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닮은 사람[16일의 편지-2026년 6월] 내 마음의 빚, 그리고 빛 – 한상호 회원을 만나다

2026-07-15

내 마음의 빚, 그리고 빛

-한상호 회원을 만나다-


김우

“구류는 살고 구속은 피하고 졸업은 하고 그랬어요.”
“이론에 충실한 사람이 아니라 민주화를 바라는 사람 이 정도였죠.”
“공장에 취업했는데 노조를 만든다거나 이러지는 못했어요.”
“성격이 소심해서 앞장서서 하는 거보다는 남들 하는 거 뒤따라 하는 정도였어요.”
한상호 회원은 26살에 대학에 입학했다. 삼수 후 군에까지 다녀와서 입학한, 늦깎이 신입생이었다. 여자 후배들은 한 회원을 아저씨라고 불렀다. 56년생으로 81학번, 그이의 학창 시절은 서슬 퍼런 전두환 정권 초기 시절이었다. 한 회원은 학내 운동권인 지하 서클의 활동과 골방 토론 문화와는 ‘반걸음’ 다르게 ‘무(無)정파’의 길을 걸었다. 혼자 독서 모임을 만들고, 가톨릭학생회 활동을 했다. ‘핵심은 아니었지만’, 나름으로 열심히 세상을 읽고 세상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지금도 살아오며 가장 보람 있는 일로 꼽는 일이, 29살이던 대학교 4학년 때 집회에서 주로 사회를 봤던 것이다.
“실력은 아닌데 사정상 어쩔 수 없이... 엄청난 용기를 가지고 맡은 거죠.”
“대중 앞에서 이야기는 할 수 있는 정도라서 그럭저럭 크게 무리 없이 진행했어요.”
20명 남짓 모였던 인원이 ‘독재 타도, 민주주의 쟁취’를 외치며 집회를 끝낼 때는 ‘꽤 많이’ 불어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졸업 후 30대 때는 공장에도 다니고, 가톨릭 관련 노동 단체에서도 일했다. 단체에선 교육 간사를 맡았다. 전국 노동자들의 2박 3일 교육을 기획하고 진행하던 시기, 노조를 민주화해 보겠다는 노동자들의 사례 발표 때 그 뜨거웠던 열의가 지금도 생생하다. 그날들 역시 한 회원에게 생의 보람 있던 시간으로 갈무리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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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 현장의 안전관리자 시절

“안산은 제2의 고향이에요.”
안산은 한 회원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오랫동안 살았던 도시’이다. 아내의 직장이 있던 안산에 신혼집을 얻어 아이 둘이 다 클 때까지 살았고, 2016년에 떠날 때까지 28년을 살았다. 세월호참사가 나던 시기에도 바로 안산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저 화랑 유원지의 행사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정도였다. 40대에 ‘일반’ 직장에 다니며, ‘생각은 변함이 없으나 행동이 안 따라가니 점점 무뎌져’ 온 터였다. 또 세월이 지나며 세월호뿐만 아니라 ‘세상일 이것저것 생각하면 너무 힘들고 머리만 복잡해지니까 가능하면 무덤덤해지자’라는 생각으로도 살았다. 지하철 경로석에 앉으면 옆자리 대부분의 사람이 가짜 뉴스 유튜브를 보고 있는 게 보이고, 정치 성향 여론조사 발표 때면 보수가 압도적으로 많이 나오는 세대로 살며 회의감도 크지만, 그렇다고 과감히 용기 내어 무언가를 하지도 못했다는 자책감도 크다.



“마음의 빚이라고 할까요. 그동안 세월호 관련해서 너무 무심했던 거 아닌가 싶어서요.”
“따로 활동하는 게 없이 가슴만 아프게 지내와서요.”
“거대한 일이 아니라 조그만 부분에서도 ‘내가 이랬더라면’ 하는 게 후회가 되죠.”
후배가 티켓이 있다면서 같이 가자고 권한 4.16연대 후원주점. 그 후원주점에서 만난 세월호 부모님. 그 권유로 그 자리에서 바로 쓰게 된 4.16연대 후원 회원 가입서. 한 회원이 4.16연대 후원회원이 된 건 이런 우연을 넘어선 필연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초인간적인 힘이 이미 정해놓은 무엇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관으로 걸어온 길에서 턱 만나게 된 어느 순간을 자신의 결심으로 맞이한 것인데, 필히 그러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뭐라도 해야 하는데’ 하는 마음의 빚이 차곡차곡 쌓여왔다가 ‘그래 결심했어, 작은 이것이라도 하자’는 마음의 빛으로 바뀌는 순간을 놓치지 않은 능동적 선택.
“인생이야 어차피 외로운 거고,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니죠.”
“맘에 맞는 친구들 가끔 만나서 술 한잔하고 그러면 되는 거죠.”
‘옛날엔 참여연대 초창기 회원’이었지만 ‘조용히 나가서 집회 참석하는 정도’였다는 한 회원이, ‘이제 새로운 사람을 사귀거나 새로운 일을 만들거나 하는 때는 아니’라는 한 회원이, ‘나이 먹고 경기가 좋지 않은 시기 새 직장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한 회원이 새로이 한 단체에 회원 가입을 하는 것은 단순한 호기를 넘어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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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윤석열 퇴진 요구 집회에서


“이 사회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들어섰으면 좋겠어요. 조금씩 진전하고 있다는 것만 있으면 좋겠는데 전진하는 것 같으면서도 들쑥날쑥하진 않은지 모르겠어요.”
“노무현 탄핵 반대 집회 때 종로 아스팔트에 쪼그려 앉아 내 인생 마지막 탄핵 관련 집회이길 바랐는데, 박근혜 때 진짜 마지막이었으면 했는데, 또 윤석열 때문에 나가고.”
평화로워서 무심할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가 않다.
“그동안 세월호 활동하는 분들은 비방과 혐오가 골수에 박혔을 거 같아요. 사회단체도 어렵다는 생각이 들고요. 아직도 윤석열 지지자가 있는 시대에 여전히 연대가 필요하죠.”
한 회원은 세상이 일정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희망만 있다면 마음이 편하겠는데, 퇴보하는 건 일시적이었으면 하는데, 오히려 혐오 표현이 더 일상적으로 돼서 우려가 크다고 한다. 또한 어처구니없는 재난이 반복되는 사회에서 세월호가 준 교훈을 잊지 않고 반성하는 것, 안전을 뒷전으로 두지 않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런 의미의 회원 가입이기도 했다.

대학 입학 때처럼 4.16연대에도 늦깎이로 들어온 한 회원. 그이가 치른 독특한 결혼식을 소개하고 싶다. ‘들통날까 봐 아무도 못 불렀던’ 결혼식. 알리질 않았으니 지인으로는 친척 외 고등학교 동창 2명만 달랑 참석했던 결혼식이었다. 공장에 다니며 ‘학출’이란 게 드러나면 안 돼서, 친구를 결혼식에 부르지도 못한, 아쉽고 안타까운 경험을 한 것이었다. 이렇듯 남다르게 살았지만 도드라지게 치열했노라 말하지 않고, 남보다 열성적이었다고 부풀려 내세우지도 않는 사람, 세상에 무심해졌다고 말하지만 그이를 한평생 이끌어 온 가슴속 한 줄기 빛으로 이미 세상에 무심해질 수 없도록 세팅된 사람, 한상호 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