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닮은 사람달고도 달고나 –남미옥 회원을 만나다

2022-06-16

달고도 달고나 –남미옥 회원을 만나다

김우 

이달엔 일찍부터 4.16연대 회원 가입을 한, 회원 번호 7번인 남미옥 님을 만났다. 

참사가 나던 2014년엔 계약직 일을 하고 있었다. 여름 광화문 단식 농성장에서 1일 동조 단식을 하며 이런 활동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고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점점 들었다. 임금 노동자의 삶을 접고 남편 사업만 도우며 연대 활동에, 4.16 운동에 몰두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광화문 광장 집회에서 만난 이에게 동네인 양천구의 모임을 소개받았다. 목동의 젊은 엄마들이 주 1회 서명받으며 활동하고 있었다. “너무 고마웠어요. 난 젊었을 때 저런 생각 못했는데 싶었고요.” 그렇게 세기강양 (세월호를 기억하는 강서양천 시민모임) 활동을 시작했다.

사실 궁금한 게 없이 ‘무대뽀’로 살았다. 세월호 참사 이후 ‘세상은 왜 이럴까?’ 고민이 들었고, 여러 공부도 시작했다. 세상에 대한 같은 고민은 이미 많은 이들이 오래전부터 해 온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겠다’는 생각이었고, 실천의 영역으로 한 발 내딛기였다. 그리곤 구청장급의 일정을 소화하는 5년을 보냈다. 세월호 참사를 알리려고 여러 시민단체에 가입하고, 노동인권 교육도 받고, 복지관 등 사람들이 모이는 곳마다 다녔다. 

가장 보람 있던 시간을 물으니 박근혜 탄핵을 외치던 광화문 광장에서 4.16연대 회원 모집을 하던 시간이었단다. 많은 이가 가입했고, 5만 원 약정서를 써주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회원 모집하느라 정작 무대 쪽엔 가보지도 못했지만 정말 많은 사람이 한마음이란 걸 느끼는 감동이 컸다. 

2017년 세기강양에서 3년 상 기준으로 활동 정리의 이야기가 나왔었다. 사람이 줄고 그만큼 더 버거워지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끈질기게 유지했다. 그러다 미옥 님이 구로로 이사를 하고 그 시기가 마침 코로나와 맞물리며 세기강양의 활동은 휴지기를 맞았다. 미옥 님도 이곳저곳에서 여러 활동을 하며 ‘지향점은 같은데 방법이 다른 것’에 부딪히며 무기력감을 느끼던 시절이었다. 

2020년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또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2021년부터 시작한 것이 노란 리본을 만들어 나누는 거다. 자비로 사서 스스로 만들고 여러 곳에 나눈다. 소식을 듣고 지인이 길게 잘라놓은 ‘단무지’를 많이도 보내줘서 유용하게 썼다. 덕분에 사고, 자르고, 붙이고, 줄을 꿰는 일 중 자르는 일을 생략할 수 있었다.

‘잊지 않을게 절대로 잊지 않을게’ 저자인 배영란 작가의 중환자실 입원 소식을 들은 김연지 님의 제안으로 10여 명이 모여 모금 운동을 전개해 작가의 동생에게 기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세월호 활동가가 세월호 활동가를 잊지 않는 마음, 혼자 두지 않겠다는 마음이었다.

미옥 님은 지난달 세기강양의 피케팅 준비물 가득한 카트에서 스티커와 리본을 꺼내서 집으로 가져왔다. 활동을 재개하지 못하고 먼지만 쌓이는 게 안타까워서였다. 주변 지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안정적인 자리를 찾아 무수히 이사를 다니던 사연 많은 카트였다. 맘에 맞는 사람 3명만 더 있으면 카트 끌고 나가 피케팅을 할 만하다는 생각인데 아직 사람을 구하진 못했다.

마을 축제 때 ‘유인책’으로 달고나 무료 체험 부스를 운영하곤 했다. 대왕 달고나를 만들어 동네 활동가들에게 맛뵈기를 하다보면 어느새 부스엔 줄이 늘어서고 마지막까지도 제일 줄이 길었다. 주민들이 줄을 서는 사이 세월호 관련 서명도 받고 선전물도 나눠 주었다. 미옥 님이 어릴 적 어머님이 달고나 장사를 했었고, 그 어머니의 그 딸로 미옥 님의 달고나 실력도 수준급인 듯하다. 달고나를 팔면서 무언가를 모색해 보려는 조짐을 읽었다. 개시 전부터 눈빛 반짝이는 미옥 님 얼굴이 달고나처럼 달달하고 달덩이처럼 환하다.