


세 사람은 논의 끝에 카페를 만들기로 했다. 같은 마음으로 함께 행동할 사람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진도는 안 가봤으니까. 언론을 믿을 수가 없으니까. 회원 5천을 만들어라, 세경과 나는 진도를 갔다 오자, 했지.” 나는 떡을 썰 테니 너는 글을 쓰거라, 하던 한석봉의 어머니처럼 얘기를 던져놓곤 1박 2일 진도로 자원봉사를 다녀왔더니 엄마의 노란 손수건 카페 회원은 정말 5천이 넘어있었다. 논의하고 준비하고 역할 나눈 지 일주일만의 일이었다. 화랑유원지 분향소에서 분향하고 단원고까지 갔다 돌아오는 침묵 행진을 벌인 첫 오프라인 모임에도 100명 이상이 모였다. 엄마의 노란 손수건은 행동하는 세월호 시민의 대명사가 됐다. 세월호 가족들 뒤, 시민들 맨 앞에 앉는 걸 원칙으로 삼아 집회마다 쫓아다닌 십 년이었다.

“진상규명이란 게 어디까지인지, 가능은 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꼭 우리가 바라는, 국민이 보호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길 바라. 우리 애들이 꿈을 키우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런 활동들을 하고 있는 거니까. 꼭 그런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갔으면 좋겠어.”

“나의 노래를 내가 한 곡은 만들어서 불러봐야지 했었는데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해. 그런 욕심이나 그런 것들이 없어졌어. 주어진 상황에 맞게 살아온 거지. 노래로 함께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 적 있어. 하지만 노래 공연을 거의 못 했지. 아니 안 했지. 노래를 할 수가 없었어. 이제 나는 가수인가, 아쉬움은 있지만 후회되진 않더라고.”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불렀을 이름이 ‘엄마’였을 텐데. (세월호) 가족들이 힘들고 충격이 컸을 텐데. 엄마들 살아가면서 가슴에 아이들 남아있을 거잖아. 곁에서 살아가면서 위로도 되고 (우리를) 그렇게 가족으로 받아들여 줬으면 좋겠어. 가족들이 처음엔 외부 사람들 닫고 꺼렸지. 조심스럽고 불편한 사이였다면 지금은 같은 엄마로 얘기할 수 있는 가까움이 생겼잖아. 이미 그러고 있지 않나?” 

오 회원은 세월호 참사 이후 더 투쟁적으로 됐다고 자평한다. 광화문 등지에서 시비를 거는 이들을 그냥 못 지나치고 따지고 드는 걸 보면서 신랑은 ‘쌈닭’이 됐다고 말한다. 안산416시민연대 대표로 416공동대표를 맡고 있기도 한 오 회원은 투쟁은 가열하게 하고, 세월호 가족들과는 너나 구분 없이 편안하게 지내고자 한다. 이미. 충분히. 그러하기도 하다. 그이가 수확한 가을 사과처럼 ‘자연스럽게’ 익어가고 있는 오 회원. 그이가 들려줄, 숙성된 노래 한 가락도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